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최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美 점령군’ 발언을 놓고 벌어지는 occupy(점령하다) 해석 논쟁을 보고 있자니, 이명박 정부 시절 orange(어륀지) 논란이 떠오른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유래한 외래어는 안 그런데, 유독 오렌지 같은 미국 외래어 발음만 사회적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방탄소년단 지민을 닮고 싶다며 18번이나 성형수술을 한 영국인이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오렌지를 놓고 어륀지 논쟁을 벌이는 이들은 무의식중에 미국인을 닮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가능한 한 그들과 비슷하게 발음하고, 그들처럼 보이고 싶어 머리를 물들이고 얼굴을 고치고 비슷한 옷을 입으며, 유래도 모를 핼러윈을 기념한다며 괴기한 복장으로 장난친다. 그러면 자신이 좀 더 ‘우월한 사람’(미국인)이 되는 것 같으니까.

물론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부자 국가이며 뛰어난 과학 기술, 문화 역량, 학문적 성취, 진취적 기상 등 우리가 배워야 할 장점이 많은 나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을 숭앙해 스스로의 정체성과 주체성까지 상실하며 그들과 똑같이 되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다수 한국인은 지민을 닮고자 18번이나 성형수술을 한 영국인을 칭찬하지 않는다. 자존감 낮은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거나 얼빠졌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어륀지 발음 논쟁까지 벌이며 미국을 추종하는 한국인의 모습에, 미국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대다수 역사학자가 얘기하듯이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승리한 미국은 명백한 점령군으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땅에 들어왔다. 공식 문서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occupy라는 단어부터 그러하고, 일제 부역자를 중용하고 애국지사들을 탄압한 미 군정 3년의 통치 기간이 그러하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 땅에 미군 병력과 사드 등을 배치하고 남한이 북한이나 중국과 친해지는 것을 훼방 놓고 제지하는 행태가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은 곳을 발견하기 어려운 지경 아닌가. 하지만 상당수 국민은 여전히 미국을 고마운 해방군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 안달 나 있다.

그래서인지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美 점령군’ 발언에 여야 할 것 없이 마치 부모 욕을 들은 듯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 유력 야당의 대표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광주 반란’에 비유하며 역겨운 요설만 늘어놓고 있다.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쏴 죽인 전두환 도당이나 입에 담을 법한 얘기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니, 미국에 대한 진심이 그야말로 종교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수 정치인의 상태가 이러하니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절대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조차 흠모해 마지않는다.

미국의 추악한 침략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견하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미국식 부자 감세와 미국식 의료 민영화 추진에 혈안이 돼 있다. 그들에게 미국은 제일 힘세고, 제일 돈 많고, 제일 멋지고, 정의로운 우상이며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무너진 곳에는 맹목만이 남을 뿐이다.

88올림픽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학생들이 여자 하키 경기에 관중으로 동원됐는데, 동기들이 옆에 앉은 평범한 서양 관광객을 둘러싸고 종이를 내밀며 사인을 요청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어린 학생들이 뭘 안다고 그런 행동을 했겠나. 어른들이 미국인 비슷한 서양 사람이라면 만날 굽신굽신하니 보고 배운 게지. 그런 상황이 불쾌하고 못마땅했던 한 친구는, 씩씩대며 종이에 자기 사인을 해서 근처 서양 아이에게 쥐여주고 왔다.

남의 눈치나 살피며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사람을 과연 누가 존중하겠는가. ‘美 점령군’ 발언에 부러 발끈하며 미국 눈치나 보는 정치인들의 너절함을 목격하니, 그저 1988년 어느 여자 하키 경기장의 중학교 2학년이 훨씬 존중받을 만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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