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 여자 양국 국가대표 안산 선수가 지난 7월 30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양궁장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우승으로 양궁 3관왕을 달성한 뒤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2020 도쿄올림픽 여자 양국 국가대표 안산 선수가 지난 7월 30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 양궁장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우승으로 양궁 3관왕을 달성한 뒤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2020 도쿄올림픽에서 사상 첫 양궁 3관왕에 오르면서 양궁의 역사를 다시 쓴 안산 선수가 남성을 혐오한다는 어이없는 비난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남성들이 안 선수가 숏컷을 하고, 과거 자신의 SNS에 신조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고 지적하며 메달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왜 숏컷을 했는지 묻는 댓글을 다는 등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사상 검증’을 하는 이들도 나타났고, 어떤 이들은 안 선수가 광주여대에 재학 중인 사실을 들며 ‘여대 출신 숏컷은 높은 확률로 페미니스트’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안 선수는 “왜 머리를 자르나요?”라는 댓글에 “그게 편하니까요”라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종목을 불문하고 숏컷을 한 여성 운동선수는 많습니다. 집중하거나 움직이는데 방해돼서, 긴 머리보다 시원하고 편해서, 그냥 짧은 머리가 좋고 잘 어울려서 등 숏컷을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모두 숏컷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긴 머리, 단발머리, 숏컷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머리 스타일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안 선수에 대한 어이없는 비난이 일자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숏컷 사진을 게시하며 안 선수에 대한 지지와 남성들의 편협한 잣대에 대응하는 릴레이 캠페인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에 안 선수를 비난하는 이들은 ‘숏컷은 문제가 아니라 안 선수의 남혐 단어 사용이 문제’라며 지적을 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이 말한 남혐 단어는 ‘웅앵웅’, ‘오조오억’ 등의 신조어입니다.

이들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웅앵웅’은 한 누리꾼이 한국영화에서 주변 음향에 비해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점을 비판하며 의성어로 대사를 표현한 ‘웅앵웅 쵸키포키’에서 유래됐습니다. 이는 상대의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잘 들리지 않을 때 사용하는 밈(meme)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오조오억’은 단순하게 무수히 많음을 나타내는 강조표현으로, 밈으로 사용된 지 오래된 단어입니다.

안 선수를 비난하는 이들은 이들 단어가 여초 커뮤니티 혹은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사용하는 용어라며 남혐 단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 단어는 여초 커뮤니티에서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여초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온라인 전반에서 사용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또 단어 자체에 남혐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권에서도 이를 받아 논란을 키웠습니다.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SNS에 “논란의 시작은 허구였으나, 이후 안 선수가 남혐단어로 지목된 여러 용어들을 사용했던 것이 드러나면서 실재하는 갈등으로 변했다”면서 “논란의 핵심은 ‘남혐 용어 사용’에 있고,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안 선수가 사용한 단어들은 남혐 단어라고 하기 어려울뿐더러,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인지를 물으며 사상검증을 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웅앵웅’이나 ‘오조오억’이라는 단어 사용을 비판하는 것이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양 대변인이 말한 ‘래디컬 페미니즘’은 아마도 지정성별(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인 이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트랜스젠더 혐오성향을 가진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들의 주장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웅앵웅’은 여초 커뮤니티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고, 여초 커뮤니티는 곧 터프 집단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하지만 TERF의 주장은 페미니즘 내에서 주류 의견이 아닙니다. 여초 커뮤니티라고 해서 모두 페미니스트 집단도 아니고, 페미니스트 집단이라고 해서 모두 TERF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양 대변인은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자의적 판단으로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양 대변인은 “남혐용어로 지목된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는 피해자인 안 선수에게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습니다. 안 선수를 향한 온라인상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읽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특정 단어가 아니라, 안 선수를 향한 부당한 비난과 온라인상의 폭력입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양 대변인의 발언에 “안 선수가 ‘남혐 단어’를 써서 그렇다며 폭력의 원인을 선수에게 돌리고 있다”면서 “이번 사건의 핵심은 청년 여성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가해진 페미니즘을 빌미 삼은 온라인 폭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외신에서도 안 선수에 대한 온라인 폭력을 다뤘습니다. AFP통신, 로이터통신, 영국 BBC 등 매체는 안 선수의 숏컷을 빌미로 한 온라인상의 폭력을 보도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어 사상 첫 3관왕에 오르는 업적을 이뤘음에도 머리 스타일을 이유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를 해명하라고 요구를 받고, 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여성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만일 머리가 긴 장발의 남성 선수였다고 해도 이런 지적이 쏟아졌을까요. 여성이 자신의 스타일을 어떻게 꾸미든,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이 부당한 공격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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