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농업인 중 여성 비율 50% 넘어서
경영주커녕 배우자·보조인 수준의 지위
임금격차·노동력 저평가 등 차별 잇따라
“성평등 농업정책으로 권리 보장해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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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과거에는 여성과 남성이 하는 일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예컨대 기계설비나 건설 분야는 당연하게 남성이, 간호사나 미용업은 당연하게 여성이 하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점차 해소되며 노동의 유리벽은 점차 허물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변화를 위한 실천적 움직임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별 분업에 따른 차별이 진전 없이 잔존하는 곳도 남아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농업’이다.

농업 주종사자 가운데 여성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지 오래이지만 경영주는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경영주 외 농업인으로 일하고 있다.

또 동일 업무를 하더라도 남녀 농업인 간 임금 차이는 4~5만원에 달한다.

농업 진흥 및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농업협동조합중앙회(이하 농협)에 가입되지 않은 여성 농민도 여전히 절반에 가까우며, 조합의 이사나 대의원의 비중도 남성 농업인이 압도적으로 높다.

인력부족 등으로 가뜩이나 농촌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가운데 점점 더 궁지로 내몰리는 상황을 더는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여성 농민들은 최근 여성농민권리 실현을 위한 새로운 농업정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성평등 농업정책으로 여성 농민 지위·권리 보장하라는 그들의 투쟁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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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늘어나는 여성 농업인 비중

우리나라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감소하며 최근에는 한자릿수까지 내려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연도별 농림어업비중은 △1975년 45.7% △1985년 24.9% △1995년 11.8% △2005년 7.9% △2015 5.2% △2019년 5.1%로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반면 여성 농업인의 수는 늘어나는 모양새다.

농가 인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0년 50.3%까지 올라섰으며 2010년 51.0%로 점진적인 증가세를 나타냈다.

2019년 기준 전국 농가 중 여성의 수는 114만명으로, 110만명인 남성 보다 4만명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농업주종사 인구 중 여성의 비율도 1970년 28.3%에서 2010년 53.3%로 늘어난 양상이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 취업자 비율은 1975년 45.7%였던 반면 점차 감소세를 보이며 2015년에는 5.2%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같은 해 농립어업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66%에 달했다. 농업에서 여성의 노동비중도 1975년 33.3%에서 2015년 48.1%로 크게 증가했다.

머릿수는 늘지만 권리는 여전히 ‘바닥’

남성 농업인들이 농기계를 운전할 때, 여성 농업인들은 쪼그려 앉아 밭을 맸다. 여성 농업인은 남편의 농업을 돕는 보조자이자 가정주부 그 사이 어딘가의 존재로 여겨져 왔다.

여성 농업인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노동시간과 기여도가 증대하며 역할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분야에서 여성 농업인의 위치나 그에 따른 지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 농업경영체의 경영주는 남성 농업인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성이 ‘경영주’, 배우자인 여성은 ‘경영주 외 농업인’으로 등록했다. 그러다 2016년 농업에 참여하는 경영주 배우자의 양성평등 및 직업적 지위를 보장하는 취지의 ‘공동경영주’ 제도가 도입함으로써 변화를 꾀했다.

전국여성농민총엽합회가 올해 1월 공개한 ‘2020년 여성농민 성평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농업인의 19.0%만 경영주로 등록됐다. 나머지는 △‘경영주 외 농업인’ 31.8% △‘공동경영주’ 29.1% △‘미등록’ 13.6%로 집계됐다.

연도별 공동경영주 등록 인원은 △2017년 2만3000명 △2018년 2만7000명 △2020년 6월 말 3만8969명으로 증가폭이 크지 않다.

공동경영주 도입이 개선 효과는 있었으나, 그 정도가 크지 않다고 평가된다. 여전히 상당수의 여성 농업인이 경영주 외 농업인이나 농업경영체 등록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 원인으로는 공동경영주 지위가 있지만 실제 권리가 경영주와 동일하지 않은 점이 지목된다.

경영주는 전업·겸업을 하더라도 경작 면적 1000㎡ 이상, 영농 종사 90일 이상, 농산물 판매액 120만 원 이상 등의 조건만 맞으면 농업 경영주로 등록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경영주는 겸업은 물론 일용직까지도 등록이 불가하다.

하지만 농업소득이 적고 겨울 등 계절적 실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겸업은 불가피하다. 또 농업 생산 이외에 농산물 가공·유통·판매 등 농촌융복합산업(6차산업) 등도 겸업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공동경영주 등록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향된 노동가치, 그리고 임금격차

여성 농업인의 주 작목은 밭과 하우스인데, 이들이 주 작목을 중심으로 받는 평균 일일 임금은 5~7만원 52.2%, 8~10만원 41.6%으로 10명 중 9명은 10만원 이하의 일당을 받는 셈이다.

애초에 임금 자체가 낮게 책정됐다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다. 남성 농업인과 동일 노동을 하더라도 임금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남성 농업인과 여성 농업인이 같은 일을 할 때 임금 격차는 △2만원 미만 8.6% △2~3만원 30.4% △4~5만원 40.1% △6~7만원 2.5% △8~10만원 6.1% △10만원 초과 2.4% 순으로 대체로 적게는 2~3만원, 많게는 4~5만원가량 일당 차이가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농업인의 성별 간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남성 농업인의 물리적 힘이 강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농업현장에서 여성 농업인의 역할이 남성 농업인에 비해 결단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성별 논리’에 근거한 임금 지급은 개선돼야 한다는 여성 농업계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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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 권리의 부재

각 마을에는 아내와 여성의 모임이라는 뜻의 부녀회(婦女會)가 오래전부터 조직돼 왔다.

남성 농업인들이 중심이 된 주민자치회가 마을의 주요 결정 사항을 논의하는 조직이라면, 여성 농업인들의 중심인 부녀회는 마을잔치나 면단위 행사에서 손님맞이나 음식장만 등을 주도적으로 해왔다.

최근에는 기존 부녀회에 씐 역할 프레임을 개선하는 취지로 ‘마을여성회’라는 명칭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변화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여성회(부녀회)의 주요 활동 내역으로는 여전히 ‘마을 행사 시 음식장만’이 68.2%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회관 및 마을 길 청소’ 9.7%, ‘마을 공동 수익사업’ 6.8%, ‘자원봉사’ 10.4%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타’ 응답자들의 상당수가 ‘모두 다 한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다.

농업계에는 농촌과 농민을 위한 ‘농협조합원’이라는 기구가 존재한다. 각 지역에 공판장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농산품을 구매해 도시에 판매하는 역할을 한다.

농협조합 가입 시 이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여성 농업인의 10명 중 4명은 농협조합에 가입하지 못하거나,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 이유는 ‘농협평균 출자금이 너무 높아서’라는 답변이 26.2%로 가장 많았다.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지을 때 남편이 먼저 농협조합에 가입해 출자금을 납부한 상태에서 적게는 150만원 많게는 500만원까지 지출해야 한다. 출자금에 대한 부담이 여성 농민들의 농협조합 가입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농지 소유, 농업경영체 등록 등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 가입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여성 농업인들은 조합원이 되더라도 대의원이나 이사 등 주요 보직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다. 여성 조합원 가운데 대의원 또는 이사 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10명 중 2명꼴에 불과했다. 2015년 농협법 개정에 따라 지역농협의 여성대의원 의무할당제가 도입됐지만 이를 모르는 여성 농업인도 50.7%에 달했다.

여성 농업인이 대의원이나 이사가 되기 어려운 이유로는 ‘기존에 하던 사람이 이어가던 체계라서’가 38.1%였으며 ‘여성이 참가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라’ 21.6%, ‘참가 자격이 없어서’ 13.6%, ‘충족 기준이 너무 높아서’ 8.6% 등 순으로 나타났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인식이 농업계 전반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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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8일 열린 전국여성농민회 경남연합 '여성농민 권리실현 및 11월 총궐기 투쟁' 선포식 ⓒ뉴시스

“농가 중심 농업정책 개선돼야”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이수미 연구기획팀장은 여성 농업인이 단순히 농민으로서 활동영역이나 역할이 커졌다고 보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 팀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여성 농업인은 보조인 정도로 여겨져 왔다면, 이제는 다양한 작물 생산과 6차산업의 확대로 늘어난 가공업 등으로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또 고령화된 농촌사회에서 마을 요양보호사나 간병인 등 돌봄의 역할도 여성 농업인의 몫”이라며 “단순히 농민으로서 역할이 커졌다기보다는 농촌사회 내에서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농업사회에서의 여성 농민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위나 권리 상승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는 농가 중심의 농업정책을 꼽았다.

이 팀장은 “농지는 대부분 남성 농업인의 소유로 등록돼 있고 농가, 즉 농업경영체도 농지를 소유한 남성 농업인들이 대부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농민수당 등 여러 보조금이나 혜택은 경영체를 기준으로 지급하다 보니 여성 농업인들은 제외되고 있다”며 “주체적인 권리를 명확하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 농업인의 지위 확보 등을 위해서는 이름뿐인 공동경영주 제도 개선을 가장 많이 이야기 한다”며 “이 밖에도 시범사업으로 운영 중인 여성 농업인의 의료비 지원이나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농민기본소득 등 정책이 시급하게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 여성 농업인들은 지난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여성 농업인 지위·권리 보장을 위한 도별 여성농민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10대 요구안을 정부와 각 지자체에 촉구했다.

10대 요구안에는 △여성 농민의 농민으로서 지위와 권리보장 및 성평등한 농업정책실현 △농민기본법 제정 △모든 농민에게 농민수당을 지급 및 농민수당법 제정 △농지 전수조사 및 농지개혁 실시 △주요농산물 공공수급제로 농산물 가격 보장 △농업재해보상법 제정 및 기후위기 대책 마련 △농업예산을 국가예산 대비 5% 이상 확충 △식량주권 실현과 먹거리기본법 제정 △여성 농민 건강권 확보 및 생활기본권 보장 및 농촌인력난 근본대책 마련 △통일농업실현과 주한미군철수 및 국보법 폐지 등이 담겼다.

이들은 오는 11월 10대 요구안을 가지고 거리로 나서는 여성농민대회와 농민총궐기를 예정 중이다. 성평등 농업정책으로 지위·권리를 보장하라는 114만 여성 농민들의 함성에 과연 누가 응답을 해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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