처음 눈 떠보니 보육원, 여전히 버림받은 이유조차 몰라
고졸 취업은 보육원의 퇴사 자격 요건…무방비로 사회 나와
해고통보 이후 재정난에 받은 소액대출…대포통장 사기 연루
갑작스러운 통장 압류·벌금…거리로 나오게 된 22살의 현수씨

젊음, 그리고 청춘(靑春). 듣기만 해도 벅차오르는 단어다. 누군가에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자 또 누군가에겐 다시금 경험하고 싶은 호기롭던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 젊음과 청춘은 겉보기와는 사뭇 다르다. 마냥 밝거나 아름답지 않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이 무색할 만큼 자라나야 할 새싹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서서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서히 메말라가는 그들을 H(Homeless)세대라 부르고자 한다. 그들에겐 집(Home)이 없다. 아쉽게도 의지할 곳도, 지원받을 곳도 없다. 결국,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 깊이 숨겨놓은 채 거리에 나오게 됐다. 그들은 각박한 거리의 삶에 지칠대로 지쳐갔다. 당장 어디서 잠을 청할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할 지가 그들의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것은 그들에겐 사치였다. 그러자 한 줄기 희망(Hope)마저 사라졌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젊은 놈이 쯧”이라는 말을 뱉어댄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무심코 뱉은 말은 그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우리는 가난을 잘 알지 못한다. 매스컴에서 이따금 방영되는 노숙인, 반지하, 쪽방, 고시원, 곰팡이, 무료급식 등의 장면들을 훔쳐보며 가난을 잘 안다고 착각할 뿐이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가난의 한 조각일 뿐이다. 자그마한 가난의 조각을 들고 어느 누가 노숙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둘 수 있겠는가. 노숙인의 삶을 가만히, 또 온전히 듣기 전까진 그들이 왜 노숙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을 먼 발치 떨어져 훔쳐보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가까이서 직접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리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H세대를 본격적으로 취재하게 된 계기다. 

<투데이신문>은 여전히 거리에서 지내고 있는 30대 여성 노숙인, 삶에 마침표를 찍기 전 우연한 계기로 자활을 시작하게 된 30대 남성 노숙인, 인천공항에서 거주하다 자활사업을 통해 카페에서 근무중인 20대 남성 노숙인,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거리에 살다가 다른 노숙인을 돕기 시작한 20대 남성 노숙인 총 4명을 만나봤다. 20대에서 30대, 젊은 층에 속하는 그들이 가슴 깊이 숨겨놓은 아픔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마치 지옥(Hell)같이 느껴졌다. 집과 희망이 없는 그들은 지옥에서 산다. 오랜 설득 끝에 그들이 서서히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 그들의 아픔을 공유했다. 이제 그들의 사연을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 용기내 외쳐댔던 그들의 이야기가 헛되지 않길 바라며.

 최현수(가명)씨가 그간 경험했던 노숙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가족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눈을 뜨니 보육원이었다. 꿈뻑꿈뻑 감았다 뜨는 눈 앞에는 부모님의 얼굴이 아닌 하얀 보육원 천장 뿐이었다. 탄생의 축복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왜 자신을 보육원에 두고 갔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가정형편이 불우했다든지, 당시 가세(家勢)가 기울었다든지, 하물며 부모님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든지, 분명 원인이 있을텐데 알 수 없다. 그렇게 보육원 선생님들의 손에서 자고 나랐다. 그게 당연한 것 같았다. 최현수(가명.24살)씨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삶이다.

현수씨는 어린나이부터 먹고 살 길을 걱정했다. 꿈을 위해, 혹은 학업을 위해 대학을 간다해도 등록금이 발목을 잡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특성화고‘ 홍보책자가 보였다. 특성화고는 특정 분야에 대한 인재나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특성화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다. 사실, 현수씨에겐 취업을 위한 학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막연히 고졸취업이 잘 된다고 하니 선택한 길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수씨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이따금 자기네 집에 놀러 오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은 어떤 곳일까. 단순히 거주지의 개념을 넘어선 그 곳은 현수씨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문을 열면 온전히 나를 위한 밥과 반찬 냄새가 코 끝을 찌를 것만 같다. 혹은 부모님들이 시청하는 드라마 소리가 들려올 수 있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동생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거나, 현수씨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다. 안락한 집에선 제 나이에 맞게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을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집에 놀러오라는 말이 그렇게 부러웠다. 현수씨는 친구의 놀러오라는 말을 뒤로한 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현수씨가 처음 눈 뜬 곳이 보육원이니, 보육원이 제 집이라 생각했다. 보육원 구성원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 생각했다.

보육원 퇴사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이야기 하는 최씨 ⓒ투데이신문

축하받을 고졸 취업은 보육원 퇴사 자격요건

고등학생의 현수씨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온전히 학업에 매진한 덕분에 무리 없이 고졸 취업에 성공했다. 현수씨의 첫 직장은 자동차 서스펜션을 만드는 자그마한 회사다.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현수씨도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육원에선 취업을 했으니 이제 나가야 한다 말한다. 현수씨는 아직 보육원 밖으로 나갈 준비가 안됐다. 두려웠다. 혼자서 모든걸 해결하기엔 너무 어렸고 당장 갈 곳도 없다. 그저 취업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퇴사 자격요건이 충족됐으니 나가야만 한다. 이를 어길 순 없었다. 그렇게 현수씨는 제 집 같던 보육원과 그 안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졌다.

혼자 사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했다.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툴고 부족했다. 가족 같은 보육원이 그리웠다. 그래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물 밀듯 밀려오는 공허함을 견뎌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버티고 또 버텼다. 2년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회사는 묵묵히 버텨오던 현수씨와는 달랐다.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경영난이다. 언뜻 코로나19로 인해 경기가 많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봤다. 나와는 상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코로나19는 현수씨의 직장과 현수씨를 동시에 무참히 삼켜버렸다.

회사 밖으로 밀려난 현수씨의 상황은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어긋난다면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죽기 살기로 일자리를 구했다. 물류센터 단순 노동직이다. 그렇게 현수씨는 물류센터로 향했다. 지게차를 몰 줄 아는 덕에 자격증도 문제 없이 취득했다. 한두 달 잘 다녔다. 영하를 웃도는 한겨울, 추운 줄도 모르고 일했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강을 꽝꽝 얼려버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수씨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몸이 이상하다. 땀은 흐르는데 몸은 으슬으슬했다. 몸이 너무 아파 병원을 가니 독감이라고 한다. 몸 이곳저곳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수씨는 그렇게 5일간 몸져 누웠다. 

자그마한 일수 명함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했다. ⓒ투데이신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가 바보같나요?“

회사는 냉정했다. 다른 직원을 뽑았으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해고통보. 현수씨에겐 사망선고와 마찬가지였다. 제 몸 하나 신경 안쓰고 죽어라 일만 했다. 그런데 해고라니, 사회는 현수씨의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현수씨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 하나 현수씨를 품어주는 곳이 없었다. 가리지 않고 보는 면접은 보는 족족 낙방. 월세는 속절 없이 밀려만 간다. 모아둔 돈도 바닥이 보인다.

결국, 소액대출 100만원을 받았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100만원이 현수씨의 삶을 보기 좋게 망가트렸다. 대출에 필요하다길래 전송한 서류들이 화근이었다. 사회경험이 부족했던 현수씨는 그 서류들로 대포통장을 만들 줄 상상도 못했다. 대포통장 신고로 인해 기존의 통장들은 정지됐다. 새로운 통장은 만들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통장이 막히니 일자리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대포통장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았다. 벌금형 200만원. 당장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데, 200만원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현수씨는 그저 돈 100만원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벌금 200만원이 생겼다. 벌금을 내지 못하자 가진 것들 하나둘 압류 됐다. 손 쓸 틈 조차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결국 22살의 현수씨는 노숙을 하게 됐다. 그렇게 현수씨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최씨가 지낸 인천공항 면세점 인근 전경
최씨가 지낸 인천공항 면세점 인근 전경 ⓒ뉴시스

현재 24살, 2년간의 거리생활에 마침표를 찍다

약 2년간 인천공항에서 지냈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현수씨를 겨눌 적엔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젊은 놈이 일 안하고 왜 이러고 있냐는 불호령이 떨어질 때면 ‘왜 이렇게 살아야하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가끔 죽고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노숙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정말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현수씨는 인천공항 노숙생활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살기 위해서다. 도착과 동시에 현수씨는 다시서기센터에 방문했다. 여기라면 어떠한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서기센터의 도움아래 현수씨는 천천히 사회로 나갈 채비를 했다. 다시서기센터에 머물면서 정지 됐던 통장이 풀리고 임시보조지원, 자활 일자리도 제공받았다. 지난 1월부터 자활을 시작한 현수씨는 현재 서울시 일자리를 통해 한 카페에서 일을 하고있다. 그의 나이 24세이다. 거리가 아닌 사회에서의 현수씨 얼굴에는 밝은 꽃이 피었다. 그간 어두웠던 표정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다. 현수씨는 현재 본인의 모습에 꽤 만족스럽다.

“저는 작은 행복에도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두웠던 현수씨에게 소중한 꿈이 생겼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 수많은 돈과 엄청난 명예 그 어떤 것도 아닌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 하는 삶. 주말엔 눈치볼 것 없이 쉬는 그런 보통의 삶이다. 고통스러웠던 2년간의 거리생활을 청산한 현수씨에겐 그 꿈 조차 소중했다.

끝으로 현수씨는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2030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을 건네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의지만 있으면 젊을 때는 노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030 노숙인분들도 의지를 갖고 노숙인 복지 같은것도 더 열심히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노숙인분들이 다들 마음의 병이 있으니까 의지를 갖는 것 자체가 많이 힘들겠지만, 분명 일어설 수 있는 기회는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숙인은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저도 노숙인이 될 줄 생각도 못했어요.”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갈매기도 집이 있다'는 총 4편의 사례로 구성됐으며, 이후 다양한 전문가들과 심층적으로 해결방안을 강구하는 연재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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