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타하리> 공연 장면 ⓒEMK Musical
뮤지컬 <마타하리> 공연 장면 ⓒEMK Musical

배경은 파리 해부학 박물관. 죽은 지 37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었던 마타하리의 머리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과거 그가 남긴 행적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자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마타하리를 추억한다. 누군가는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한낱 요부이자 스파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웃는다. 이때 붉게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한 노인이 나타나 그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러자 노인의 추억 속에 살아 숨 쉬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이내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춤을 춘다. 아름답고 자유로웠던 여인, 마타하리의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뮤지컬 ‘마타하리’가 새로운 옷을 입고 돌아왔다.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품이 강조하려 했던 주인공의 인간적인 모습에는 변함이 없지만, 확실히 전보다 깊이 있고 단단해졌다.

뮤지컬 ‘마타하리’는 EMK오리지널뮤지컬의 시작을 알린 창작 뮤지컬이어서 더 특별하다. 2016년 초연 당시 개막 8주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관객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제5회 예그린뮤지컬어워즈’,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등 주요 3개 뮤지컬 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이후 2017년 재연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며 흥행 릴레이를 이어가는 듯했으나, 달라진 스토리 전개에 아쉬움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며 야심 찬 재정비를 마친 뮤지컬 ‘마타하리’는 이전 시즌이 보여준 장점에 개연성과 더불어 구체적인 서사를 더하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선보였다. 기존에 없던 인물이 등장하고 결말도 크게 달라졌다. 앞서 ‘마타하리’를 봤던 관객이라면 꽤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이번 삼연부터 작품에 참여한 권은아 연출은 작품 개발 과정에서 마타하리의 삶을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창의력을 발휘하려 했다고 말 한 바 있다. 실존 인물이 걸어온 발자취를 탐구하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는 동안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해졌다고도 했다. 초점은 마타하리가 품은 의지를 향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도는 정확히 통했다. 뮤지컬 속 마타하리는 더 이상 희대의 스파이나 권력형 팜므파탈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이처럼 뮤지컬 ‘마타하리’가 보여준 이유 있는 변신은 작품이 앞으로 새롭게 써 내려갈 역사를 또 한 번 기대케 한다.

출연진 또한 주목해 볼 만 하다. 먼저 주인공 마타하리 역은 초연부터 지금까지 작품과 함께한 옥주현과 ‘마타하리’로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솔라가 맡았다. 그리고 마타하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유능한 프랑스군 소속 파일럿 아르망 역에는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가 캐스팅됐다. 또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마타하리를 스파이로 만든 프랑스 정보부 소속 대령 라두 역은 최민철, 김바울이 맡아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이 밖에 한지연, 최나래, 홍경수, 육현욱, 김지혜, 최진 등도 같은 무대에 오른다.

작품은 단순히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삶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아 더 흥미롭다.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 독일과 프랑스 사이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형을 당한 인물이다. ‘새벽의 눈(Mata Hari)’이라는 예명을 가진 네덜란드 출신 무희이자 스파이의 대표 격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말로 그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찍이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받은 그는 학대와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를 피해 새로운 삶을 찾고자 프랑스 파리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는 우연한 기회에 과거를 묻고 사교계에 데뷔할 기회를 얻는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자 했던 순간, 인도네시아 자바 여인들로부터 배운 춤은 마가레타가 마타하리로서 새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무기가 됐다. 그가 선보인 스트립 댄스는 프랑스 사교계에 충격을 안기고, 마타하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각계의 리더들이 마타하리 앞에 고개를 숙이면서 그를 갖기 위해 애쓰지만, 마타하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조종사 아르망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아르망과 마주한 여인은 자신을 마가레타라 소개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릇된 욕망을 품었던 라두 대령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마타하리를 독일에 잠입할 스파이로 만들면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마타하리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한 마가레타는 오직 관객들에게만 보이는 존재다. 극적인 순간이나 과거 회상,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내면의 자아’ 마가레타가 등장해 춤을 춘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무대를 누비는 소녀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려있다. 펭르베 장관과 더불어 이번 시즌 처음 등장한 인물로, 외면하고 싶지만 끝내 외면할 수 없는 본질이자 마타하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그의 발끝을 따라 무대 위로 피어나는 꽃은 마치 마타하리의 인생을 의미하는 듯하다.

혼란했던 시대는 갖은 핑계를 대며 여인의 삶을 마음껏 휘두르려 했으나 마타하리는 굴복하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 속에서도 결국 선택은 마타하리 자신을 향했다. 눈앞에 놓인 운명에 맞서 오직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지막을 결정하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났다 고개를 떨군 꽃 그 자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작품이 가진 예술적 아름다움을 청초하게 빛낸다. 특히 ‘마지막 순간’은 마타하리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는 넘버와 같다. 언제나 당당했던 인물이 세상을 향해 작별 인사를 고하는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명장면이다. 눈꽃처럼 흩어지던 마타하리의 최후가 오르골 속 소녀와 겹치면서 천천히 회전하던 모습 또한 더없이 감동적이다.

이처럼 여러모로 세밀한 노력이 담긴 무대는 배우들의 열연으로 또 한 번 빛난다. 

먼저 ‘마타하리’ 옥주현은 작품과의 오랜 인연을 증명하듯 노련한 무대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복잡했던 인물의 역사를 압축해 풀어 놓는 과정은 작지만 놓칠 수 없는 디테일 덕분에 더 자연스럽다. 시원한 가창력과 매혹적인 춤 또한 관객을 설득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번 작품으로 첫 주연을 맡은 배우 김성식의 무대도 눈에 띈다. 뮤지컬 ‘레베카’ 앙상블로 데뷔했던 김성식은 ‘마타하리’에서 아르망 역을 연기하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노래하던 청년이 마타하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순간 확신에 찬 남자로 변하는 과정은 섬세한 감정 묘사로 완성됐다.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br>-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br>-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br>-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br>-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br>
▲ 최윤영 평론가·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무대 예술상 수상작답게 볼거리 역시 가득하다. 화려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의 무대는 비극적 현실과 대비되며 뭉클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높고 깊은 구조물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작품을 더욱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스케일을 키우며 시선을 압도한다.

지난 5월 28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마타하리’는 오는 8월 15일까지 ‘마타하리’ 열풍을 이어갈 예정이다. 소용돌이치는 삶의 한복판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여인의 이야기는 아직 우리 곁에 머물러있다. 5년 만에 돌아온 ‘마타하리’의 힘찬 재도약이 관객들에게도 오래도록 응원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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