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그늘협동조합의 ‘마음보듬’ 블라인드 상담 서비스
서울대 학생이 사회적 가치창출을 목적으로 시작해
50분 동안 깜깜한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힐링 대화
시각장애인의 공식 직업으로 인정받은 ‘마음보듬사’

ⓒ게티이미지뱅크

【투데이신문 조유빈 기자】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현실의 갑갑함. 그런 갑갑함에 가끔씩 짓눌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심정을 토로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종종 “당신만 힘든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오고 간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모두가 지쳐있는 모습이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고민까지 덧붙이기에는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누군가와 속 깊은 얘기를 나누기가 더욱 힘들어진 시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가만히 방치해버리면 나중에 마음의 과부화가 올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우울증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는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곳이 없을 때는 봄그늘협동조합(이하 봄그늘)에서 진행하는 '마음보듬' 상담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봄그늘은 서울대학교 소셜벤처경영학회 ‘인액터스’에서부터 시작된 단체다. 봄그늘이란 이름은 ‘그늘 진 마음을 보다’, ‘당신의 그늘 진 마음에 봄을 가져오다’ 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이들은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봄그늘의 소셜미션은 시각장애인 특화직업 창출과 멘탈헬스케어 서비스의 대중화였다. 이러한 주제로 당시 학회의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서 생각해낸 것이 현재 마음보듬 블라인드 상담 서비스다.

마음보듬 블라인드 상담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50분 동안 이뤄지는 1:1 힐링 대화 서비스로, 주요 핵심은 어두운 환경 속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만 듣고 진행된다는 점과 별칭을 사용함으로써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또한 시각장애인 상담사를 ‘마음보듬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봄그늘과 외부 전문상담사가 협업해서 만든 자체적인 커리큘럼을 통해 직업개발과정으로 인정을 받은 어엿한 공인직업이라고 한다.

기자는 직접 블라인드 상담을 체험해보기 위해 봄그늘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음보듬을 찾아갔다.

체험하기 전, 매니저가 안경과 리모콘을 건넸다. 매니저는 안경을 쓰고 상담실에 들어가야 된다고 설명했다. 안경은 시야를 아래로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리모콘은 상담 중에 어디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누르면 된다고 한다.

설명을 다 들은 후 안경을 쓴 채 매니저의 손을 붙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책자 및 안경과 리모콘 ⓒ투데이신문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상담을 받기 전 미리 별칭을 정해 제출했다. 별칭은 ‘장미’.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도 했고, 담당 마음보듬사(상담사)의 별칭이 ‘어린왕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어린왕자(마음보듬사): 안녕하세요, 어린왕자입니다.

장미(기자): 안녕하세요, 장미입니다.

어린왕자: 많이 깜깜하죠?

장미: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어린왕자: 장미님은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하시고 싶으세요?

 

방 안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섭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등 뒤에 닿는 푹신한 소파 때문이었을까, 배경음으로 들리는 숲 속 시냇물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음보듬사의 다정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장미: 자괴감을 느껴요. 여태까지 무엇을 한 건지.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서 막막해요. 연수가 늘수록 더더욱 초조함을 느껴요. 불현듯 새벽에 불안함에 사로잡혀 잠을 잘 자지 못하기도 해요.

어린왕자: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떤 생각에 그렇게 불안함을 느끼시는지.

장미: 아무래도 나이도 나이인데, 전혀 성장하고 있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어린왕자: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뭔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장미: 음…, 업무 하는 데 있어 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거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워요. 다른 사람들은 척척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저는 가만히 머물고 있는 거 같아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렇게 나이만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종종 들어요. 주변 사람들은 이런 저를 격려해주고 있지만 제 스스로가 잘 못 받아들이고 있어요.

어린왕자: 장미님은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신 거 같은데, 맞나요?

장미: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매번 실수를 해요. 심지어 실수를 했는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지적을 받고서야 깨달아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을 느껴요.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거예요. 완벽하게 일처리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건 너무 앞선 얘기인 거 같고, 적어도 얼른 한 사람 몫이라도 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어린왕자: 만약에 장미님이 지속적으로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들 거 같나요?

장미: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을 거 같아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지금 저는 너무 많이 늦은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다 보니까 초조함과 조바심을 더 느끼고 있거든요.

어린왕자: 혹시 주변에 나보다 훨씬 나이 많으신 분이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얘기 해드리고 싶나요?

장미: 당연히 저는 응원할 거에요.

어린왕자: 어떻게요? 어떤 응원의 말을 건넬 건가요?

장미: 어차피 인생은 한 번 뿐이니까 후회 없이 도전해보면서 살아보라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어린왕자: 지금 장미님이 얘기하신 게 본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막연했던 고민을 구체화 시켜갔다. 어떤 일로 불안함을 느꼈는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 계속 물어봤다. 답변을 할수록 이 고민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차차 알아갈 수 있었다. 신기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면서 같이 찾아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애초에 다들 각자 살기 바쁘고 힘든 가운데, 괜히 개인적인 얘기만을 꺼내는 건 실례라는 인식이 있다. 그렇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아끼게 돼버린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다르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도 된다. 그 사실만으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채워지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는 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쌓아 왔던 스스로를 싫게 느꼈던 경험들을 차분하게 들어줬다. 처음에는 직접 입으로 싫은 순간들을 얘기하는 게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마치 무거운 짐을 하나하나씩 내려놓는 것 같았다. 또한 얘기하면서 평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꽤 상처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이런 짐도 짊어지고 있었구나’ 하고,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린왕자: 어떻게 하면 자신이 좋아질 수 있을 거 같아요?

장미: 하하, 글쎄요? 어렵네요.

어린왕자: 어렵지 않아요. 나를 위해서 뭘 하면 기쁜지 생각해보면 장미님은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실 거에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장미님, 자기 자신한테 유해져도 돼요.

 

왠지 그의 말에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50분이 되자 알림이 울렸고, 매니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안경을 쓰고 매니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이렇게 온전히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만을 털어놓은 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정말 좋았어요.” 안경을 벗고 매니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온 진심 어린 첫 마디였다.

이렇게 마음보듬 블라인드 상담 서비스 체험을 마쳤다.

 

흰지팡이의 날 ⓒ게티이미지뱅크
흰지팡이의 날 ⓒ게티이미지뱅크

굳이 붙을 필요 없는 수식어

 

블라인드 상담은 오히려 눈을 마주보며 나눈 대화보다 더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게 도와줬다. 마음보듬사 또한 상대의 외모와 눈빛으로 선입견을 갖지 않고 피상담자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두움 속에서 따뜻함을 경험했다. 서로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진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 기자 역시 단순했던 고민이 그를 통해서 구체화되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기자는 이번 블라인드 상담을 체험하면서 그가 시각장애인이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둠이 펼쳐진 가운데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마음보듬사로 기자에게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회적 오해가 있다. 하지만 이번 체험을 통해 적어도 상담 영역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체감했다.

매년 10월 15일은 흰지팡이의 날이다.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WBU, World Blind Union)에서 시각장애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를 이끌어 내기 위해 10월 15일을 흰지팡이의 날로 지정했다.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거동을 돕는 도구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자립과 성취를 상징한다.

기자가 만난 어린왕자 마음보듬사처럼, 직업인으로서의 자립을 성취한 사람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스스로의 업무에 자부심을 갖고 임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음보듬사를 소개할 때도 굳이 직업 앞에 시각장애인이란 말을 붙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기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운 휼륭한 상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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