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은 단순히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당한 전쟁이 아닌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바꾼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시기 이슬람과 명(明)이 가장 강성한 문화권이었는데, 조선은 명과 사대(事大)의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주권을 유지했음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도 세계적인 강국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강국이었던 조선을 전국시대를 끝맺고 포르투갈의 신무기를 도입했던 일본이 침략했고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 빠뜨릴 정도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에 16세기 세계의 양강 중 하나였던 명이 개입했다면,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강대국 사이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종전 후 강대국인 명(明)이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청(淸) 왕조가 시작됐고, 곧 중원의 주인이 됐다. 또한 조선과 청 사이의 전쟁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시대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열렸다. 여러 나라가 개입되어 있었고, 그 후폭풍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배층이 교체됐으니 동아시아 정치 지형을 바꾼 국제적 전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 가운데 빠진 몇몇이 있다. 바로 류큐[琉球]와 여진(女眞)이다. 류큐는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의 왕국을 뜻하는데, 훗날 일본에 복속됐지만 당시까지는 일본과 다른 나라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명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리 간파했고, 왜군의 북상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명 조정은 임진왜란 초반에는 조선이 일본과 밀약을 맺고 명을 침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명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조선 조정에 류큐와 함께 일본 본토를 공략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런데 여진의 경우 조금 복잡하다.

여진은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은 스스로를 명의 문화를 가장 잘 이어받고 있는 국가로 자처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 이외의 민족과 국가를 교화가 필요한 야만스러운 존재로 간주했고, 시혜의 입장에서 이들과 교류했다. 그 존재가 바로 여진과 일본이었다. 그러나 여진과 일본은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전부터 수시로 국경을 침범해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진의 경우 농경이 아닌 목축이 주된 생산 수단이었기 때문에 곡식이 필요했고, 포로를 노예로 삼아 곡식과 바꾸는 것도 중요했다.

여진은 조선과 명에게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조선 세종 대의 4군6진은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의 여진족들을 물리치고 경계하기 위해 개척한 영토였다. 조선은 무력과 화친을 적절히 섞어서 여진의 침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명의 입장에서 여진은 자신들의 조정을 위협하는 여러 존재 중 하나였다. 이로 인해 명은 끊임없이 여진과 전쟁을 벌였고, 부족 사이의 갈등을 유발해 힘을 합치지 못하게 만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사용했다. 명의 여진 견제에 조선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 예로 조선은 명의 여진 정벌을 위해 말을 제공한 경우도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명이 조선에 원병을 보낼 때 그 주된 병력은 요동 지역에 주둔한 군대였다. 이들은 조선을 압박하고 여진과의 전투를 수행했던 부대로 명군 가운데에서도 주력군이었다. 이들이 임진왜란에 원군으로 참여해 피해를 입으면서 명의 군사력이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명은 부족별로 갈라져 있었던 여진 부족의 연합이나 통일을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여진 부족의 단결 못지않게 조선과 여진이 연대해 명을 침공하는 것 역시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의 영토 일부와 여진 부족이 살던 지역이 과거 우리 민족의 영토였고, 역사적으로 여진 부족 일부가 고구려, 발해 등을 함께 구성했었음을 명도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을 전후해 여진 부족 중 하나인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여진 부족을 빠르게 통일할 정도로 그 힘이 강대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 누르하치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 4군 개척 과정에서 건주 여진을 토벌한 적이 있었고, 여진이 원병을 보낸 것을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200년간 사대(事大)의 예를 다했던 명의 원병은 왜군보다 더 심한 약탈과 요구를 했다. 그렇다고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여진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덥석 잡을 수도 없었다. 조선 조정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임진왜란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왜군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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