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가격’ 다섯 번째 납부자, 패션 모델 김영현씨의 이야기
모범생에서 자퇴생으로…꿈을 좇아 학업 포기한 당찬 20살
40만원으로 시작한 모델…명품 L사, G사, D사 러브콜 받아
1% 모델이 전체 수익구조 지탱… 99% 월 평균 수입 48만원
2년간의 유럽생활을 끝으로 돌아온 한국…금전, 병역 문제 커

‘빈곤이란, 누구나 갖는 꿈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실현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 -도서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中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우리나라도 빈곤 문제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특히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곤 청년들에게선 꿈을 잃은 슬픈 자화상을 여과 없이 목도하게 된다.

과연, 꿈이라는 작은 씨앗에 푸른 싹이 트고 잘 익은 열매가 맺히기 위해선 몇 리터의 땀과 눈물이 필요할까. 그간 흘려온 땀과 눈물로 꿈이라는 씨앗에 물을 준다면 꿈은 무탈하게 자라날 수 있을까. 또, 우리 사회라는 토질(土質)은 꿈을 심기에 얼마나 비옥한가.

다들 ‘꿈을 크게 가져야 깨졌을 때 그 조각도 크다’고들 말한다. 꿈을 크게 가지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무기력하게 깨져버린 꿈의 조각들이 온 몸을 할퀴어 올 때,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선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맨 몸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청년들에겐 꿈은 어떤 존재일까.

<투데이신문>이 만나본 꿈꾸는 빈곤 청년들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 뚜렷이 빛났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침이고, 밤이고 죽어있다. ‘꿈의 가격’을 제때 지불하기 위해서다.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꿈을 오롯이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청년들은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빈곤했다. 청년들은 꿈을 담보로 가불인생을 살고 있다. 

너무나도 성실한 이들은 깨어있는 동안 꿈의 청사진에 열심히 덧칠한다. 꿈은 아름답다고들 말하니까, 여기저기서 열심히 긁어모은 가장 선명한 색으로 가득 채운다. 그런데 이상하다. 덧칠을 하면 할수록 소중한 청사진이 흐려진다. 청년은 급하게 붓을 내려놓는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려나가는 꿈의 가격은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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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 리허설을 하고있는 김영현씨 (가명·26) [사진제공=TSG studio]

【투데이신문 박세진·박효령 기자】가슴을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출 스태프, 그 사이에 서있다. 적절한 긴장감과 설렘. 디자이너가 만든 의상을 갖춘 동료들의 얼굴엔 흥분된 미소가 가득하다. 카메라 플래시는 무대 위 모델들을 향해 폭죽처럼 터지고, 관객들은 그들의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수많은 모델들이 오고가자, 어느덧 저 앞에서 연출팀의 큐 사인이 들어온다. 이제 김영현씨(가명·26)의 차례다.

그의 첫 비행이다. 새내기 모델의 둥지 밖 첫 비행. 마치 쭉 뻗은 활주로 같은 이 곳, 런웨이에선 한 치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발, 또 한 발, 새하얀 캔버스에 검은 획을 긋 듯 조심스럽게 걷는다. 신입이니까, 처음이니까 실수 할 수 있다는 사회적 관용은 아쉽게도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 순간의 실수는 스스로에 대한 꼬리표가 되고, 이 꼬리표는 어느새 나의 값을 매기는 가격표가 된다.

살얼음판 위에서 보낸 시간 어언 8년. 부모님의 지원 없이 오롯이 혼자서 일궈낸 결과물이다. 그 긴 시간동안 영현씨는 세계 곳곳을 누볐다. 지방에서 태동한 모델이라는 꿈은 서울에서 런던, 파리, 밀라노, 상하이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됐다. 그곳에서 경험한 긴 시간의 산전수전에 잠시 쉼표를 찍은 영현씨는 현재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 중이다. 그렇게 그는 자그마한 쉼표 속에서 재도약 준비하고 있다. 

매거진 화보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현씨. [사진제공=아레나]<br>
매거진 화보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현씨. [사진제공=아레나]

옷을 좋아하던 모범생, 문제아로 낙인 찍히다

영현씨는 소위 엄친아로 통했다. 큰 키에 훤칠한 외모. 거기다 학급에서 5등 안에 들 정도의 성적까지. 타고난 사교성과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주위 친구들도 그런 영현씨를 따랐다. 자그마한 치킨집을 운영하시던 부모님은 그런 영현씨가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 부족함 없이 키웠다고 자부할 순 없으나, 스스로 잘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더할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과 같이 수험생활을 이어오던 영현씨도 누구나 그렇듯 진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부모님은 아들만큼은 고생하지 않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길 바랬다. 무색무취인 회사에 취업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의 월급을 받으며 살길 바랐다. 그러나 영현씨에겐 남몰래 키워온 꿈이 있었다. 옷을 사랑하던 영현씨에게 딱 맞는 꿈. 바로 ‘패션 모델’이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끓어 오르는 젊음을 대학에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역에서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아는 대학의 수업은 꿈과 관련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에게 지방과 대학은 너무나도 좁은 무대였다. 그렇게 영현씨는 족쇄 같았던 대학을 떠났다. 숨겨왔던 꿈과 자퇴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서울로 떠나려는 아들을 극구 만류했다.

20살의 영현씨는 꿈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그는 이 자신감 하나로 부모님 품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단 돈 40만원을 손에 쥔 채로.

영현씨가 원룸텔에서 벗어나 거주하던 두번째 집. 보증금 300에 월세 27만원이다. ⓒ투데이신문
영현씨가 원룸텔에서 벗어나 거주하던 두번째 집. 보증금 300에 월세 27만원이다. ⓒ투데이신문

서울에서 세계로 나아가는데 걸린 시간 ‘2년’

영현씨는 수중에 쥐어진 40만원을 원룸텔 한달 방 값으로 전부 지불했다. 그의 전재산과 맞바꾼 좁은 방 한칸.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먹고 살 문제가 남았다. 갓 상경한 모델 꿈나무를 고용할 디자이너는 없으니,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치기 전까지 이를 섬세하게 가다듬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버텨야했고, 돈이 필요했다. 

낮에는 일용직을 전전하고, 밤에는 호프집에서 서빙을 했다. 땡전 한 푼 없던 그는 모델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와 거리가 멀었다. 모델 관련 대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모델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믿었기에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그는 두려움과 잡념을 떨쳐냈다.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오직 두 발로 알려나갔다. 검색 포털에 영현씨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의 사진이 한가득 나열된다. 이에 영현씨는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게 기뻤다. 더욱 더 큰 무대를 원했다. 거리가 아닌 실제 런웨이에 서고 싶었다. 이 갈증은 아직 젊은 모델을 더욱 목 마르게 만들었다. 목이 타들어 갈 듯 한 갈증을 안고 묵묵히 컴카드(Composite Card·모델이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구성해 놓은 포트폴리오)를 돌렸다. 그 결과 한 디자이너의 제안을 받게 됐고, 모델로서 첫 데뷔 무대가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2015 S/S 서울 패션위크’다.

첫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영현씨는 더 큰 무대로 향할 채비를 했다. 잠시의 쉴 틈도 그에겐 용납되지 않았다. 그가 다음 행선지로 결정한 곳은 패션의 성지로 불리는 런던과 파리 그리고 밀라노였다. 그는 매년 여름(S/S)과 겨울(F/W) 두 계절을 모두 유럽에서 보냈다. 비행기 값 100만원. 숙식비 300만원. 기타 생활비 100만원. 모델 활동을 하며 번 모은 돈을 더 큰 무대를 위해 과감히 투자했다.

영현씨는 고됐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제가 살아온 방식에 단 1%의 후회도 없습니다”고 웃어보였다.

김영현씨가 받은 유럽의 명품 브랜드 캐스팅 메일 [사진제공=김영현씨]
김영현씨가 받은 유럽의 명품 브랜드 캐스팅 메일 [사진제공=김영현씨]

유럽의 대표 명품 L사, G사, D사의 러브콜

영현씨의 유럽 생활은 22살 어린 나이에 시작됐다. 그는 언어도, 문화도, 음식도 모두 다른 그 곳에서 맨땅에 헤딩하기를 반복했다. 의사소통은 번역기의 힘을 빌렸고, 함께 유럽으로 떠난 동료들과 현지 친구들을 만나가며 그 나라의 문화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식사는 가장 싼 현지 음식 위주로 해결했다. 유럽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유럽의 삶은 단순했다. 기상과 동시에 이력서와 같은 컴카드를 챙긴다. 전철과 버스를 수어번 갈아 탄 뒤 도착한 쇼캐스팅 장소에선 컴카드를 돌리고 또 돌린다. 그리곤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이따금 거리를 거닐며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유럽의 삶은 컴카드를 돌리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영현씨에게 유럽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2년간 지겹도록 컴카드를 돌렸고, 캐스팅팀들의 답변을 기다렸다. 오랜 노력 끝에 꿈에 그리던 곳의 러브콜을 받게됐다. 누구나 동경하는 브랜드 L사, G사, D사. 영현씨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대형 브랜드의 최종 면접을 준비했다.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같은 동작을 수천번, 아니 수만번 반복했다. 그 누구보다 절실했고 또 간절했다. 영현씨는 퀘퀘한  방 안에서 본인만의 무기를 갈고 닦았다.

기다리던 최종 면접 날, 영현씨는 그간의 노력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부었다. 홀로 다듬어 왔던 날개를 활짝 펼쳐보였다. 캐스팅 관계자도, 브랜드 디자이너들도 꽤나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야속하게도 삶은 영현씨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최종피팅 단계에서 디자이너의 의상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했다. 디자이너의 이상향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경주마 같은 삶에 처음 겪어 보는 좌절이었다. 쓰디쓴 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그간 꿈에 취해 보지 못한 현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영현씨의 모습&nbsp;ⓒ투데이신문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영현씨의 모습 ⓒ투데이신문

하나둘씩 정리해야만 하는 현실의 짐

모아둔 돈은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유럽생활을 지속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아끼고 아껴도 소용 없었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지출이 뼈 아팠다. 상위 1%의 모델이 아니었기에 영현씨는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온 몸으로 안아야만 했다.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이 국세청으로 부터 전달 받은 ‘2014∼2018년 업종별 연예인 수입금액 현황’ 자료에 따르면 모델은 2018년 8179명이 866억2900만원을 벌었고 1인당 1059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모델 업종에서 상위 1%(2018년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의 수는 81명. 이들이 신고한 총 수입금액은 398억6300만원이다. 1인당 평균 수입금액으로는 4억9214만원인 셈이다.  상위 1%의 소득을 제외한 나머지 99%의 소득은 467억 6600만원. 전체의 99%는 1인당 평균 약 577만원 가량의 연수익을 보인다. 이를 월로 환산하면, 약 48만원 돈이다. 상위 1%가 전체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연예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조사 결과다.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입에서 그치지 않는다. 남자라면 누구나 해결해야하는 군복무의 문제도 남아있었다. 못 본 채 했던 현실이 어느새 영현씨의 코 앞까지 나타났다. 자신을를 빤히 보고 있는 현실의 눈초리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영현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쌌다.

꿈만 같던 시간이 흐른 지금, 영현씨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또 생계와 꿈을 위한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의 하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기적인 피팅모델 촬영과 중고 의류 판매까지. 이렇께 까지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 다시 유럽 무대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영현씨는 가파른 현실의 낭떠러지 앞에서도 패션 모델이라는 꿈을 놓치지 않았다.

한 청춘이 꿈을 이루기 위해선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재능이 있어도 현실이라는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탓에 자그마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렸던 그다. 이토록 버거운 현실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영현씨는 아주 짧고 명확하게 대답해 보였다. 

“그냥 제가 재밌는거 하면서 즐겁게 살고싶어요. 그게 다예요.”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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