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전태일 열사’는 부당한 노동현실 가운데서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이 도래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육신을 화염 속에 내던지는 희생도 서슴지 않았죠.

그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열악한 노동현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사각지대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다 목숨을 잃곤 합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노동존중사회에 대한 희망에 숨을 불어 넣어 줄 새로운 노동정책이 필요한 때, <투데이신문>은 ‘우리가 바라는 근로기준법’을 기획했습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께서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손수 남긴 의견들을 토대로 실제 노동현장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이 원하고 바라는 노동정책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남긴 글 ⓒ전태일기념관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오전 8시 출근과 대중없는 퇴근,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일 해야 하던 시절 ‘시간을 돈 주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 워라밸 있는 삶이 간절했죠.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은 ‘직장 생활의 질(The Quality of Work Life)’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1972년 미국의 자동차 노동자들과 제너럴 모터스가 함께 국제노동관계 콘퍼런스를 후원하며 노동개혁을 위한 포괄적 개념으로 ‘직장 생활의 질’을 활용했다는 기록입니다. 2000년대부터 이 개념이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받으면서 정책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멀지 않은 과거 우리나라는 ‘월급 많은 직장 = 최고’로 여겨지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직장에서 오래오래 살아남기 위해 퇴근 후에도 일하는 생활이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수당도 챙겨주지 않는데 말이죠.

80년대 직장 생활을 하다 이제는 자영업자가 된 50대 중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젊어서 직장 다닐 때는 수당이 뭐야, 월급 주면 회사 일 아니라도 했어요. 하라면 해야지 뭐 어떻게 해요. 밤이고 낮이고 사장 집안 심부름까지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어요. 그게 몸에 배서 그런지 처음에는 일이 남았는데도 퇴근 시간 되면 칼같이 집에 가는 직원들이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또 무급으로라도 쉬거나, 휴가 가는 거 볼 때면 ‘남들 쉴 때 다 쉬면 언제 돈 버나. 놀고 싶은 마음이야 다 똑같지’라는 생각도 들고요.” - 자영업자 A(54)씨

이젠 한국사회도 ‘일과 삶의 균형’의 중요성이 점점 대두되고 있습니다. 더는 회사와 일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겠다는 노동자는 없습니다. 때문에 일과 삶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워라밸은 직업과 직장을 선택할 때 중요한 지표로 작용합니다.

실제 지난 4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함께 직장인 및 구직자, 아르바이트 노동자 306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선호하는 삶의 방식’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직장인의 65.8%,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62.5%가 워라밸을 추구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연령에 따라서는 20대가 66.0%로 가장 높았고, 30대 64.5%, 40대 54.4%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워라밸 지수는 OECD 국가들 중 하위권에 속합니다. 2017년 보험연구원이 공개한 KiRi고령화 리뷰에 따르면 국내 워라밸 지수는 10점 만점에 4.7점으로, OECD 35개국 가운데 32위를 차지했습니다.

워라밸 지수 상위권을 차지한 국가는 △네덜란드 9.3점 △덴마크 9.0점 △프랑스 8.9점이었습니다. 이들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근무시간 단축, 유연근무제 도입 등 워라밸을 위한 제도적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도 주52시간 도입 등 노력을 해오고 있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워라밸을 꿈만 꾸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근무시간 단축만으로 워라밸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야근이나 휴무근무가 당연하게 자행됐던 사회풍토 때문인지 초창기 워라밸은 ‘저녁이 있는 삶’ 등의 개념으로 많이 해석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적 개념을 떠나 일과 삶이 완전히 분리된 진정한 워라밸을 노동자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업무 특성상 성수기에는 한 달 내내 주 7일 근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휴가나 연차에 여행이라도 가려면 노트북은 필수입니다. 갑작스러운 업무처리나 거래처 연락 등 언제, 어떻게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 척 넘기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출근 후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놀기 어렵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일에 둘러싸인 삶을 살아가는 이상 야근, 추가근무만 없다고 워라밸은 아닌 거 같습니다. 일과 삶이 완벽하게 분리돼야만 진정한 워라밸이 실현될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연차가 오래된 선배들도 제 삶과 다르지 않은 걸 볼 때면 일할 땐 일하고, 쉴 땐 쉴 수 있는 삶은 언제나 가능할지 불투명하기만 합니다.”- 2년차 직장인 B(30)씨

“사회초년생일 때는 뭐든 열심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모든 부서의 일이 나의 일인 것 마냥 일했지만 그 모든 건 초년생의 착각이었죠. 그 착각을 일깨워 준 건 공교롭게도 지병이었던 갑상선 항진증이었어요.열심히 살수록 병세는 짙어졌고 약을 끊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 워라밸은 이직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한때 현재 일하는 직장의 절대적인 업무시간은 일전의 직장들보다 확연히 낮다 시간적 견해로 본다면 워라밸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초년생 때 느껴보지 못했던 실적에 대한 압박과 퍼포먼스에 대한 압박이 상당합니다. 이로 인해 새벽에도 몇 번씩 깨곤 합니다. 업무시간은 줄었지만 일로 인해 고통받는 시간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워라밸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5년간 쉼 없이 달려온 나는 지금 단연코 업무시간이 줄었다는 것이 워라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일하는 시간이 얼마이더라도 내가 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만족하는 게 진정한 워라밸 아닐까요.” 5년차 직장인 C(29)씨

학창시절 부모님께서 ‘공부할 땐 하고, 놀 땐 놀아라. 공부 못하는 애들이 꼭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만 길더라’라고 했던 말이 직장인이 돼서야 새삼 이해됩니다. 일할 땐 하고, 쉴 땐 쉴 수 있는 노동세상으로 거듭나 진정한 워라밸이 실현되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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