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관계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하고, 종교는 믿음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종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관계에 대한 맹목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하리라. 이병철 시인의 시집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걷는사람 2021)를 읽다 보면 사랑에 대한 믿음이 백색에 가깝게 추상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랑에 대한 시인의 면밀한 시적 탐구는 세속적인 단계의 사랑을 넘어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끌어안는다. 시는 이 거대한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사랑이라는 아득한 환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사랑이 변화무쌍한 것이라면 종교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종교는 영겁의 세월을 거쳐 변화가 진행된 끝에 변화와 영원불멸이 동형(同形)을 이루기에 이르는 상태이기도 하다. “만 개의 빗방울에 만 개의 사랑”(「폭우」)이 개화하는 이 다채로운 세계에서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를 무한수의 신앙이 열리기 시작한다”(「7월 8일」). 영원에 가까운 무한의 변화 속에서는 무가 유가 되기도, 천국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뒤집힘에도 의연해지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향한 믿음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을 향한 믿음은 존재론적인 변화를 기꺼이 맞아들이는 태도로 이어진다. “사랑이라는 불에 온몸이 녹아/달고나 향기로 공중을 떠도는” “흠 없는 짐승”(「화목제」)과 같은 형상이 되더라도 시인은 개의치 않는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도,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도 하기에 결국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한다. 사랑을 신으로 섬겼을 때 다가오는 것은 태초의 형상이 될 수도 있고, 미래의 잠재태가 될 수도 있다. “해석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꿔도 좋”을 만큼(「허밍은 거침없이」) 사랑은 실로 무궁무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시인은 사랑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꿔가며 영원히 추상 속에 부유하는 시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부려놓는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사랑을 섬기는 것은 가장 격정적인 고행의 길에 오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조금만 치우쳐도 하얗게 굳는 화학작용”(「빙하기의 사랑」)과 같기에, 그러한 원초적인 변천을 맞닥뜨리면서도 의연해야 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천진함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사,는 죽음/랑,은 물결/영,은 그림자/원,은 멀어지는 마음”이라는 것을 새롭지만 익숙한 듯 받아들임으로써 “사랑이라는 낯선 차원”(「데칼코마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종교를 믿는 것은 어른이면서 동시에 아이일 수 있는 모순적인 상황을 기꺼이 감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종교를 믿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또 무모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너라는 토템”(「드림캐처」)을 손에 쥐고도 그것을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감각을 시를 통해 단련한다. 그렇게 “영원한 고통인 구원”(「부활절 묵상」)을 시로 불러일으켜 불멸과 다름없이 간직한다. 사랑을 삼킨 세계에서 시인은 죄와 속죄가, 고통과 구원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차원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죄가 죄를 계속 밀어내면 마침내 지옥은 텅 비게 될” 것이기에, “신이 신을 밀어내어 신이 추락한 세상엔 구원도 비처럼 쏟아질”(「사순절 묵상」) 것이기에. 그러한 세상을 그려내기에 시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사랑을 향한 믿음의 실천은 존재의 겸허함을 몸속 깊이 새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하는 입을 갖게 되”는 것은 “불완전한 것에 순종하는 마음을 믿게”(「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영원의 세계, 불가능의 세계를 조형하고 있는 시가 아닌 현실 속에서 우리가 과연 사랑을 종교로 삼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 혹은 영원히 도달 중인 이상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집을 펼치면 그 속에 이미 시를 통해 도달한 이상이 다른 세계로부터 온 경전처럼 박제된 채로 우리에게 어떤 지침을 알려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사랑은 사라지고 입에서 폭설이 쏟아”질 수도 있노라고(「촛불의 왈츠」), 사랑은 “태양이 지닌 단 하나의 작은 빙점”(「홍차가 아직 따뜻할 때」)과도 같이 우리가 온몸을 던져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불가능이라고. 그러니 이 유일한 불가능을 향해 대양과도 같은 믿음을 키우는 시적인 존재가 되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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