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부모님의 이혼 이후 보육원서 자라
코로나19 직격탄…아르바이트 일자리 잃어
일자리 구해지지 않자 결국 거리로 나앉게 돼
노숙 생활 도중 만난 종교 단체 덕 거리 생활 청산

젊음, 그리고 청춘(靑春). 듣기만 해도 벅차오르는 단어다. 누군가에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자 또 누군가에겐 다시금 경험하고 싶은 호기롭던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 젊음과 청춘은 겉보기와는 사뭇 다르다. 마냥 밝거나 아름답지 않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이 무색할 만큼 자라나야 할 새싹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서서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서히 메말라가는 그들을 H(Homeless)세대라 부르고자 한다. 그들에겐 집(Home)이 없다. 아쉽게도 의지할 곳도, 지원받을 곳도 없다. 결국,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 깊이 숨겨놓은 채 거리에 나오게 됐다. 그들은 각박한 거리의 삶에 지칠대로 지쳐갔다. 당장 어디서 잠을 청할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할 지가 그들의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것은 그들에겐 사치였다. 그러자 한 줄기 희망(Hope)마저 사라졌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젊은 놈이 쯧”이라는 말을 뱉어댄다.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무심코 뱉은 말은 그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우리는 가난을 잘 알지 못한다. 매스컴에서 이따금 방영되는 노숙인, 반지하, 쪽방, 고시원, 곰팡이, 무료급식 등의 장면들을 훔쳐보며 가난을 잘 안다고 착각할 뿐이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가난의 한 조각일 뿐이다. 자그마한 가난의 조각을 들고 어느 누가 노숙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둘 수 있겠는가. 노숙인의 삶을 가만히, 또 온전히 듣기 전 까진 그들이 왜 노숙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을 먼 발치 떨어져 훔쳐보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가까이서 직접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리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H세대를 본격적으로 취재하게 된 계기다. 

<투데이신문>은 여전히 거리에서 지내고 있는 30대 여성 노숙인, 삶에 마침표를 찍기 전 우연한 계기로 자활을 시작하게 된 30대 남성 노숙인, 인천공항에서 거주하다 자활사업을 통해 카페에서 근무중인 20대 남성 노숙인,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거리에 살다가 다른 노숙인을 돕기 시작한 20대 남성 노숙인 총 4명을 만나봤다. 20대에서 30대, 젊은 층에 속하는 그들이 가슴 깊이 숨겨놓은 아픔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마치 지옥(Hell)같이 느껴졌다. 집과 희망이 없는 그들은 지옥에서 산다. 오랜 설득 끝에 그들이 서서히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 그들의 아픔을 공유했다. 이제 그들의 사연을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 용기내 외쳐댔던 그들의 이야기가 헛되지 않길 바라며.

이용호(23)씨가 거리 노숙인을 위로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어엿한 청년 이용호(23)씨는 지난해만 해도 노숙인이었다. 아직 젊은 그에게 거리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7일간 굶는 것은 기본, 배가 너무 고플 적엔 물로 배를 채웠다. 물로 채운 배는 한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용호씨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노숙생활에 무뎌질 무렵, 불행 중 다행으로 한 선교교회 목사의 눈에 띄어 다른 노숙인들에게 베풂을 실천하는 중이다. 조금씩 미소를 찾아가는 그에겐 남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아빠 배 타고 올게”

용호씨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부모님은 이혼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였기에 용호씨는 혼란스러웠다. 용호씨가 꿈꿨던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은 말 그대로 꿈이 됐다.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더욱 잔인하게 다가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따로 살기 시작하자 불행이 시작됐다. 어머니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마저 집을 나섰다.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용호씨는 형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1살 터울의 형은 아직 가장의 노릇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힘을 합쳐 이 역경을 헤쳐나가기엔 그 둘은 너무 어렸다. 그저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던 친척들은 용호씨와 형에게 보육원을 권했다.

용호씨는 보육원 가는게 싫었다. 분명 아버지가 존재하는데 왜 보육원에 들어가야하는지 납득이 안 됐다. 친척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용호씨는 보육원으로 향하게 됐다. 용호씨의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용호씨는 낯선 보육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을 막고 울며 지냈다.

보육원에서 기나긴 학창시절을 보낸 용호씨는 한 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인 사회복지사와는 거리가 멀어 방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휴학을 선택하게 됐다. 대학교 휴학은 보육원 퇴사 사유다. 그렇게 용호씨는 보육원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떙볕이 내리쬐는 사회로 향했다. 보육원 밖을 벗어나 용호씨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제주도에 위치한 한 고깃집이었다.

용호씨가 쪽방촌 거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모습 ⓒ투데이신문

내 집은 창고, 원룸, 고시원, 그리고 거리

제주도 작은 고깃집에 자리를 잡은 용호씨의 첫 집은 창고다. 가게 주방, 서빙을 도맡아 하던 젊은 청년이 기특했던 사장님은 가게의 자그마한 창고에서 용호씨가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용호씨에겐 창고가 소중했다. 적어도 그 창고에선 먹고 자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벌어둔 월급으로 짧은 제주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남양주로 향했다.

보증금 400만원에 월세 45만원, 핸드폰 가게에서 일을 하기 위해 남양주로 건너온 용호씨가 마주한 집 값이다. 제주도에서 넉넉히 벌어놨던 덕에 휴대폰 가게 인근 원룸에 무사히 입주하게 됐다. 그리 크진 않지만 집다운 집이다. 뿌듯했다.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써 최선을 다 해 일했다. 휴대폰 가게 사장님도 그런 용호씨를 각별히 아꼈다. 스스로 돈을 벌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워질 무렵, 코로나19라는 비극이 용호씨를 기다리고있었다.

“사장님, 저희 가게는 문 안닫죠?”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를 보고있자니 용호씨는 걱정이 앞섰다. 사장님은 걱정말라며 용호씨를 다독였다. 용호씨는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출근을 이어갔다. 그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코로나19 거리두기 단계가 2단계로 격상되는 순간, 휴대폰 가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용호씨는 그렇게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게 됐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그 마저도 쉽지않았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월세는 정확한 날짜에 칼같이 빠져나갔다.

돈이 서서히 바닥나자 결국 용호씨는 보증금이 없는 고시원으로 향했다. 금방 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보증금을 보태 월세를 충당하며 알바를 구할 심산이었다. 무보증금에 월세 32만원, 용호씨는 영등포에 위치한 고시원으로 향했다. 지내던 원룸보다 훨씬 작고 열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리에 나앉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고시원 생활을 이어갔지만 작은 알바자리 하나 쉽게 구하지 못했다. 코로나19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간 모아놨던 돈도 바닥이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노숙인들이 모이는 서울역 지하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있다. ⓒ투데이신문

북극한파 11월, 거리로 향하다

“첫 월급 받을 때까지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돈은 바닥나고 일자리는 구해지지 않자, 염치 불구하고 고시원 주인에게 건넨 용호씨의 조심스러운 한마디였다.  주인 역시 경제적 상황이 녹록치 않아 이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용호씨는 가진 게 적었다. 코로나19는 그 마저도 모두 앗아갔다. 가진 게 적어서일까 그 충격은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했다. 국군장병라운지 청량리역 TMO가 용호씨의 다음 집이 됐다. 22살, 아직 어린 나이에 온 몸이 으스라질 것 같은 충격을 감수해야했다.

청량리역 TMO 문 앞에서 용호씨는 잠을 청했다. 바닥은 딱딱했고 온 몸을 할퀴는 찬 바람이 연일 용호씨를 괴롭혔다. 발 끝이 너무 아팠다. 잠을 자지 않으면 뜬 눈으로 그 고통을 겪어야 했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딘가 허전하다. 머리맡에 둔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용호씨의 가방을 훔쳐간 것이다. 결국, 몸뚱이를 제외하면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됐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럴수록 용호씨는 더욱 더 무기력해져만 갔다. 

그나마 아버지뻘은 돼 보이던 노숙자가 용호씨를 챙겨줬다. 음식이며, 담요며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눠줬다. 용호씨는 그 노숙인 덕에 시린 겨울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 같던 노숙자와 동거동락하며 거리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한 선교교회 목사가 용호씨를 목격했다. 평소 따뜻한 담요와 음식을 나눠주던 그 목사는 용호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본인이 자그마한 고시원을 구해줄테니,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보자는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용호씨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거리생활을 운좋게 청산하게 된 용호씨는 가끔 목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23살의 용호씨는 그렇게 거리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재 방을 구해줬던 목사의 선교교회에서 노숙인을 대상으로 봉사를 하고있다. 노숙인의 고충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같던 노숙인이 그랬듯,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본인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정을 배풀 수 있음을 몸으로 배운 그다. 용호씨는 사회복지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조금만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다시 힘을 내 사회에 적응하고 있었다.

다시서는 잠자리라는 슬로건 아래 깊은 잠에 빠진 노숙인들
다시서는 잠자리라는 슬로건 아래 깊은 잠에 빠진 노숙인들 ⓒ투데이신문

그간 정부지원을 왜 안받았느냐 물으신다면

용호씨가 마냥 거리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육원에서 퇴소하면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던 용호씨다. 그러나, 거리로 나앉은 동시에 일정한 주소지가 없어 기초생활수급을 받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에 타지역이 적혀있던 용호씨는 주소지를 옮길 수 없었다. 용호씨가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려하니 현재 사는 곳이 어딘지, 세대주가 누군지, 전화번호는 뭔지 꼬치꼬치 캐묻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데, 일정한 거주지가 있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한 경험이었다.

아울러 보육원을 퇴소하는 순간 남남이 되는 현실이 아쉽다고 전했다. 분명 보육원에서 퇴소하는 사람들 중 자신과 비슷하게 거리 노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보육원 자체에서 자립 교육을 하는 것은 좋은 취지임에는 틀림 없지만, 보육원 밖을 나가는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의무적으로 진행되던 교육에는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작 지하철 노선도 조차 볼 줄 모르던 용호씨다. 특히 보육원 출신 사람들은 사기에 취약하다고 전한다. 이런 사기에서 피하는 법이나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갈매기도 집이 있다'는 총 4편의 사례로 구성됐으며, 이후 다양한 전문가들과 심층적으로 해결방안을 강구하는 연재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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