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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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음습하지만 짓궂고 천진난만하다. 밤과 어둠, 죽음과 유령, 무한과 추상, 아이와 유머. 함기석의 시세계를 마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세계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투명하리만치 검은 유희의 난장을 아무런 제어장치도 없이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 곧 시라는 듯이. 함기석의 최근 시집 『음시』(문학동네 2022)는 그러한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시인은 양이 아닌 음을 지향하며 세계의 이면, 존재의 밑바닥, 언어와 관념의 기저를 두루 탐색한다. 음을 지향하는 시는 시인의 말처럼 “산 자의 죽은 말과 죽은 자의 죽지 않는 말 사이”를 표류하며 영원불멸한다.

시인이 양의 시가 아닌 음의 시에 천착하는 이유는 시집의 맨 첫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낱말이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탯줄로 이어져 있”어 태어난 “순간부터 낱말은 훼손되고/썩은 젖을 빨며”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오염된 땅」). 그래서인지 함기석의 시에서 낱말들은 주로 피를 흘리며 가사 상태에 빠져 있거나 변사체로 발견된다. 「국립낱말과학수사원」에서는 “부검될 변사체 <없다>”가 1연에서 2연으로 이동하고 “두개골이 함몰된 또다른 변사체 <있다>”는 침대에 실려 5연으로 옮겨진다.

함기석의 시세계에서 양이 음으로 뒤집히는 상징적인 시간은 정오다. “태양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정오”(「플랫랜드」)에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은 세상을 수직으로 양분한다. 「정오의 정원―수직 이등분된 나무 눈(noon)의 좌측면」과 「정오의 정원―수직 이등분된 나무 눈(noon)의 우측면」은 시집의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에 자리하여 정오의 태양이 세상을 수직 양분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태양을 소환한들 시인의 시세계에서 빛과 밝음을 찾기란 만무한데, 정오의 태양은 그야말로 빛을 내리쬐며 외려 눈을 멀게 하고 빛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빛이 빛을 흡수해버리며 펼쳐지는 음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음침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 세계는 “늑대의 노란 눈알 닮은 달”(「유령 피아노」)이 떠오르는, “글자에 손이 베이는 밤”(「날개 달린 돌」)과 같은 세계, “염산 같은 침묵”(「기이한 끌개 A」)이 흐르는 세계,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꽃들”(「유령 알레프 영이 사는 아홉 집 수리마을」)이 즐비한 세계, “죽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것들뿐인 세계”(「에셔병원」)이다. 이곳에서 존재는 기이하게 왜곡되고 시공은 한없이 굴절된다. 죽음에 연결된 채 태어난 존재들은 땅이 꺼진 허공에서 영원히 추락 중이거나 “원형거울 속의 원형거울 속의 원형거울 속으로”(「수학자 누(Nu) 4」) 끝없이 수렴한다.

이러한 악무한의 세계에 시인 자신을 제외하고 드물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유령 피아노」에서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인 미아는 자정이 되면 기숙사에 나타나 깔깔거리고 춤추며 노는, 죽은 친구들의 유령을 만난다. 함께 놀자고 천진하게 묻는 유령들을 뿌리치려 해도 뿌리칠 수 없는 이 세계는 “아무리 깨어도 계속되는” 미아의 꿈속이다. “태양계에서 17억 광년 떨어진 평행우주”(「수학자 누(Nu) 17」)로 나아가는 ‘수학자 누(Nu)’ 연작에서 화자는 “힌두우주인 마야(maya)”와 함께 우주선에서 동면한다. 마야의 눈에서 뻗어나온 촉수에 사로잡혀 마야의 몸에 갇힌 화자는 마야의 신경망과 척추를 지나 항문을 통해 마야의 몸을 빠져나가 “지구로부터 108광년 떨어진 암흑우주”에 도달한다(「수학자 누(Nu) 16」).

“자정은 자정임을 증명하는 순간 스스로 붕괴된다”(「수학자 누(Nu) 1」). 그렇게 음의 세계를 증명한 음시는 양의 세계인 현실을 벗어난 우주로 나아가는 듯하다. 세계와 존재의 모든 근거를 초월한 암흑의 공간에서 시인은 소녀의 형상을 한 신과 조우하기에 이른다. “너희 없는 세계 너희 없는 우주”에서 “미래는 무한히 지속 가능”하리라는 신의 음성을 지나쳐 화자는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암흑우주 속으로 계속 흡입”된다(「수학자 누(Nu) 17」). 우주라는 추상의 한 극점에 도달한 시는 이제 무한으로 나아가려는 걸까. 영원히 “언어 속에서 살해”되고 “언어 속에서 화형중”인 이 무시무시한 “세계의 반(反)기획”(「음시」)은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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