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 권하는 사회…극한 경쟁하는 ‘챌린지’ 문화
나트륨처럼 명확한 기준 없어…‘기호’로만 여겨져
전문가 “맛 중독, 감정적 요인도…스트레스 사회 방증”
소비자단체 “알기 쉬운 정보와 명확한 기준 제공돼야”

‘중독적인 맛’이라는 말이 곧 ‘맛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시대다. 달콤매콤하고 짭짤한 맛은 어느덧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식탁을 점령했다. 그로 인해 자연재료 본연의 맛보다 특정 맛에 사로잡혀 건강을 해치거나,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무분별한 섭취가 이어지는 등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독의 맛’들을 하나씩 짚어보기로 했다.   

불타는 고추 ⓒ게티이미지뱅크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한국인의 매운맛’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힐 만큼 우리나라에서 매운맛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한국인의 연간 고추 소비량은 4kg가량으로 추산되며, 이를 하루로 환산하면 매일 10g이 넘는 고추를 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김치와 고추장으로 위세를 떨쳤던 ‘매운맛’은 이제 그 모양새를 바꿔 생활 속을 파고들고 있다. 화끈한 수준을 넘어 악마와 극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매운맛 제품이 쏟아지고 있는 것. 매운 것을 잘 먹는다는 뜻이 담긴 ‘맵부심(매운맛 자부심)’으로 인한 도전정신을 적절히 이용한 마케팅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실제로 매운맛을 색다른 경험과 도전으로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TV를 비롯한 유튜브 등 각종 매체에서는 매운맛 도전 챌린지를 펼치며 강렬한 매운맛을 적극 권하고 있다. 

사실 매운맛은 맛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는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그리고 감칠맛은 혀의 미뢰가 느낄 수 있는 맛이지만 매운맛을 감각하는 미각세포와 맛 수용체는 없다. 매운맛은 혀의 통점을 자극하는 통각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만큼 ‘아프니까 매운맛’이라고 비견할 만 하다. 

아픔만큼 스트레스 해소 등 쾌감이 따라오기에 매운맛의 인기는 떨어질 줄 모르지만, 정작 식품 속 매운맛의 정도는 막연하게 묘사돼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눈물 나는 매운맛, 이대로 괜찮을까. 

상단부터 이마트24의 ‘매혹적인 악마의 매운맛’ 편의점 먹거리 3종과 좌측 하단 롯데제과 치즈떡볶이맛 찰떡아이스, 우측 하단 빙그레 멘붕어싸만코 ⓒ각 사 제공 

‘맵찔이’는 빠져…‘맵부심’ 공략에 쏟아지는 매운맛 폭탄 

장기 불황에서는 매운맛의 인기가 더 높아진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여파 등 여러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심한 요즘, 매운맛 식품 소비가 늘었다는 통계도 나왔다. 

CJ대한통운이 지난해 2~9월 떡볶이, 불닭발, 불족발 등 매운 식품 물량을 분석한 결과,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난 지난해 3월과 8월 말에 매운 식품 택배 물량이 급증했다. 특히 8월 한 달 매운 식품 택배 물량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40.6% 늘었다.

서울시의 지난해 9월 ‘코로나 시대에 나를 위로하는 음식’ 조사에서도 매운 떡볶이라는 대답이 1위를 기록했다.

이는 삶이 팍팍할수록 자극적이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음식을 찾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워낙 답답한 일상이 이어지다 보니 자극적인 매운맛 식품 섭취로 손쉽게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어서 선호한다는 소비자 반응이 높다”며 “워낙 인기가 많기에 최근에는 분야를 아우르는 매운맛 신제품 출시가 느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이에 부응하듯 식품업계는 다양한 매운맛 제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KFC가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 중 하나로 꼽히는 고스트페퍼를 이용해 만든 ‘커넬고스트헌터버거’부터 한국파파존스의 매운맛 신메뉴 ‘타바스코 할라피뇨’, 분식 프랜차이즈 스쿨푸드의 ‘매운 까르보나라 파스타 떡볶이’, 풀무원식품의 매운맛 짜장면인 ‘빨간 짜장면’ 등 종류가 다채롭다. 

오리온의 ‘상어밥 매콤한맛’이나 빙그레는 ‘꽃게랑 청양고추’도 눈길을 끈다.

이마트24에서는 아예 ‘매혹적인 악마의 매운맛’을 콘셉트로 한 편의점 먹거리 3종을 선보인다. ‘매워 죽까쓰 샌드위치’와 ‘불타는 버건디 햄버거’, ‘눈물찔끔 삼각김밥’ 등 제품명에서부터 매운맛이 느껴진다.

매운맛은 통상 라면이나 분식에 적용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서고 있다. 커피 프랜차이즈 더벤티의 와사비 빙수 ‘와사비 치즈 마빙’이나 롯데제과의 국내 최초 매운맛 아이스크림 ‘찰떡아이스 매운 치즈떡볶이’, 빙그레의 매운맛 아이스크림인 ‘멘붕어싸만코’ 등 디저트류에까지 진출했다.

일부 업체는 ‘맵부심(맵기와 자부심의 합성어)’이라는 단어를 아예 제품에 표기하며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에 매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을 자조적으로 이르는 ‘맵찔이(맵기와 찌질이의 합성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면서 매운맛 선호는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상단부터 맵기 정도를 알려주는 풀무원 떡볶이 제품, 제품 겉면에 매운 등급을 표기한 CJ제일제당 해찬들 고추장과 대상 청정원 고추장 ⓒ각 사 제공

아프니까 매운맛?…기준 없이 선호도에만 기댄 ‘辛’제품

현재 매운맛에는 표준화된 기준과 규격이 없다. 명확한 1일 권장섭취향이 설정된 나트륨이나 당분과는 대조된다. 해당 성분들은 수치로 명확히 표기돼 소비자가 이를 확인하고 섭취할 수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문의해도 매운맛의 경우 개인 기호의 문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식약처 관계자는 “매운맛에는 위생규격이나 명확한 기준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며, 기호의 문제로 분류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다만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는 지난 2010년 고추장의 경우 매운맛을 내는 원료인 캡사이신 함량에 따라 매운 정도를 나타내는 표준규격을 마련했다. 매운맛 단위는 영문으로 GHU(Gochujang Hot Taste Unit)이다.

GHU는 1~100까지 표시하되 5개 구간으로 나눴고, 가장 순한 맛은 25GHU 이하, 가장 매운 맛은 100GHU 이상으로 정해졌다. 고추장의 매운맛 표준규격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대상과 CJ제일제당 등 식품업체들은 매운 구간을 나눈 고추장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농식품부는 당시 소스와 과자류에까지 표준규격 시행 적용을 검토한다고 했지만 현재 시점에서 확인해 본 결과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소스나 과자류의 경우 매운맛 제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맛이 존재하기에 일괄적으로 매운맛 등급을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매운맛이라고 하면 농심의 신라면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는 매운맛 열풍의 원조이자 주역이라고 볼 수 있는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불닭볶음면 제품은 캡사이신 농도를 계량화해 매움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스코빌 지수(Scoville scale)를 제품에 표기해 마케팅에 이용했다. 1912년 미국의 화학자 윌버 스코빌이 개발한 스코빌 지수는 다양한 종류의 고추가 얼마나 매운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라면을 예로 들면 농심 신라면의 스코빌지수는 3400SHU, 불닭볶음면은 4404SHU, 팔도 틈새라면은 9413SHU다.

채소로 보면 파프리카와 피망은 100~1000SHU, 풋고추는 1400SHU 정도다. 청양고추는 1~3만SHU, 타바스코 고추는 3~5만SHU, 전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로 기네스북에 오른 ‘페퍼 X’는 약 300만SHU다. 

최근에는 1만SHU가 넘는 라면들도 출시되고 있다. 1만3000SHU의 핵불닭볶음면, 매운맛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1만4444SHU의 금비유통 ‘불마왕라면’이다. 캐롤라이나리퍼 고추 등을 사용해 매운맛을 극대화한 해당 라면은 유튜버들의 매운맛 도전 영상을 유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스코빌지수로 얼마나 매운지 수치가 표기된 라면의 경우 사정이 나쁘지 않다. 어마어마한 수치가 주는 압박감으로 그나마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들은 이를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맵기 조절이 가능한 프랜차이즈 떡볶이 또한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 등으로 기호를 조절할 수 있다.

문제는 맵다는 점만 강조하고 비교 대상이 없는 기타 음식들이다. 일례로 롯데리아 지파이 매운맛인 ‘하바네로 맛’의 경우 먹고 나서 복통을 호소한다는 사례가 속출했고 해당 제품명에 연관검색어로 ‘설사’가 뜨는 등 문제가 된 바 있다. 

일각에서는 같은 제품 ‘고소한 맛’을 먹고 복통을 호소한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복통의 원인이 매운맛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제기됐다. 

롯데리아 측에 자사 제품의 매운맛 기준에 대해 묻자 특별한 규격이나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매운맛에 대한 자체 규격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해당 제품 출시 당시에 맛에 대한 내부 검토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소비자시민모임 이수현 실장은 “우리 사회를 파고들고 있는 매운맛에 대해 특정한 규제를 한다기보다는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며 “매운맛에 대한 올바르고 일원화된 기준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마련하는 작업도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매운맛 도전을 보여주며 높은 조회수를 올리는 영상들 ⓒ유튜브 캡처
매운맛 도전을 보여주며 높은 조회수를 올리는 영상들 ⓒ유튜브 캡처

인기 고공행진 ‘매운맛’맛 중독은 심리적 문제 동반

식품업계를 강타하는 ‘매운맛’에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엽떡(엽기 떡볶이) 최고 매운맛 먹고 배 아파 죽을 뻔했다’, ‘롯데리아 디저트 지파이 하바네로맛 먹고 다음 날 설사를 멈출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과자 먹기에 도전했는데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등의 일화들이 심심찮게 소개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으로는 각종 미디어와 매체들이 이른바 ‘매운맛 챌린지(도전)’를 부추긴다는 점이 지목된다. 유튜브 등 각종 SNS에는 극강의 매운 음식에 도전하는 영상들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런 먹방(먹는 방송)은 모방행위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실제로 유튜브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과자로 불리는 ‘원칩’을 먹고 응급실에 갔다는 영상, 무리한 매운맛에 도전하는 영상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매운맛이 야기하는 고통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고추 속 캡사이신의 자극으로 우리 몸은 고통을 느끼고, 뇌는 이를 상쇄하기 위해 엔돌핀을 분비한다. 이는 스트레스와 우울한 기분을 해소시켜주는 중독성이 강한 호르몬인 만큼,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매운 음식을 찾는 것은 반복된 학습 효과와 중독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과하면 독이 된다고, 극단적인 매운맛 음식을 반복적으로 먹게 되면 심한 자극으로 인한 위장병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아직 판단력이 부족한 초·중·고등학생 등 10대들에게 미칠 중독의 악영향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는 맛의 중독에는 감정적인 요인이 있는 만큼 그 배경까지 살펴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차움 푸드테라피클리닉 이경미 교수는 “대부분 스트레스가 심할 때 자극적인 맛을 찾기에 지금의 현상은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판단된다”며 “중독은 의지와 다르게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경우로 매운맛 등에 대한 선호가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습관적으로 점점 더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 먹으면 불안과 초조함 등의 증상을 보이는데 맛의 중독이라는 것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감정적인 요인이 있다”며 “이에 단순히 식품의 칼로리나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 습관 및 행동적인 측면을 함께 살펴주어야만 해결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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