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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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영상매체와 상업광고는 삶을 무한한 가능성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꾸준히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은 제아무리 가능해 보이는 것도 돌연 불가능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능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을 일상으로 체화하도록 영원히 채찍질하는 가혹한 존재이다. 그런 삶을 시로 옮기는 일이란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삶의 동물적인 본능을 긍정하고 풀어놓는 일과도 같다. 김명기 시인의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처연함을 둘러 입은 사람의 자화상처럼 읽힌다.

삶을 긍정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긍정해야 한다. 시를 쓰는 동안 “중장비 기사에서 유기동물 구조사로” 밥벌이가 바뀌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삶과 죽음이 맞붙어 있는 유기동물에게서 삶의 민낯을 본다.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얼마 전 떠나 버린 사람의/시집을 펼쳐 읽는” 시인의 등 뒤로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 장관이 펼쳐진다. “슬픔이 슬픔을 알아”보는 서글픈 풍경 속에 잠겨 시를 읽으며 시인은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유기동물 보호소」).

삶에 들러붙은 갖은 고초를 향한 개들의 동물적인 감각은 시인에게도 밝히 밟힌다. 그래서 시인은 “버림받은 채 잡혀 와 바깥 견사에 갇힌/개들의 이름을 지어 주다 그만두”기도 한다. “허기진 생의 결장에 갇힌 몸이란/살아도 산 게 아니란 걸 저들도” 알겠거니 하고(「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갇힌 개들은 저들의 운명을 공유하려는 듯 서로 만난 적이 없는데도 “어느 칸에선가 짖는 소리가 들리면/다른 칸에서 그 소리를 받아 짖”으며 “몸부림인지 관습 같은 고백인지 모를 소리”를 함께 만들어낸다(「결이 다른 말」).

“죽은 개를 거두고 돌아와/소주 한 대접 마시고 잠들고 싶은 밤”이면 “사는 게 왜 이런가 생각”하다가도 “사는 건 늘 그랬지, 혼자 중얼거린다”(「인도주의적 안락사」). 늘 그래온 삶에 죽음이 기웃거리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허물어진 것은 허물어진 대로 버려진 것은 버려진 대로”(「황지黃池」) 그저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허기진 삶과 이웃하고 무심한 죽음에 곁을 내주다 보면 “아무런/쓸모가 없어지는 비유와 은유 들”(「상강霜降」)이 차갑게 식어 부서진다. 그 어떤 서사도 은유도 헛것으로 만드는 삶의 이치 앞에서는 “어떤 말에 따옴표를 쳐야 할지 모르”게 된다(「쉼보르스카는 모른다」).

어디에 따옴표를 쳐야 할지 난감하게 하는 삶의 리듬은 그런 삶을 붙들고자 안간힘 쓰는 노동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발휘된다. 공사 현장에서 “점심을 나와 함께 먹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아래로 떨어져 “그가 쳐대던 못처럼 박혔다”. 바닥에서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끝내 숨을 거둔 그를 보며 “자기 전부를 걸고 일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필사적”이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목수」). 죽은 사람, 혹은 죽은 개를 서둘러 치우고 “사람들은 천천히 사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죽은 개를 치우다」).

삶과 죽음이 엉겨 붙는 순간을 죽은 개 치우듯 정리하는 덤덤함이 역설적으로 삶을 유지시킨다. “죽은 사람이/들고 나는 장례식장 앞/태국과 인도네시안 노동자들이/어깨에 철근을 메고 나”르는 모습 속에 “입 다물고 아주 떠나는 사람과/서툰 말로 간신히 사는 사람”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어두운 고해소의 문처럼」). 그렇게 삶은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곁에 두고서야 삶이 비로소 삶다울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시인은 “서둘러야 할 일을 서두르지 않고/가끔 뜨거운 물에 커피를 부으며/끝까지 친절하지 않았던/차디찬 아버지 얼굴을 곁들여” 마시는 여유를 권한다(「커피믹스」). 차가운 죽음을 곁들이고서야 적당히 미지근해지는 믹스커피처럼 너무 뜨거운 것으로만 살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나이만큼 쌓여 가는 약봉지”만큼 실낱같은 위안과 쓸모없는 교훈”도 쌓여 가고 “가벼워진 몸보다 더 무거운 관절”이 육신의 무게를 보존하는 삶의 기묘한 셈법을 익히며 “난생처음 맞는 저녁은 날마다 찾아”온다(「그런 저녁이 와서」). 그렇게 매일 죽음을 더해가며 새로 태어나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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