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나 아렌트 연구자,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
한나 아렌트 철학, 소통 없고 이기적인 사회 분위기에 경각심
정책‧공약 너머 의도 살펴야…정치 잘못되면 국민에게도 책임
정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것
건강한 공동체 유지하기 위해선 용서와 약속의 덕목 중요해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 ⓒ투데이신문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우리사회의 최대 화두를 꼽으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 주제가 있다. ‘소통의 부재’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의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사회를 살면서도 소통에 목말라 하고 있다. 분초 단위로 쏟아지는 정보량이 곧 소통은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정치분야는 저마다 파편화된 채 합의의 정치가 실종된 지 오래다. ‘탄핵 촛불’이 타오른 뒤 5년이 지났지만 정치에서의 소통은 요원하다. 합의와 소통이 사라진 빈 자리는 갈등과 혐오의 표현이 메우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공동체에서 소통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악의 평범성’이 알려지며 소개된 그의 사상이 최근까지 반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악한 의도가 없는 평범하다 여기는 일 중에서 악이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독일 출신의 학자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의 지도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사회에 나온 1930년대 독일은 나치즘이란 전체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에 놓여 있었다. 유대인인 아렌트는 핍박을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유대인 사회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며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했는데 이것이 나치를 두둔했다는 오해를 산 것이다. 

독일과 미국 어디에서 온전히 속하지 않았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바깥에 머문 아렌트의 굴곡진 삶의 여정은 결국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회의 경계에 서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끄집어내 공동체의 다양성과 건강함을 지켜낸 아렌트의 실천적인 정치관도 알 수 있다.

<투데이신문>은 20대 대통령 선거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와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여성시민단체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부회장은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지난 2020년 10월에는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란 책을 펴낸 아렌트 정치철학 연구자이자 신학박사다. (책 제목의 ‘해나’는 한나의 미국식 표기로서 현재 국립국어원 규범 표기다. ‘한나’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이 더 일상적이다.)

이 부회장은 “현대의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면서 인간다운 삶을 놓치기 쉽다. 특히 투표날만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다운 삶에 대해 근본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알트루사를 찾아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들려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따라가 보자.

혼자할 수 없는 행위, 행위가 곧 정치다

Q. 한나 아렌트는 어떤 정치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정치와 철학을 나눠서 본다. 활동적인 삶과 명상적인 삶을 나눈다. 철학은 현학적인 면을 추구한다고 보며 철학자에 대한 비판을 자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철학자라 불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터뷰 때마다 “내게 철학을 붙이지 말아달라”면서 정치이론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정치철학자들과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정치철학자로 분류되고 있다. ‘철학을 비판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철학이론을 만들어 제시하려 하지 않고 일어난 현상에 대해 자신이 읽어낸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아렌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악의 평범성’ 역시 이론이 아니라 현상을 읽은 것이다. 악이 평범하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정작 아렌트는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을 옹호할 이유도 없고 실제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복수를 하듯 재판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재판으로 처벌하자고 얘기한 것이다. 

또, 아렌트의 특이한 면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처음에 신학을 공부했다. 유대인인데 유대교인도 아니다. 자신은 종교가 없다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저서를 보면 나사렛 예수뿐 아니라 성서를 인용한 구절이 곳곳에 나온다. 

Q.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 작업, 행위를 인간의 근본 활동이라고 봤다. 그 중 행위와 정치의 연관성을 설명한다면.

아렌트는 행위가 곧 정치라고 봤다. 행위는 노동이나 작업과 달리 혼자할 수 없다. 정치도 혼자 할 수 없다. 단식투쟁을 하는데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굶으면 그건 행위가, 정치가 아니다. 그냥 금식이다. 행위자 외에 반드시 최소한 한 명이 더 있어야 정치가 구성된다.

아렌트는 행위를 함께 모여사는 인간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활동으로 중요하다고 봤다. 아렌트가 얘기한 행위에서 중요한 개념은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하는 것이 행위다.

그래서 내가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를 쓸 때 처음 책 제목으로 생각했던 것은 ‘행위가 정치를 부른다’였다. 행위를 하는 순간, 정치가 시작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아렌트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한다. 

보통 정치는 직업정치인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면 누구나 정치를 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를 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충족하는 일이라고 봤다. 보통 대의민주주의에서는 투표날에만 정치를 한다고 여기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는 내내 정치를 하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의식하는 것이다. 내가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내 이웃에게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정치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이기적인 사람을 정치를 놓친 사람으로 본 것 같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은 정치를 안 하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가장 좋지 않은,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 ⓒ커뮤니케이션북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 ⓒ커뮤니케이션북스

Q. 아렌트는 인간의 탄생성과 이로 인한 다수성, 그리고 다수성이 모인 공론장 자체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탄생성이란 내가 내놓는 의견은 누구도 내 방식과 똑같이 내놓지 못한다는 것에 이어진다. 내가 말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방식과 다르고 새롭다. 이처럼 새롭게 태어난다는 점에서 모든 행위는 탄생성을 갖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정치적 삶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폴리스에 들어가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겨루게 된다. 누구의 의견이 더 적합한지를 다투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공적인 자리, 공론장에서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한다. 그래서 공론장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아렌트는 문제 해결보다 공론장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아렌트가 완벽히 옳을 수는 없지만 현실 정치에서 공론장 구성을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대화와 토론을 하느라 결정이 늦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 해서 대화와 토론을 통한 민주적 결의방식을 그릇된 방안이라 할 수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빨리 결론 내려 하다가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공론장의 사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TRC)>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 인종차별정책) 시대가 끝나고 그때의 인권침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는 가해자들을 불러 자신의 행위를 공개하도록 했고 모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피해자들의 의견을 다 모아서 ‘용서’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어렵더라도 매우 느리더라도 대화와 토론을 위한 시도를 계속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한다면 알트루사 활동을 20여년 가까이 해왔는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의견을 내놓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내 의견이 못난 것 아닐까’하는 걱정을 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다 내놓고 더 이상 나올 의견이 없다는 시점에 이르도록 충분히 대화한다. 알트루사가 대단히 유명한 단체가 아닌데도 꾸준히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Q. 우리사회는 일상에서 정치적 견해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모습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정치적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작은 공동체를 곳곳에 만들어야 한다. 단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이기적으로 내세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 공동체가 곳곳에 있어야 된다.

예를 들어 동네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면 이 곳에 회원으로 가입해서 “우리 도서관에 이런 책을 놓자”고 말하는 것 역시 정치 행위일 수 있다. 학교마다 있는 학부모 운영위원회도 마찬가지로 정치 행위다. 자신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개념을 갖고 있으면 대부분 더 성실하게 역할을 할 것 같다.

정작 공동체 안에서 정치를 하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더 많은 권위를 주지 말고 모두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공론장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오늘날에도 전체주의의 위험 경계해야

Q. 온라인 커뮤니티가 공론장 역할을 하리라 기대를 모았지만 최근 모습을 보면 부작용도 많은데.

어떤 일이라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충분히 공론장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론장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 공공성을 띤 공동체는 자신만 홀로 비밀리에 예외가 되겠다는 사람이 없어야 된다. 그런 사람이 일부라도 있으면 공동체는 흔들린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 규율을 만들어서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끼리인데 필요한가’ 싶겠지만 규율없이 서로 싸우다가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다. 

Q. 저서인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를 보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일컫는 ‘패리아’(Pariah)와 민중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패리아와 민중, 그리고 시민을 정의한다면.

아렌트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을 패리아라 불렀다. 내가 이 사회에 소속돼 있으나 완전히 끼어들지 못한 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패리아다. 이들은 사회의 불합리한 면을 더 잘 발견할 수 있고 소리 높여 변화를 유도해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시 아렌트는 유대인이 패리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모든 나라에 속했지만 사회의 바깥 혹은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었으니까.

아직 민중의 정의는 합의된 개념이 없다. 개념을 만들면 그 개념에 끼어맞추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민중이란 단어가 한창 쓰이던 때에조차 개념 정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민중의 개념을 정치영역에서 배제된 사람들(The excluded),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데 그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공동체를 만들 수 없게 해서 정치적 공간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일컫는다. 노조를 만들려 하는데 만들지 못했거나 빈민운동 조직을 만들었는데 와해됐든가 나는 이런 사람들을 민중으로 볼 수 있다고 정의했다.

시민 역시 개념 정의가 어려운 단어 중 하나다. 내 기억에 아렌트는 시민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정치적 동물’로서 각자 어떤 행위를 하고 있으면 그 자체를 의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아렌트의 제자들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에 많이 참여했는데 아렌트는 제자들의 도와달라는 요청은 잘 응하면서도 앞장서지는 않았다. 정치행위로 의미는 두되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 ⓒ투데이신문
한국알트루사 이인미 부회장 ⓒ투데이신문

Q. ‘악의 평범성’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아렌트는 악이라는 것이 깊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의 어떤 악한 의도에서 끌어져 올라온 것이 아니라 어딘가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아이히만은 이웃, 그 중에서 유대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명령받은 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관찰해 내린 결론이다.

당시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에 화를 낸 사람들이 이해가 간다. 누구나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때가 있다. 그러니 찔리는 것 아닐까. 히틀러같은 놈이 나쁜 것이지 성실히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어째서 악할 수 있다는 거냐, 그런 심정으로 화를 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엄격하게 말한다면 악이 곳곳에 있는 것 같다. 주변에 이기적인 사람이 한둘은 언제나 있고 나 또한 이기적일 때가 있다. 나는 내가 이기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악의 평범성’을 생각해 본다. 별 뜻없이 “우리집 식구들만 건강하면 되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그렇다면 남의 집 식구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 이렇게 스스로 반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일상적이다’ 또는 ‘상투적이다’, ‘진부하다’라는 뜻도 있다. 아렌트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 단어를 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Q. 그런 의미에서 ‘용서’를 왜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와닿는다. 악이 그렇게 일상적이기에 용서를 안하면 큰일 아니겠나.

그렇다. 실제로 우리는 매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서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아렌트는 만일 용서가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 행위에 매여서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내 이웃이 이미 나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용서를 말할 때 아렌트는 성경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가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어야 합니까?”라고 묻자 “70번씩 7번이라도 하라”고 답한다.(마태복음 18:21-22) 평생 용서하며 살라는 뜻이다. 

보통 우리는 상대가 용서를 구하면 용서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아렌트는 용서를 공적으로 풀어낸다. 공공의 자리에서 자신이 한 잘못을 인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먼저다. 공동체에서 자신만 예외가 되려는 것이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고 얘기했듯 어떤 잘못을 했다면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말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가 그런 식으로 운영됐다.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각을 남김없이 다 말한다. 피해자도 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다 같이 얘기하며 어우러지면서 용서가 실현됐던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Q. 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는 ‘절대악’도 있을 것이다. 다만 ‘절대악’은 아주 예외적 상황이어서 등장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통상적으로 전체주의를 절대악으로 둘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도 없고 스탈린도 없지만 오늘날에도 전체주의는 경계해야 된다. 그런데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와 운동을 구분한다. 전체주의는 운동의 형식으로 퍼져 나가서 체제화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운동의 동력은 자신의 이권과 결부돼 선동되는 사람들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운동에 선동된 사람들을 폭민(Mob)이라고 지칭한다. 나치즘의 집권과정을 보면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폭민을 활용했다. 나치가 경제공황을 틈타 의석을 많이 얻고 그 다음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협박해서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하지 않았나.

그 어떤 사회에서도 전체주의 운동은 일어날 수 있다. 아렌트는 사회가 분자화되면서 사람들이 외로워지면 전체주의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고 경계했다. 이기적인 동기로 누군가 나서서 선동하면 우리나라, 우리사회가 어떻게 가더라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자기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사회에도 전체주의 운동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보인다. 그러니 언제나 전체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체주의를 경계해야 할까. 아렌트의 이론에 근거해 잣대를 세워본다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살아 있으면 전체주의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는 사실 제대로 된 정책도 없고 개념도 없었다. “강한 독일을 만든다”고 하니까 다들 넘어간 것이다. “강한 독일이 무엇이냐? 왜 강한 독일이 돼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에 다양한 의견이 살아 있다면 구성원 다수를 선동해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Q. 아렌트는 약속의 정치를 중요시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약속을 한다. 직업정치인은 정책이나 공약을 내놓는다.

이 같은 약속이란 미래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서로 신뢰를 통해 안정감을 얻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약속을 해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약속을 하면 마치 공동체의 내규처럼 약속에 의거해서 내가 어떻게 살겠다라는 계획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약속이 필요하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마다 정책과 공약을 만들고 표어를 내건다. 추상적이지만 그 표어에 정책과 공약이 집약적으로 표현돼있다. 사람들이 정책과 공약을 모두 꼼꼼히 보지 않더라도 그 표어가 마치 약속처럼 어떤 후보에게 투표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

정책이나 공약은 미래에 실현이 안될 가능성도 있다. 후보 본인도 당선된 뒤에 지키려 했지만 의도대로 안 풀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정책이나 공약의 표면만 볼 것이 아니라 저 후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으며 어떤 행위를 하려 하는지를 우선해서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Q. 아렌트는 사실이 정치적 의견 형성에 필요하기에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정부나 전문가가 고의로 사실을 왜곡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답은 없겠지만 아렌트에 근거해 설명한다면 결국 스스로 생각해봐야 된다. 국가나 전문가라서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내가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대한 전문가라고 해서 아렌트를 모두 다 아는걸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단정적으로 의견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해야 된다고 본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사실을 찾는 노력을 해야겠다. 그러려면 자존감이라고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렌트로 본 우리나라의 정치

Q. 아렌트는 정치에 대해 행위를 하는 행위자와 그 행위를 판단하는 판단자로 역할을 구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정당은 정치 행위자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판단자보다는 관찰자(Spectator)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동일한 맥락으로 ‘주시자’라는 표현을 썼다. 생각해볼 대목이 하나 있다. 직업정치인들만 행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당과 정당에 속한 정치인들도 국민을 주시한다. 그들도 관찰자가 될 수 있고 돼야 한다. 그럴 때엔 국민이 행위자가 될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면 정치권은 신경을 쓰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그레타 튠베리는 기후 변화 대응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치권에 메시지를 보내려 금요일마다 등교를 거부했고 이를 트위터에 게시했다. 결국 전 세계적 관심을 받고 유엔 본부에서 기후 변화를 주제로 연설을 했다. 누군가가 행위를 시작하면 그 사람이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가까운 과거에 좋은 예가 있었다. 2016년과 2017년 촛불집회를 상기해보라. 

행위를 판단하는 관찰자는 어떻게 보면 스포츠 경기를 보는 관중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관중은 경기를 열심히 보고 룰도 잘 이해하고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관중은 전문가보다 더 그 경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국민도 그런 의미의 관중이 돼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면 그에 대해 권력을 가진 정당이나 직업정치인이 더 큰 책임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놓아둔 사람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은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 결정한 지난 2017년 3월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에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뉴시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 결정한 지난 2017년 3월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에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뉴시스

Q. 우리사회는 공직자를 선출할 때 정책과 공약도 보지만 해당 인물의 사적인 영역도 검증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물 네거티브에 점차 치중된다는 지적도 있는데?

사람이 24시간은 공적인 영역만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적 영역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렌트도 늘 공적 영역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봤다. 사람에게는 공적 영역과 함께 나를 돌보는 사적인, 프라이빗(Private)한 영역도 필요하다.

프라이빗의 어원을 보면 ‘빼앗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프리바레(Privare)이다. 공적 영역을 빼내고, 공적 영역에서부터 빠져나와서 남은 영역을 사적 영역이라고 봤다. 

서구권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우리보다는 좀 더 많이 구분해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 동거를 해도 불륜을 해도 선거에서 당선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사회에선 공사의 경계가 약간 흐릿하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가운데의 사회적 영역, 특히 경제적 이슈가 섞이며 혼동이 오는 것 같다. 

아렌트는 선거에 대해선 언급이 드물지만 사적 영역에 문제가 있어도 공적 영역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지장이 없다고 본 것 같다. 사적 영역에서의 모습과 공적 영역의 모습이 일관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대표적인 모델이 아렌트의 스승인 마르틴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뛰어난 철학자이지만 한편으로는 불륜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나치 동조자이기도 했다.

Q. 선거를 앞두고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거나 ‘투표를 보이콧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아렌트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최선과 차악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아렌트는 아마도 누군가가 그런 개념을 규정해서 퍼뜨리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행위는 언제나 의도가 중요하다. 정치가 막연히 싫어서 투표를 안 한다면 정치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투표를 안했을 경우에 생기는 파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여러 정치적 상황을 판단해서 투표를 보이콧하는 것이라면 의미 있는 정치 행위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 의도에 따라 판단이 다를 것이다. 행위는 의도가 중요하다.

Q. 아렌트의 사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아렌트에게서 배울 점은 결국 소통인 것 같다.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고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으면서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 아렌트의 요구가 아닐까 싶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나는 정치적인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주변 이웃에게 관심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기적인 삶이 아주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기적으로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사상에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이기적인 삶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인지 아렌트는 정치의 기본을 자유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그 자유란 매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의 유리함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지점에 매여있지 않고 벗어나 공적인 주제를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Q. 아렌트를 연구한 사람의 관점에서 오늘날 시대정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소통 자체가 시대정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소통을 잘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내 의견을 남의 의견과 겨뤄 보는 것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이것은 내 의견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라는 뜻이 아니다. 남의 의견도 잘 들어야 한다. 그 사람이 말하는 의도까지 읽어내면 더 좋다.

칼 야스퍼스는 “진리는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소통이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 주어진 명제를 진리나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가 절대적 진리를 내려주길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스승 야스퍼스의 말에 따르면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이 소통해서 합의하는 것이 언제나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적합한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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