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사회적 삶’과 사회구조

누구도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존재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사회적인 삶이란 개개인들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사회구조란 개인의 삶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확인하는 것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도 작용하겠지만 나에게 결정권이 없는, 그저 내게 주어지는 것들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태어날 국가나 가정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부모님의 경제력이나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문화와 사회구조는 내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사회적 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사회적인 삶’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매우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구조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얽혀있기 때문에 각각의 사람이 하는 선택에 의해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선택,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험을 잘 봐야, 명문대에 입학해야, 돈을 많이 벌어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 달성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진 않나요?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구조가 우리를 어떻게 행동하게끔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부루마블, 모노폴리, 호텔왕과 같은 보드게임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게임을 한 번 시작하면 다른 모든 참가자들을 파산하게 해야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파산하고 게임에서 지게 됩니다. 평소에 그렇게 남을 파산시키면서까지 이기고자 하는 경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러한 류의 게임을 시작하면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 게임이 작동하는 방식이니까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게 된 사람의 처지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드게임이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공정, 기회, 자유’를 내세우며 마치 모두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며 모든 사람을 생존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승자독식사회와도 닮아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 게임 밖의 세상도 결국 오징어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던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드라마 속 세상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실은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게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아니면 가면을 쓰고 살인게임을 지켜보는 VIP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 어떤 선택지도 진정한 ‘선택’이 아니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게임의 법칙’을 바꿔나가는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생존경쟁이 아닌 협력공존의 게임

생존을 위해 승자가 되기 위한 경쟁에 참여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의 구조가 아닌, 협력을 통한 공존의 게임으로 바꿔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파산시켜야 승리하는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협력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게임도 있습니다.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세상을 바꾸다: 광장에서 국회까지’라는 보드게임 등 입니다. 게임을 하는 목적도 게임의 규칙도 기존의 보드게임들과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과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합니다.

다양성은 사회구조와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구조 속에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남성중심주의, 비장애인중심주의 등의 사회구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런 사회구조는 삶의 방식과 사고의 방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회구조를 잘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구조를 자연스럽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는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랬던 것’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저 당연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과 사회구조의 관계 중 나머지 한 쪽 방향은 우리 개개인들이 사회구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쉬워야 한다

사람들과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와 역동에 의해서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습은 계속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알기 위해서는 이 사회가 어떻게 조직돼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편의 칼럼에 걸쳐서 이 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가장 저항이 적은 길’로 가게끔 만들고 있는지 이야기 해봤습니다.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우리가 계속 그 길을 갈 것인가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시작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항상 쉬울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애초에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겠죠. 그 새로운 길을 만들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여정을 하는 선택은 때때로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그 길이 너무나 큰 희생이나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 문화와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 힌트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익숙한 길에 새로운 길 내기(1)”에서 소개했던 Asch의 동조 실험(Asch conformity experiments, 1950s)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명백히 틀린 대답이라도 피실험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오답을 말하면 피실험자도 오답을 말할 확률이 75%나 된다’는 애쉬의 동조 실험(Asch conformity experiments, 1950s)에서 피실험자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혹은 최대한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장치를 해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피실험자에게 가장 먼저 답을 말하게 하면 피실험자들은 전부 다 정답을 맞췄습니다. 피실험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오답을 듣게 하더라도 피실험자에게 자신의 대답을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게 아니라 종이에 글로 써서 내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답을 적어서 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눈치를 보지 않게 만들기만 해도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가부장제 자본주의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마냥 순응하는 게 아니라 성평등을 지향하는 사람,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따라 사는 게 아닌 공존과 분배의 문화와 구조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으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우선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삶의 모습을 선택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우리들의 선택이 쌓여가며 만들어 집니다. 사회구조가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또한 우리가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