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 저자 전유경 간호사

쉼없는 열악한 공간서 반년 간 일해
사실혼 관계 검사자는 진료 못 받아
디지털 소외 계층 지원 부족도 느껴
대가 없는 따뜻함 넘치는 곳이기도

&nbsp;'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의 저자 전유경 작가의 책과 굿즈인 스티커 ⓒ투데이신문<br>
 '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의 저자 전유경 작가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현정 기자】 코로나와의 사투가 한창이던 지난 겨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는 임시 선별검사소가 차려지고 6명의 의료진이 업무를 시작했다. 의료진 6명에게 던져진 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신규 업무였다. 그마저도 담당 공무원이 사업 시작일에 맞춰 힘겹게 마련된 것이다. 당시 체계가 잡히지 않았던 만큼 검사소 안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세부적인 규칙 같은 것은 의료진이 스스로 만들어가야하는, 그야말로 다이내믹 탑골 검사소였다.

간호사 전유경은 그 코로나 최전선에서 일하던 의료진 중 한 명 이었다. 그는 종로의 탑골공원 앞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찬바람과 함께 밀려드는 사람들을 검사했고 따뜻한 봄이 오자 방호복을 벗었다. 반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 동안 그는 엔데믹에 맞서면서 오롯이 시간을 버텨냈다. 때로는 사람에 지치기도 하고 사람에 울고 웃었던 그 시간들을 <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의 저자인 전 간호사를 만나 들어봤다.

&nbsp;선별검사소 안내하는 전유경 작가&nbsp; ⓒ투데이신문
 선별검사소 안내하는 전유경 작가  [사진제공=전유경 작가]

Q.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를 쓴 간호사 전유경입니다. 선별검사소에서 신속 항원 검사 업무를 하면서 에세이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기회를 얻어 ‘선별검사소 간호사의 일기’를 출간했습니다. 현재는 독립서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Q. 선별검사소 의료진은 코로나 영웅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전 간호사님도 우리들의 영웅 아닌가요.

코로나 영웅이라는 호칭은 코로나가 처음에 터졌을 때 대구로 봉사 갔던 사람들에 한해서라고 생각해요. 저한테는 과분한 칭찬입니다. 비록 대가를 받고 일했지만 현장에서 저한테 고맙다고 해 주시는 분들이 꽤 계셔서 감사했어요. 예를 들어 기부천사처럼 박카스 한 박스를 주셨던 분도 계셨고, 겨울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간식을 주고 가신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 것들을 통해 대가 없는 마음 씀씀이 같은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Q. 선별검사소에서는 언제부터 일을 시작했나요.

일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20년 겨울 때 부터였습니다. 당시 서초구 보건소에서 계약직으로 잠깐 일했었어요. 그러다 2022년 초쯤 종로구 보건소로 옮겼습니다. 서초구에서 선별검사소 일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손쉽게 지원했던 것 같습니다.

Q. 선별검사소 업무는 야외에서 진행돼 추위나 더위 등 여러 고충이 있었을 거 같은데요.

겨울에는 천막 안에 열 선풍기 틀어놓고 사람들 맞이하면서 검사를 하는데 한 명 한 명 검사할 때마다 알코올 젤로 손 소독을 해야 합니다. 근데 그 알코올이 빠르게 기하돼 손이 얼어버립니다. 그럼에도 검사는 쉬지않고 계속해야 하니 쉽게 지치더라고요. 겨울에는 그게 좀 힘들었죠. 그리고 검사할 때 입는 옷이 플라스틱 재질인데 날이 풀리니까 온실 효과처럼 몸 안에 열을 가둬두는 거예요. 봄이 되니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처럼 갑갑해서 숨쉬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인 전유경 작가  [사진제공=전유경 작가]
방호복을 입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인 전유경 작가 [사진제공=전유경 작가]

Q. 책에서 선별진료소에 온 사람들 중 사실혼 관계에 있는 검사자가 진료를 받지 못한 에피소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가족의 정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는데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라는 책에서 저자인 황선우씨랑 김하나씨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같이 살고 있더라도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라서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것을 보고 불합리하다고 느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비슷한 상황을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법적 부부가 아닐 뿐 실질적인 반려자인데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게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Q. 사회적 약자인 분들은 코로나에 대응하기가 일반인들보다 힘들 걸로 예상되는데 이런 걸 느꼈던 사건이 있었나요.

모두에게 코로나는 찾아왔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약자인 그리고 디지털 문화에 소외된 사람들은 특히나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던 게 지난 3월에 확진자가 폭등했을 때 빠른 시스템을 위해서 디지털로 일처리하는 게 늘어났을 때였죠.

그때 2G 폰 쓰는 노인분들이 참 많이 오셨었거든요. 독신인 한 할아버지가 신속항원 검사가 양성이 나왔는데 PCR 검사까지 받게 한 후에 집으로 가라고 저희가 안내를 해드렸어요. 근데 다음 날에 그분이 자가격리 제도를 이해 못하시고 또 검사를 받으러 오신거에요.

(이미 양성 판정을 전날 받았는데) 집에서 격리하셔야지 여기 왜 오셨냐고 물으니 양성 확인서 받으러 왔다고 하시는 거죠. 집으로 돌아가서 자가격리 하시기를 권유하니까 “나 집에 약 지어줄 가족도 없는데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라며 울분을 터뜨리셨어요.

외로움에 울부짖는 할아버지의 몸부림을 보던 공공근로 선생님이 어깨에 팔을 둘러서 그분을 달래며 진정시켜드렸어요. 현장에 있던 저희 의료진도 그 모습에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노인분들 중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코로나19 검사는 QR 코드로 전자 검진을 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스마트폰으로 진행되니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어도 스마트폰을 어려워하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에게 비대면 진료를 가르쳐드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죠. 디지털에 문외한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게 있어요.

Q. 지금 이야기도 그렇고 처음 겪는 팬데믹 상황이다보니 현장에서 어려웠던 점 많으셨을 거 같습니다. 

부모님이랑 같이 온 자폐성 장애를 가진 검사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몸부림을 치면서 검사 거부하자 의료진들은 팔다리를, 가족들은 머리를 잡아 겨우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장애인분이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 혹은 그렇게 소통이 안 되시는 분이 오면 대응할 수 있는 마땅한 제도나 지침이 있지 않아 현장에서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희도 이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과 여러 가지 제한돼 있는 상황들이 많아 안타까웠죠.

선별진료소 업무 중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핫팩을 등 뒤에 붙인 모습 [사진제공=전유경 작가]
선별진료소 업무 중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핫팩을 등 뒤에 붙인 모습 [사진제공=전유경 작가]

Q. 본업은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하고 진행하는 업무인데 그 외의 검사자 응대하는 업무까지 도맡아 했다고요.

네 맞아요. 그것까지 의료 인력들이 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공공근로하시는 분들이 따로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분들도 사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 게 아니고, 3개월마다 바뀌는 계약직이었거든요. 업무 숙지 안 하고 그냥 일하러 오신 분들도 계셨어요. 그러다 보니 검사자 응대까지도 의료 인력에서 맡게 돼 더 힘들었습니다. 

Q. 현장에서 개선돼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꼈던 게 있다면.

신속항원검사가 도입된 것부터 검사의 의미가 있나 생각했어요. PCR검사가 한 건당 10만원이어서 검사자가 비용 부담이 많이 되긴 하지만, 신속항원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려면 바이러스량이 PCR검사보다 약 천 배 정도가 더 필요합니다. 만약 음성이 나왔다 해도 양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검사하는 장소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환기도 잘 안 돼요. 찝찝하고 비위생적인 그 공간에서 이 일을 한다는 게 죄책감도 많이 들었죠. 천막 안에는 환기시설이 없어서 저희가 시간이 날 때마다 바람이 지나가게 천막을 걷는다던가 알코올 스프레이를 뿌리곤 했거든요. 위생관리라고 하기엔 역부족이었죠. 그런 면에서 선별검사소 보다는 큰 병원이 훨씬 사정이 낫습니다. 최소한 큰 병원들은 애초에 환기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Q. 묻기 조심스럽지만, 여성으로서 현장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들도 있었을 텐데요.

신속 항원 검사를 설명할 때에는 불편한 하얀 방호복을 입어요. 그날 업무가 끝나고 방호복을 벗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직원이 “옷 벗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더군요. 순간 불편함을 느꼈지만 어정쩡하게 넘어갔습니다. 그 후에도 비닐 가운을 입은 저를 보면서 “섹시하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당시에는 대처 방법을 잘 몰라서 “이게 좀 예쁘죠”라며 이렇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계속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일하는 분께 도움을 받아 불쾌감을 전했습니다. 물론 변명만 들었습니다. 후에 저희 검사소 담당 공무원님한테 이러한 일을 어렵게 얘기했고, 다행히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또 검사하는 상대가 젊은 여자라는 걸 아는 순간 태도가 좀 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의료진에게 화낼 때 무서웠던 적도 많았고요.

Q. 업무 중 간호사님도 코로나에 걸리기도 했다고요.

네. 일하는 중에 갑자기 사람들이랑 말하는 것도, 서 있는 것도 힘들더군요. 그래서 PCR 검사를 받았고 코로나 확진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확진 첫째날 곧장 집에 돌아와 방 안에만 누워 있었는데 열이 갑자기 엄청 치솟아 오르더군요. 둘째 날부터는 갑자기 코가 엄청 매워서 숨만 쉬어도 리스테린을 들이 붇는 느낌이 났어요. 다섯째 날부터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때가 코로나19 확진자가 치솟을 때인 응급 상황이라서 의료진은 겨우 3일만 쉴 수 있었거든요. 그나마 저는 일요일이 껴서 나흘 쉬고 월요일부터 나갔어요. 하지만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아 목소리가 잠겨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힘들고 검사받는 사람도 힘들고 그랬습니다.

Q. 정부에서 무료 신속항원검사를 중단하면서 선별검사소에서의 업무도 끝이 났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선별검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2주마다 한 명씩 잘렸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늘 존재했어요. 당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Q.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별검사소는 마치 작은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저에게는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문제들이 도처에 산재하고 완벽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여전히 ‘정’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Q. 선별검사소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을 때 주변 분들,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고생 많았다는 반응이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또 여러 세대에게 널리 읽히면 좋겠다고 한 독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Q.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저는 선별검사소 경험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의 삶에도 공명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약자들이 많잖아요. 장애인도 그렇고 노인분들도 그렇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봐 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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