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고 북송되는 탈북민 보고 정치에 관심 가져
북에 백신 보내는 것 무의미···전기·냉동설비 부족
북한 청년들 남한드라마 보며 서울 말씨 흉내 내
전단 살포 허용해야···‘비대칭무기’ 북한에 치명적
북한경제, 여전히 열악···꽃제비 늘고 있다는 소문
탈북 과정 ‘상처’ 치유할 트라우마 센터 꼭 필요해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장마당(북한의 시장)에서 음식물 쓰레기나 주워 먹던 ‘꽃제비’ 출신 장애인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는 소식에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충격에 빠졌슴다.”

그의 표정이 상기됐다. 동공이 커지며 약간은 흥분된 듯 목소리도 높아졌다. 북한 고위층도 아닌 꽃제비 출신 장애인이 남한으로 넘어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올랐다는 자신의 얘기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그들의 의식이 변했다”고 강조하는 대목에선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북한 당국은 어릴 때부터 남한을 ‘거지 소굴’로 선전하며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세뇌시켜 왔는데, 이제 이런 식의 체제 유지 시스템은 안 먹힌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 누구도 이 말을 믿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탈북 14년 만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지성호(40) 의원은 “북한 청년들은 오래전부터 남한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을 보고 들으며 행동으로 따라한다. 심지어 서울 말씨까지 흉내 낼 정도”라며 “그들은 북한 당국의 말이 전부 거짓이란 걸 알고 있다”고 확신에 차 설명했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북한인권단체 나우(NAHU)를 설립해 자신과 같은 북한 이탈주민 500여명의 탈출을 도왔던 그는 “국경을 넘는 숫자가 예년에 비해 10%대로 줄었다”는 최근의 탈북 현황을 소개했다. 탈북민 수가 크게 준 이유는 코로나19 때문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지 의원에 따르면, 연간 1000명대였던 탈북민은 코로나 팬데믹이 확산되면서 100명대로 급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코로나19 유입 차단을 위해 국경까지 봉쇄하며 감시를 강화한 북한 당국의 조치도 큰 역할을 했지만, 주민들 스스로도 전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예년 수준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 의원은 또 북한의 코로나19 상황을 모른다면서도 백신을 보내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는 “치료제라면 몰라도 백신을 북한에 보내는 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전기 공급도 불안정한데다 북한엔 백신을 보관할 냉동설비도 이동차량도 없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주사를 놔 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2017년 7월 25일.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아주대와 아주대통일연구소,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가 공동주관한 ‘2017와글바글장마당’에서 학생들이 꽃제비를 재연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17년 7월 25일.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아주대와 아주대통일연구소,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가 공동주관한 ‘2017와글바글장마당’에서 학생들이 꽃제비를 재연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기차바퀴에 한쪽 팔다리 잃은 열네 살 소년

만 38세 ‘청년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발을 디딘 그는 자유를 찾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탈북 과정을 되새기며 ‘입법 활동의 두려움과 낯설음’을 이겨냈다고 소회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낸 전반기 2년이 너무 아까울 정도로 하루가 짧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 의원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정치는 꼰대집단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지금은 청년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과 통일민(북한이탈주민)들을 대변하기 위한 입법 활동에 전력을 쏟고 있다”고 강조했다.

탈북 직전까지 그는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꽃제비의 삶을 살았다. ‘학포리 탄광촌’에서 나고 자란 그의 청소년기는 북한 당국의 가혹한 구타와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아니, 그곳에서의 스물다섯 해 삶 전체가 혹독했고 잔혹한 세월이었다.

꽃제비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장마당 등을 떠돌아다니는 북한인을 지칭한다. 주로 부랑아(浮浪兒)들을 이르지만, 이들이 어른이 되면서까지 같은 생활을 이어감에 따라 성인이 돼서도 꽃제비라 불린다.

1994년부터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던 ‘고난의 행군’ 당시, 북에서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달하는 ‘인민’이 아사(餓死)한 것으로 전해진다. 적지 않은 ‘성호의 꽃제비 친구들’ 역시 대부분 그때 다 죽었다.

1996년 3월 7일 새벽. 키 120cm, 몸무게 20kg도 채 안 되는 열네 살 성호는 이날도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족들과 달리는 석탄열차에 올랐다. 열차 호송 군인들의 감시망을 뚫고 석탄을 훔쳐내야만 생명줄과 같은 ‘옥수수가루’와 맞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차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성호의 머리는 어지럽고 몽롱해졌다. 석탄 자루 구멍을 기우며 밤을 샌 것도 그랬지만, 사흘을 내리 굶은 데다 빈혈과 영양실조까지 겹쳤으니. 결국, 열차 난간에 매달려 있던 성호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충돌하며 추락했고 열차 바퀴에 깔려 왼쪽 팔다리를 잃었다.

◆‘여기서 걸리면 모든 게 끝’...나무 목발에 의지한 1만km 횡단 탈북

「...2006년 3월 중순. 북경을 떠난 기차가 며칠을 달려 라오스 국경 쿤밍 인근에 다다랐을 때, 중국 공안이 마약 밀수범을 잡기 위한 불시 검열을 위해 객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왔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몸에 품은 청산가리를 더듬으며 ‘자유로운 나라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으시오.” 옆에 앉아있던 ‘탈북 브로커’가 속삭이듯 말했다. 시키는 대로 고갤 숙인 채 바닥만 쳐다봤다. 공안이 신분증을 보자고 손짓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브로커로부터 내 신분증을 건네받아 확인한 공안은 그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더니 별다른 조치 없이 다음 좌석으로 향했다.

얼마 후, 뭐라 했기에 공안이 그냥 지나쳤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브로커는 “내 동생인데, 정신지체 장애인이라고 했다. 지금 말을 걸면 기차를 휘젓고 돌아다녀 골치 아플 거라 했다. 팔다리가 잘린 것도 기차를 휘젓고 다니다 떨어져 이렇게 됐다고 했다”고 얘기했다. 허 참... 그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의 저서 <나의 목발이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중.

함경북도 회령시 화풍면 학포리가 고향인 21대 대한민국 ‘청년 국회의원’ 지성호를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굶어 죽고 북송되는 탈북민 보고 정치에 관심 가져

-전반기가 두 달 남짓 남았습니다. 그동안 어땠나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습니다. 6개월 정도는 ‘모사리’(식물 모종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는 북한 방언) 기간이었다는 생각이고요. 회기시작 후 곧바로 이어진 국정감사를 준비하면서 저와 우리 식구들(보좌진) 모두 함께 성장한 시간이었어요. 2년이 그야말로 훌쩍 지나갔네요. 1년 가량 지나면서 의회 업무가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편인데, 그럼에도 잘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고요.”

-국회의원이 되기 전엔 정치를 어떻게 생각했나요.

“일반 청년들과 비슷했죠. 정치뉴스에 관심 없고, 정치는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남한이나 북한의 정치 분위기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란 정도로 생각했었죠. 정치인들이 싸움은 많이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고요. 하하.”

-그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요.

“몇 년 전 탈북민이 굶어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또 탈북자 두 명이 북송되는 걸 보면서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생길 수 있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지난 2019년 7월. 당시, 42세 탈북민 한모 씨와 5세 아들 김모 군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사(餓死)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자의 사망시간이 시신 발견 두 달 전쯤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은 더했고, 탈북민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또 같은 해 11월 초엔 동해상 NLL을 넘어와 우리 해군에 나포됐던 오징어배 탑승 북한주민 2명이 사상 처음 강제 추방(북송)됐다. 당시, 정부는 “북송된 20대 남성 2명은 동료 승선원 16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범죄자로, 북한이탈주민법상 보호대상이 아니라서 추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당은 “북한 눈치를 보느라 사건을 숨긴 것 아니냐”고 항의하며 “당장 송환부터 멈추라”고 반발했다. 지 의원은 “이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결심했어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첨엔 거대한 벽 같은 느낌도 들었고, 문화나 세대차이도 걱정됐죠. 필요하긴 한데 내가 하긴 싫고, 누군가 해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인재영입위원장이었던 염동열 전 의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정치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어요. 내가 생각하는 정치와 많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된 겁니다. 결국, ‘제도권에 들어와서 활동해야 세상이 바뀐다’는 염 의원 조언에 용기를 내게 됐어요.”

그는 21대 총선을 석 달 앞둔 지난 2020년 1월, 당시 염동열 미래통합당 인재영입위원장의 입당 제안을 받고 영입 1호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러나 그는 장애의 몸으로 1만km를 횡단한 ‘탈북스토리’와 북한인권단체(NAHU) 설립을 통한 탈북민 500여명 지원 등으로 일찍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2015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자유포럼 초청 강연과 2018년 1월 미국 워싱턴 D.C 의회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초청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Address) 행사 등을 통해 이미 국제적 인물로 떠오른 상태였다.

-인재영입 제안이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네요.

“물론, 염 의원 권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탈북민 정착과 관련한 제도를 고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면, 직접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북한에선 정치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었죠.

“어렸을 때 도지사(함경북도 당 책임비서) 꿈은 꿨었죠. 하하. 물론, 불가능한 꿈이었지만요. 철이 없었을 때니까.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요. 대한민국에 와서도 (정치를) 생각 해 본적 없고, 또 꿈을 꾼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죠. 그저 무사히 정착해서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을 때니까요.”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목숨 건 탈북 과정 속 극한의 공포와 상처 걷어낼 ‘트라우마센터’ 필요

-전반기엔 주로 어떤 입법 활동을 했나요.

“처음 국회 들어와서 한 게 탈북 후 중국 등 제3국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북한 주민이 한국에 들어올 경우, 주거나 정착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거였어요. 지금까진 그게 안 됐었거든요. 안 됐던 이유가 ‘10년이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았을 텐데,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는데, 이걸 삭제한 겁니다.”

-또 다른 활동은 뭐가 있나요.

“대한민국 모든 청년들이 어렵지만, 대학 졸업한 탈북 청년들 취업 문제도 심각합니다. 제도를 손봐야할 것도 있고, 입법도 필요하겠더라고요. 또 탈북청년 창업가들이 만든 제품을 공공기관이 우선 구매할 수 있는 입법도 냈고요. 유통경로나 방법 등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가족 형제가 사망해도 법적 관계 확인이 제대로 안 되면 장례를 치르지 못했었는데, 이런 부분도 수정했고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내용들이 많네요.

“정말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저 역시도 그랬지만, 탈북민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잖아요. 그러다보면 몸과 마음의 상처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발의한 법안이 ‘탈북민 트라우마 치료센터’입니다. 지금은 이런 치료환경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거든요. 또 과거, ‘문제’가 되기도 했던 신변보호관 제도를 바꾸는 법안도 냈어요. 탈북민 중 여성 비율이 70% 이상인데, 이분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 등을 경유하면서 ‘아픈 상처’를 경험하거든요. 이분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도록 여성보호관을 원할 경우, 본인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계속됐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보였다. 인터뷰 답변을 끊을 수도 없었지만, 처음 듣는 내용들이 많다보니 자연히 귀가 기울여졌다.

“또 탈북민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하나원’에 인권보호관을 두는 법안도 발의했습니다. 때에 따라선 원치 않는 조사에 응할 때도 있고, 불합리한 상황도 벌어지거든요. 이걸 두고 통일부가 ‘우릴 못 믿는 거냐’고 반발하는데,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북한이라는 곳은 인권이라는 걸 모르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북민들이 인권에 대한 인식을 최소한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3개월 동안 숙식하며 생활하는 하나원에 반드시 이런 시스템을 갖춰놔야 합니다. 그래야 인권침해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이의제기해야 하는지, 구제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지난 2020년 7월 23일, 지성호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이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국무위원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게 질의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20년 7월 23일, 지성호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이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국무위원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게 질의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하나원은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통일부 산하 기관으로, 1999년 7월에 개소했다. 탈북민은 6.25전쟁 이후 매년 10명 내외였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과 함께 북한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 하나원이 설립됐다. 현재 북한이탈주민은 입국 후 국가정보원이 운영하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탈북 동기와 신원, 위장입국 여부 등에 대한 정부합동조사 후 하나원에서 3개월간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다.

-하나원에 인권 관련 교육과정이 없나요.

“있긴 하죠. 하지만, 형식에 불과해요. 그나마 주 두 세 시간밖에 안 되고요. 여기(한국)서도 어린이집부터 초중고 대학, 성인 이후까지 끊임없이 인권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몸으로 체득해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널려 있잖아요. 하물며, 다른 체제에서 충분한 교육도 없이 사회에 던져지면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창피하게 생각하고 두렵게 느끼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경제력이 안 되니, 변호사를 쓸 수도 없고요.”

그는 탈북민과 관련한 국선변호인 제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효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탈북민들이 법률 용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 또한 쉽지 않아하며 억울한 입장만 호소한다고 했다. 일부는 이런 문제에 부딪힐 경우, 견디지 못하고 재 입북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그는 “살려고 넘어왔는데 다시 돌아가겠다고 할 정도로 적응이 힘들다는 걸 얘기하는 건데, 참 비참하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에도 법이 있을 테니, 어느 정도 법 개념은 알지 않나요.

“법이 있긴 하죠. 문제는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이 법에 무지하다는 겁니다. 어디서도 법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어요. 거기선 힘세고 돈 많고 권력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법에 따라 해결하거나 그런 게 없는 거죠. 판검사가 있어도 다 한통속이고. 이 정도인데, ‘한국은 법치국가니 법대로 살아라’ 이러는 건 이빨도 안 난 갓난애한테 밥을 먹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원을 나온 후에도 문제네요.

“그래서 지역별 전문변호사(탈북민 법률보호관제도)를 두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어요. 탈북민들이 계약 관계나 법을 잘 몰라 사기당하고 피해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요. 이걸 정부 지원으로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료변론 해주는 변호사들이 있긴 하지만, 남는 시간을 이용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더라고요.”

-지역 경찰서에서도 ‘신변보호’를 해주지 않나요.

“맞아요. 지역 경찰서 보안계 형사들이 역할을 맡고 있는데, 탈북민들을 위해 애쓰는 분들이죠. 탈북민들도 이들을 신뢰합니다. 사실, 처음엔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도움도 많이 받습니다. 탈북민이 사기 등으로 피해를 입으면, 대신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해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분들도 역시 본연의 일을 하면서 해야하다보니 한계가 있어요. 관리 인원도 많고요. 한 사람 당 많게는 50명까지 담당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어떤 사람은 연락도 못해요. 또 인사이동 땐 담당이 바뀌고요.”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지성호 의원 ⓒ투데이신문

◆국회의원 한 번만으론 하고 싶은 일 다 못해

-청년 정치인 확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가요.

“지금 국민의힘 당대표가 청년이잖아요. 더불어민주당 공동 비대위원장도 그렇고요. 청년정치인을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청년정치인이 좋은 청년정책을 만들고, 탈북청년 정치인이 그에 맞는 탈북민 정책을 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저도 여야 청년정치인 모임을 갖고 있는데, 젊은 정치인들이 국회로 많이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능력 있는 2030 청년들이 많죠.

“정말 거의 천재 수준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다른 동료의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특히, 스마트폰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세대라 특정 주제에 휘둘리지도 않고요. 주관이 뚜렷하고 의견 제시도 명확하더라고요.”

-청년 정치 확대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이제 곧 지방선거가 있잖아요. 지방 정치인을 늘리는 게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치가 중앙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잖아요. 지방이 활성화돼야 탈북청년들도 지방에서 일자리가 생겨 정착할 수 있고요.”

-후반기 일정과 그 이후의 계획이 있다면요.

“전반기 활동을 돌아보니, 국회의원 임기 4년으로는 해결 못할 게 많더라고요. 8년 정도면 어느 정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비례대표는 한 번밖에 못하니까 아쉬움이 있다고 봐야죠. 공천이라는 것도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는 문제니, 다음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나마 이번 회기에서 여러 입법을 추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사실 정치인이 된 후로 처음 경험해본 대선인데, 이번 대선에서 북한 인권이나 탈북민 정착 등과 관련한 내용이 공약에 많이 포함됐어요. 이게 상반기 의정활동의 큰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죠. 지금까지 우리 당 대선 공약집에 탈북민 관련 정책이 담긴 예는 처음이거든요. 물론, 다른 대선후보 모두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동안 다문화, 장애인 등을 위한 공약들은 있었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떤 공약들이 들어갔나요.

“‘북한인권재단’이나 ‘북한인권대사’ 등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요. 트라우마센터나 법률보호관제 등도 다 공약에 들어갔어요. ‘탈북민’이라는 단어도 ‘먼저 온 통일’이란 의미에서 ‘통일민’이란 말로 바꿔야하고요. 또 북한이탈주민의 창업과 취업, 영농 지원 같은 정착지원 공약들이 있습니다. 영농 쪽에선 의외로 수 천만 원씩 소득을 내면서 땅까지 사는 분들도 있는 등 성공적인 정착사례가 나오는데, 농촌 인구도 적고 탈북민을 원하는 지역도 있고 해서 희망적입니다. 이젠 공약을 현실화하는 숙제가 남았죠. 법을 통과시켜야하는 것도 있고, 정부가 의지를 갖고 시행령 등을 손보면 되는 부분들도 있어요. 북한인권박물관을 만들어 우리 국민들이 체험하고 눈으로 보고 북한을 좀 더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고요.”

그는 인터뷰 내내 트라우마센터 필요성을 반복해 강조했다. 탈북 과정에서 느낀 극한의 공포와 불안감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그는 트라우마센터 운영의 당위성으로 표현했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은 탈북민들은 정착생활 중 드러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에 시달린다. 특히, 아픈 경험을 겪은 적지 않은 여성 탈북민들의 고충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 2017년 4월 15일.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문수산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대북전단 30만장과 1달러 지폐 2천장, USB와 DVD 각 1천개, 소책자 500권 등을 대형 풍선 10개 매달아 날려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17년 4월 15일.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문수산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대북전단 30만장과 1달러 지폐 2천장, USB와 DVD 각 1천개, 소책자 500권 등을 대형 풍선 10개 매달아 날려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전단·대북확성기 등 비대칭무기, 북한에 치명적

-대북전단살포금지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건 필요가 없는 법입니다. 대북전단은 계속 보내야 해요. 이 법은 북한주민의 알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고 있어요. 대북전단은 비대칭 무기나 마찬가집니다. 대북방송과 확성기 등도 비대칭 무기거든요. 북한은 핵과 ICBM(사거리 5500km 이상인 대륙간탄도유도탄) 얘길 하는데, 박근혜 정부 때 확성기로 대북방송을 트니까 협상하자고 나오잖아요. 북한에겐 이런 비대칭무기가 그만큼 치명적인 거죠.”

-전단 살포 지역 주민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효과도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서 보내는지 모르게 밤에 띄우도록 해주자는 겁니다. 주민들 피해 없게. 낮엔 못하게 하더라도 이걸 법으로 못하게 막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금 웬만한 북한 청년들은 남한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을 사실상 다 접하고 있는데, 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되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잖아요. 북한 주민들이 봉기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난해 3월 30일,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대북전단금지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최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 받을 수 있다.

-주도적으로 설립한 북한인권단체(NAHU)는 계속 운영되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나우가 통일부산하 비영리 민간단체라 국회의원 신분으로 직접 활동할 순 없지만, 현재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탈북민 숫자가 1/10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코로나가 나아지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탈북민이 왜 줄죠?

“북한이 국경을 완전히 봉쇄했잖아요. 감시도 강화됐고요. 그 바람에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도 예전처럼 쉽지 않아요. 또 북한 주민들 스스로도 탈북 과정에서 코로나에 걸릴까봐 두렵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탈북 당시, 발이 돼준 나무 목발은 아직 보관하고 있나요.

“저기 있어요.”

그의 손이 가리킨 곳은 의원실 한 구석이었다. 그곳엔 그와 1만km의 탈북 여정을 함께한 나무 목발 두 개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목발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정교했다. 마치 전문 용품점에서 판매하는 공산품 같았다. 그는 “다리를 잃은 후 친구들이 재료를 구해다 줘서 ‘전문가’에게 부탁해 만들었다”며 목발에 얽힌 사연도 털어놨다. 그는 “손잡이와 겨드랑이 등이 닿는 각진 부분을 곡면으로 다듬는 마무리 작업은 아버지가 손수 하셨다”고 말했다.

지성호 의원이 1만km 탈북 당시 사용한 나무 목발. 그는 의원실 한편에 목발을 세워두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투데이신문
지성호 의원이 1만km 탈북 당시 사용한 나무 목발. 그는 의원실 한편에 목발을 세워두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투데이신문

-판매품처럼 깨끗하고 정교하네요.

“아버지의 손길이 묻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 목발엔 두만강 물도, 메콩강 물도 묻어 있죠. 하하.”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상징이 된 목발을 높게 치켜든다. 2015년 노르웨이 오슬로 자유포럼 강연 때도 그랬고,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의회 초청 때도 그랬다. 오슬로에선 강연 도중 목발을 들어올리며 “이 목발은 1만 킬로미터를 탈출할 수 있게 해준 물건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유를 찾았음을 상징합니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마지막 유품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북한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그 길에 여러분이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힘겹게 찾은 이 자유를 죄책감 없이 누릴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지금도 북한에 꽃제비가 많은가요.

“김정은 체제 들어서 좀 챙기다가 지금은 또 그런 여건이 못 되는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다시 쓰레기 줍는다는 얘기가 들리거든요. 지금 북한 사람들 사이에선 ‘꽃제비 출신 장애인이 남한에서 국회의원이 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주민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난리가 났다 그래요. 북한 고위층도 아닌 꽃제비 거지가 남한으로 넘어가 국회의원이 됐고, 국민의 대표 중 한 사람이 됐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어느 정도인가요.

“북한 사회가 유지되는 건 ‘세뇌’ 때문인데요, 어려서부터 ‘남한은 살기 어려워 애들이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는다’고 가르치면서 일본, 미국을 욕하고 공화국(북한)이야말로 천국이라 세뇌시킵니다. ‘지금 잠시 배고픈 건 봉쇄해서 그런 거다, 우리는 곧 잘 살게 될 거다, 싸워서 이겨야한다, 그래서 남한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줘야한다’ 그러면서요.”

-그런 얘기를 믿나요.

“이젠 안 믿죠. 실제 북한 주민들은 남한 영화나 드라마, 노래를 보고 듣고 따라합니다. 심지어 서울 말씨까지 흉내 낼 정도로 청년들이 변했어요. 이런 상태에서 북한 고위층도 아닌, 길거리 장마당에서 음식 쓰레기나 주워 먹던 꽃제비가 국회의원이 됐으니 남한 사회가 어떤 곳인지 입증 된 거죠. 북한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니까요. 이러다보니, 이젠 어떤 세뇌교육도 안 먹힙니다.”

지난 2018년 1월 30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진행 중인 가운데 지성호 씨가 자신이 소개되자 목발을 들고 인사했다. [사진제공=뉴시스]
지난 2018년 1월 30일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가 진행 중인 가운데 지성호 씨가 자신이 소개되자 목발을 들고 인사했다. [사진제공=뉴시스]

◆전기·냉동설비 부족해 백신 지원해도 무용지물

-북한의 코로나19 상황은 어떤가요.

“북한 당국이 코로나가 없다고 하니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해도 사실 아무런 조치도 못합니다. 의료 시스템이나 의약품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봉쇄 말고는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백신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없고요. 왜냐하면, 전기 공급도 불안정하고 백신을 보관하거나 이동할 냉동시설이나 이동설비가 안 돼 있기 때문에 주사를 놔줄 수도 없거든요.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닌 거죠. 물건만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란 얘깁니다.”

-국경을 봉쇄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북한이 두려워하는 건 방역시스템이 안 돼 있다 보니, 한 번 뚫리면 끝이기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근 겁니다. 백신 같은 경우도 평양시민 일부라면 몰라도, 모든 북한사람들을 대상으로 접종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2000년, 당시 열아홉 살 성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목발을 짚고 처음 중국으로 건너가 쌀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경찰에 붙잡히면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더 이상 이 땅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끝에 북한 탈출을 결심한 그는 2006년 목발을 짚고 남동생과 두만강을 건너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을 거치는 1만km를 횡단, 그해 7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등 가족 모두가 탈북한 이후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탈북을 시도하다 보위부에 잡혀 고문을 당해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2010년 그는 서울에서 친구들과 북한인권단체 나우(NAHU)를 설립, 탈북자 500여명을 구출해냈다.

2015년엔 노르웨이 오슬로 자유포럼 연사로 초청돼 강연했고, 2018년 1월 30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 초청으로 워싱턴 D·C 의회의 국정연설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1996년 성호 씨는 북한에서 굶주리던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치려고 했습니다...지금 성호 씨는 서울에 살면서 다른 탈북자를 구하고, 북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실을 북한에 방송으로 알리고 있습니다...당신의 위대한 희생은 우리 모두에게 감명을 줬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그를 소개했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테이블에 사과와 사탕을 올려놓았을 때,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과와 사탕은 열네 살 당시 그가 열차에서 추락한 후 팔다리 수술을 마쳤을 때 가장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이었다.

그는 “치킨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과와 사탕을 받아본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탈북 이후 그는 종종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닭 한 마리를 배부르게 먹는 게 소원’이라고 했었다.

그가 기억하는 당시의 북한 사과는 한국에서 재배되는 사과보다 훨씬 작았지만, 구하기 어려운 과일이었다. 또 김일성·김정일 생일 때나 맛볼 수 있었던 ‘콩사탕’은 열 개 남짓 들어있는 한 봉지 가격이 옥수수 1kg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고 귀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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