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팡세-분류된 단장’ 번역한 김화영 교수
팡세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측면에서 바라봐야
‘사이클로이드곡선’ 파스칼 설득기술을 가시화 한 것
번역이란 독자들이 원형 그대로 향유하게 해줘야
팡세를 통해 진실 되고 진지한 행복 추구했으면

“책을 읽는다는 건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데카르트)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도 같다”(키케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안중근)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신용호)

책을 통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위인들의 명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단돈 만원으로도 인생을 바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 성인 1년 독서량은 6권 정도밖에 안 된다. 두 달에 겨우 1권 읽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책을 펼치기도 전에 독서라는 행위는 고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책 내용이 궁금하다면 몇 백 장의 책을 읽는 수고스러움 대신 요약된 내용만 찾아서 보고, 듣고 읽으면 되는 세상이다. 남이 정리해 둔 몇 줄의 서평과 몇 개의 영상이면 마치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기분까지 든다. 이렇듯 읽는 행위가 생략된 독서, 저자와의 대화를 막아버리는 독서만을 이어간다면 책이 주는 즐거움을 영영 모르게 될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독서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걱정들 하지만 전자책의 인기가 올라가는 걸 보면 이 시대에 애독가들은 다른 형태, 진화한 독서를 즐기고 있음에 분명하다. 좋은 책을 읽다보면 밑줄을 수도 없이 긋고, 멋진 글귀가 있는 페이지 모퉁이는 살짝 접어두기도 한다. 책을 덮은 후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는 이러한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해서 신간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저자와의 인터뷰를 찾아보며 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투데이신문>이 새롭게 선보이는 [Today_Pub](투데이펍) 연재는 대중(Public)을 위한, 출판(Publish)된 책에 대한, 펍(Pub)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콘셉트로 책과 사람을 잇는 콘텐츠다. 책을 만든 저자, 편집자, 기획자 등과의 대화부터 책 한 권이 나오고 읽히기까지의 과정과 남긴 것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다.

팡세-분류된 단장 옮긴이 김화영 교수 ⓒ투데이신문
팡세-분류된 단장 옮긴이 김화영 교수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중선 기자】 누군가에게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에 대해 소개해야만 한다고 가정해보자. 천재 수학자. 계산기를 발명한 발명가. 유압브레이크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그를 대표할 수식은 어느 것 하나 꼽을 수 없을 만큼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만큼 보편적인 수식이 있을까. 

파스칼 이후 문학과 철학, 신학 등 그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인간 실존의 담대한 물음을 던진 그의 유고작 <팡세>는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명저로 평가 받는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사유 속에 계속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팡세는 파스칼이 39세라는 짧은 생의 마지막까지 집필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1000여 편의 단장(斷章)으로 남겨지게 된 미완의 작품이다. 따라서 편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구성의 판본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번역 인문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작 어떤 판본 번역을 읽어야 할까. 스스로를 ‘파스칼 연구자’로 규명할 만큼 파스칼 연구에 각별한 열정을 쏟는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기존 팡세의 번역에는 파스칼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결여돼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팡세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은 저자의 호교론적 의도를 잘 보여주는 라퓌마·셀리에 판본으로부터 파스칼의 수사학적 전략을 조명한다. 특히 파스칼의 ‘사이클로이드곡선’에 의한 설득 방식을 추출해 냈는데 이는 파스칼의 언어적 문화적 장치를 파스칼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화영 교수는 현재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에서 프랑스어, 프랑스 문학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으며, 마하 예술원에서 시민들과 함께 프랑스 예술과 문화에 대해 나누는 등 교양의 대중화에도 깊게 관심을 두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마하예술원에서 김화영 교수를 만나 파스칼의 철학과 그의 미완의 저서 팡세가 몇 세기를 넘어선 인류에게 던지는 의미 그리고 번역과 관련된 얘기를 들어봤다. 

Q. 어떤 계기로 파스칼을 연구하게 됐나요.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파스칼을 처음 알게 됐어요. 파스칼은 합리주의의 아버지잖아요, 천재 수학자이고. 그런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고 말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뭔가 합리적인 연상이 안 됐어요. 무슨 수학자가 이렇게 멋진 말을 하나 하고. 그렇게 파스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 파스칼은 과학자인데 신앙적인 부분도 얘기하고 그리고 인간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기도 해서 한번 제대로 연구를 해보자는 결심을 했어요. 

Q. 팡세는 기독교 서적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교수님은 종교가 있으신가요.

원래는 무교였는데 파스칼을 계속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파스칼이 성경을 많이 언급하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접하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신앙과 종교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Q. 어떤 면에서 신앙과 종교가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안에서 지켜야할 규율을 만들고 인간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답답한 강제성이 있는 반면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차원의 것이라는게 차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어로는 신앙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고 중의적인 표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팡세 번역할 때도 그 부분이 어려웠어요. 신앙이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신앙과 종교로 어휘가 나뉘기 때문에 적절하게 통일하는 작업을 고민하다 부담스러워서 그냥 종교로 번역한 부분이 있어요.  

Q.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와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유명한 저 두 문장은 인간의 실존적 탐구라는 의미에서 같은 줄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파스칼은 우주공간에선 지구조차 파란 알갱이일 뿐인데 하물며 인간이란 존재는 먼지, 아니 미립자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인식론의 출발점으로 생각되는 코기토*와 정면으로 배치돼요. 그런데 기존 번역에서는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코기토(cogito): 데카르트의 기본철학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Q. 파스칼의 팡세는 인간 실존의 불확실한 좌표를 던짐으로써 이후 많은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니체, 사르트르, 카뮈 등이 영향을 받은 걸로 유명한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사상의 시작점은 다 같아요. 카뮈가 부조리를 인식하는 지점이나 사르트르나 니체까지 모두 파스칼의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서 시작을 합니다. 이렇듯 실존주의 기본이 파스칼의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방향은 다릅니다. 아마도 파스칼을 뛰어 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허무한 사람이다. 남들의 평판과 오락, 장래에 관한 생각에 빠진 젊은이들 말고, 이 허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들에게서 오락을 금지해보라, 권태로 시들어가는 그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때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공허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게 될 때, 견디기 힘든 슬픔에 빠지게 되며, 이는 몹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p42)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 나무는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분명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인식 그 자체는 위대한 것이다. (p100-101)

Q. 다른 판본 번역과는 다르게 교수님은 팡세에서 어떻게 사이클로이드곡선을 도출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전 박사논문에서 과학적 사고의 모형을 연구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이클로이드곡선*이고 이 사이클로이드곡선이 팡세의 설득기술을 가시화 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팡세의 율동적인 구성, 탈선의 논리로서 작품 전체의 구성 원리를 확장시켜 보니 직선운동과 곡선운동의 조합, 즉 최종 목적인 참된 신앙을 제시하는 것이 직선의 논리고 곡선의 운동을 탈선의 논리로 본 것이죠.

*사이클로이드곡선: 원 위에 한 점을 찍고, 그 원을 굴렸을 때 직선 위에 점이 그리며 나아가는 곡선 

Q. 사이클로이드곡선이 어떻게 팡세를 설명하나요.

파스칼은 논쟁에 능해요. 말싸움에서 거의 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논리적이에요. 그러나 자기 논리로 그 논쟁을 이겨봐야 반발만 더 심하고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는 걸 깨닫고 기독교 변증이나 호교를 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반발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탈선을 하고 다른 얘기를 하다가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설득을 하는 의도적 전략이 사이클로이드곡선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즉각적 반발을 우회해 설득시키는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Q. 파스칼은 수학자로 유명했는데 어떤 계기로 팡세를 집필했나요.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허무를 직면했고 진리에 대해 깊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성경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많이 공부하면서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도 인정하게 됐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인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만나 참 신앙인이 됐다고 고백합니다. 그 순간의 경험으로 팡세 집필을 결심하게 된 것 같아요. 

Q. 결국 파스칼은 이성이 아닌 종교적 믿음에서 치유를 받은 것일까요.

17세기는 문예 부흥이 일어남과 동시에 과학도 발달하던 시기라 데카르트 뿐 아니라 파스칼도 신앙은 다 버리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인간은 너무 모순적이라 이 부분을 해결하고 싶은데 어디서도 답을 얻을 수 없었을 거고요.

그러다 성경에서 답을 얻게 됩니다. 파스칼은 신앙이 이성의 산물은 아니기에 맹목적 믿음보다는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해요. 올바른 신앙은 이성적인 증거와 역사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만큼 맹목적인 믿음은 곧 미신이라고요. 

그러나 동시에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 ‘신의 영역’도 분명히 존재하기에 이성만을 인정하는 태도 또한 지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Q. 교수님의 번역 해제 부분을 보면 번역은 언어 뿐 아니라 좀 과장을 보태 문화DNA까지 치환하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파스칼은 17세기 사람으로 중세 프랑스 언어가 지금의 프랑스어와 다른 점이 많았을 텐데 교수님이 추구하시는 번역은 무엇인가요. 

번역이라고 하는 게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와 실용번역의 영역은 전혀 다릅니다. 실용번역은 의미의 등가를 이루면 잘 번역된 것이라 평가받아요. 문학작품인 경우에는 문학성을 고스란히 옮겨와야 하고 해당 시대의 맥락도 다 알아야 하는데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죠. 또한 독자와의 접점에도 여러 문제가 있고요. 번역을 자국화 해서 이해를 좀 더 직관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은데 저하고는 방향이 달라요. 독자들의 이해가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원문에 남아있는 어떤 문화적인 맥락의 층위를 독자들이 원형 그대로 향유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번역의 자국화로 원작의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를 예를 든다면.

<여우와 포도>라는 우화의 경우 원래의 내용은 여우가 너무 높이 있는 포도나무의 포도를 따먹지 못해 투덜거리며 포기한다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번역에서는 ‘그림의 떡’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렇게 번역을 하면 번역본을 읽는 독자들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게 와 닿지만 사실 그렇게 번역하면 그 나라의 포도주 문화가 완전 뭉그러지기 때문에 도대체 프랑스 문학인지 우리나라 문학인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작품이 되고 맙니다. 번역학자 베르만은 이런 부분에 대해 “자국 문화가 선진하다는 그런 우월감이 있는 나라는 다 그렇게 자국화를 해버리는 것”이라며 지적했습니다. 저도 그 말에 일정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Q. 팡세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의 코’ 부분도 그런 의미에서 지적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기존의 팡세 번역도 원래는 ‘클레오파트라의 콧날이 조금만 짧았더라면 세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코의 길이가 자국화 되면서 높낮이로 바뀐 예입니다. 이렇듯 기존의 팡세 번역본을 검토하면서 이제는 기존의 번역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팡세-분류된 단장 옮긴이 김화영 교수 ⓒ투데이신문
팡세-분류된 단장 옮긴이 김화영 교수 ⓒ투데이신문

Q. 파스칼은 어릴 적부터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알려졌는데 어떤 상황이었나요.

인터넷의 문제점 중 하나가 잘못된 정보가 여과 없이 퍼진다는 겁니다. 파스칼이 마차 사고를 당해서 아프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마차사고를 당한 건 아버지고요 원래부터 몸이 안 좋았습니다. 마비증세도 있었고 특히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고 합니다.

Q. 파스칼의 고통에 인간적인 동질감을 느끼셨다고 했는데 이번 번역이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번역을 하기 힘든 여러 조건들이 많이 있었어요. 특히 건강상의 문제가 가장 컸는데 사실 저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시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어머니가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파스칼을 제대로 알려 사람들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항상 기도할게”라며 저한테 권유하시고 힘을 주셨어요.

그리고 파스칼 연구자로서 파스칼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을 하면서 눈이 너무 안 좋아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통증도 심했지만 이번 번역을 숙명처럼 여기고 끝까지 해냈어요.

인간은 참 신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성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 아마 파스칼이 두통과 치통에 지독하게 시달리면서도 필사적으로 팡세 집필을 통해 느꼈을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Q. 팡세가 현대사회에도 읽히는 보편성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가치는 무엇일까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문화는 많이 타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교, 비종교 이런 차원을 떠나서 어떤 보이지 않는 가치보단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신적인 타락이 만연한 것 같아요.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게 뭔지 찾지 않아요. 일차원적인 즐거움만 추구하게 되니까 문화가 타락하는 것 같아요. 결국 팡세는 불확실한 인간 실존을 마주하는 계기를 그리고 구원의 단서를 준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파스칼이 설득을 목적으로 구사한 ‘탈선의 논리’를 최대치로 살려 내야 한다는 다짐과 노력이 잘 전달 됐으면 합니다. 또한 독자들이 팡세를 통해 진실되고 진지한 행복을 추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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