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윤리의식 탓에 여성은 임상시험 배제
백신·심장병도 여성 ‘뒷전’…남성 몸 ‘표준’ 삼아
‘성별 고려’ 성차의학 등장…문제의식 수면 위로
여성 보호에 가려진 생물학적 다양성 고려돼야

우리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 즉 성별에 따라붙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젠더 감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마케팅에 나섰다가 기업의 평판과 이미지가 무너지는 사례가 잦아 젠더 이슈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 전반에서는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그로 인한 피해 사례가 산적해 있다. 이처럼 남녀 간 전반적인 불평등과 격차 등은 현대사회의 숙제처럼 남아있다. 이제 소비자‧기업‧정부 등 모든 경제 주체가 젠더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갖고,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산업 전반에 깔려있는 젠더 차별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조명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 문제는 무엇이고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탐색해봤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투데이신문 김효인 조유빈 기자】 “유전의 법칙에 따라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 성공한 작가와 예술가, 과학자 중에 남성이 많은 것이 그 증거다”

이는 진화론의 창시자이자 ‘종의 기원’을 집필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발언이다. 이러한 발언이 있은 지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별을 둘러싼 편견은 여전하다.

흔히들 대중은 과학에 대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실제 이성적인 판단이 없이는 과학의 필수 요소인 엄밀한 방법론적 절차를 따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오랜 편향적 시선이 깃들어 있다. 생물학에서 여성을 바라볼 때 여성은 에스트로겐 등 고유 호르몬의 영향을 받으며 특히 월경과 임신, 출산 등으로 인해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여성이 모성적이고 정서적이며 주관적인 특성을 가졌다는 편견에 힘을 싣게 됐다. 결국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영역보다는 정서적이고 부차적인 영역에 적합하다는 범주화를 마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700년대 이전에는 남성만이 기본 성으로 인정됐으며 여성은 그저 열등한 존재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며 재생산 노동, 즉 요리나 육아 등 무급 가사 노동을 할 존재의 역할이 절실해지자 여성의 종속성은 강화됐다. 그러면서 감히 공부를 하려 하거나 남편에게 불복종하는 여성 등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성역할에 저항하는 여성들은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거나 고문과 같은 치료를 받기도 했다. 

실제 여성은 ‘히스테리(Hysteria)’라는 병을 갖고 있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한 히스테리는 정신적·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증이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히포크라테스 또한 그의 의학 저서에서 히스테리를 자궁의 병이라고 정의했다. 또 플라톤은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여성이 오랫동안 성생활을 못 한다면, 자궁이 스스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골반 안쪽에서 탈출해 다른 장기에 손상을 입힐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은 “성취를 위한 어떤 여자의 어떤 시도도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했으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여자는 ‘몸만 큰 아이’로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 되는 존재”라고 언급했다. 

이를 비단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수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남녀 성별에 대한 과학·의학계의 오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심장병이나 골다공증처럼 보편성을 가진 질병에 대해 특정 성을 우선으로 연구한다든지, 오로지 남성의 기준으로 약이나 백신을 만드는 것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상한 점은 남녀가 유별(有別)하다는 편견은 굳건한 상황에서, 어디까지나 여성은 남성이라는 표준에 끼워 맞춰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여성이 배제되는 사례가 반복된다면 결국 남녀 모두에게 실질적인 피해로 작용할 수 있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백신도, 심장병도 여성 배제…남성 표준에 맞춰지는 의학 시계

통상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 전에 시행되는 전임상시험, 즉 동물시험에서 사용되는 쥐의 성별은 수컷이다. 암컷 쥐의 경우 생리작용 등에서 좀 더 복잡한 경우가 많기에 연구자의 편의성을 고려한 선택이다. 문제는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 질환에서도 여전히 수컷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암컷에 대한 실험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여성 또는 암컷이 걸린 병에 대한 진행 경과의 지식 또한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미국 국립보건원은 지난 2014년부터 쥐를 이용한 동물시험을 할 때 쥐 성별의 균형을 맞추는 규정을 추가하기도 했다.

통상 과학과 의료 분야는 객관적인 분석과 실험을 거쳐 결과를 도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분석과 실험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성별 차이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아 오류가 발생하는 일도 많다.

여성과 심장질환의 관계가 그 좋은 사례다. 흔히 심장질환은 ‘남성 질환’으로 간주됐기에 남성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결과를 모델로 진단 및 그 치료 방식이 마련됐다.

1990년대에 제기된 이론인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이 심장 질환을 막아 준다”는 주장 또한 해당 논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협심증은 미국과 유럽 여성의 사망 원인 1위로 꼽힌다. 

실제 독일 베를린젠더의학연구소 페라 레기츠차그로세크 교수는 2011년 “심장 질환 진단법이 남성에 맞춰져 있어 여성 심장 질환자의 경우 오진율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2018년 영국 리즈 대학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장마비를 일으킨 여성은 남성과 비교했을 때 오진 확률이 50%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심장병 전문의 크리스 게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8200명의 여성들이 그저 남성이 받는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즉 남성의 실험 데이터가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됨으로써 여성들은 치료 시기를 놓치고 병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는 백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백신 부작용 사례의 79.1%는 여성이다.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팔락시스 또한 대부분 여성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됐다. 

또 미국 워싱턴대 연구팀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한 18~30세 여성 3만9129명을 대상으로 백신 부작용에 대해 분석한 결과, 대상자 중 42.1%가 백신 접종 후 생리량이 증가했다. 아울러 폐경기에 있는 여성 중 66%애서는 자궁 출혈이 발생했다. 

실제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후 이상자궁출혈, 생리불순 등 월경장애를 겪어온 여성들이 다수 발생했다.

광양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이모씨는 “백신 접종 이후 생리가 끊겼고 주기가 돌아오는 데 3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40대 여성 조모씨도 “백신 맞고서 원인 모를 하혈을 계속 해서 산부인과를 두 달 넘게 다녔다”고 증언했다.

질병청에서도 빈발월경 및 과다출혈월경 등 여성질환과 백신에 대한 인과성을 어느정도 인정했다. 예방접종피해보상전문위원회는 지난 8월 제15차 보상위원회를 열고 해당 질환들을 ‘관련성 의심 질환’에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부작용이 다수 발생하는 배경으로는 남녀가 생물학적 면역 반응에 차이가 있음에도 임상시험에서 성별에 따른 투여량이나 부작용 등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목된다. 결과적으로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의학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볼 수 있다.

과학기술학을 연구하는 동아대학교 임소연 교수는 “보통 사람들은 과학 지식을 객관적인 과정 속에서 발견했다고 믿고 있지만 연구자가 국가‧문화‧제도‧정책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우리는 그 객관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며 “과학은 사회의 성차별, 젠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암컷이나 여성에 대한 연구는 수컷과 남성에 비해 고려 요소가 많다는 이유로 비효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하면 여성의 몸에 대한 독립적인 연구 부족은 결국 남녀 모두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에 데이터가 쌓여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질병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결과 해석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예방의학 전문의이자 국제백신연구소IVI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는 이철우 박사는 “임상시험 수행에서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다소 적을 수 있다”며 “그러나 이는 연구자의 의지라기보다 연구에 요구되는 선별기준을 충족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백신 부작용 사례들의 경우 실제 부작용의 발생률 외에도 부작용 인지율, 보고율 등 다양한 인자가 영향을 준다”며 “이에 결과 해석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br>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모체 위험하니 임상시험 제외”…약자 배려가 되레 피해로?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약물 등을 개발하기 위한 인체 연구는 당연하게도 남성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중에서도 신체 건강한 20대 남성은 제약사 임상시험에서 가장 선호 받는 집단이다.

반면 여성을 배제한 연구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변수를 통제하는, 관리 편의성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연구 기조가 외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데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나치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인체실험이 드러나면서 사람을 연구할 때는 그 연구 대상자를 보호한다는 내용의 윤리 원칙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1947년 수립된 ‘뉘른베르크 강령’이 대표적이다. 총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해당 강령의 첫 번째 조항은 ‘인간 대상 실험 대상자의 자발적 동의는 절대적으로 필수’라는 부분이다.

기원전 5세기에 작성된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의사의 성실성을 강조했다면, 2000년이 지나 정립된 뉘른베르크 강령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다.

그런데 1962년, 결정적으로 여성의 임상시험 참여율을 떨어뜨리게 되는 ‘탈리도마이드’ 부작용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57년부터 약 50개국에서 판매된 입덧 완화제인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으로 인해 1만 명 이상의 영아가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는 피해가 발생했다. 

수많은 영아의 희생이 이뤄진 해당 사건으로 인해 의학계에서는 임산부와 태아의 건강 취약성에 대한 경각심이 일게 됐다. 주목할 점은 해당 약물이 입덧 완화제로 쓰였던, 사실상 여성 전용 약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동물시험만 진행됐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여성은 물론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발생한 피해였지만, 당시 의학계는 당장 발생한 여성과 영아의 피해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1970년대 초에는 경구피임약 등 여성호르몬 계열 약품의 치명적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1977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약물을 규제하는 권한을 확대하는 한편 임산부와 가임여성을 임상시험에서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결국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 피험자는 성인 남성으로 한정되는 결과가 발생했다.

역설적인 점은 임상시험 데이터 부족 등으로 영아와 여성에게 피해가 발생한 경우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어야 하지만 되려 여성이 연구에서 배제됐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기본 성인 남성이 아닌 여성이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돼 여러 연구에서 배제됐다면, 이제는 여성 모체와 태아의 ‘보호’를 위해 연구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또 서양에서는 주로 백인 성인 남성이 기본 임상시험 대상으로 설정되기에 라틴계 인종이나 아프리카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2014년부터 미국국립보건원(NIH)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뿐 아니라 동물과 세포를 대상으로 한 전임상시험에서도 성별 비율을 맞추도록 하고 있다.

실제 한 제약회사 관계자는 “임산부의 경우 윤리적인 이유로 제약사에서 임상시험에 참가시키지 않으려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 또한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 위험을 부담하려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아무래도 가임기 여성의 경우에도 임신을 하게 되는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어 연구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20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심리학 및 통합 생물학 어빙 저커 교수의 연구에서도 남성 중심의 임상시험에 기초해 여성의 약물 처방에 획일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해당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이 같은 양의 약물을 투여받았을 때 여성은 심장질환, 두통, 발작 등 부작용을 2배 가까이 많이 경험하며 이는 보통 사람들이 흔하게 처방받는 약물에서도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전문가는 이처럼 ‘보호’를 위한 연구 제외는 장기적으로 여성의 건강을 배제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임소연 교수는 “임신한 여성의 경우 모체와 태아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임상시험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가임기 여성의 혹시 모를 부작용을 막기 위해 배제된다”며 “그러나 이런 기조가 이어진다면 결국에는 진정한 보호가 아닌 건강에서도 배제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 해부학 책 등을 보면 호흡기, 소화기, 심장 등 인체기관을 설명할 때 남성의 몸이 표준형으로 나오는 반면 여성의 몸은 자궁 등 생식기관을 설명할 때만 나온다”며 “남성의 몸을 기본으로 하는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여성의 몸은 그저 생식기관의 차이만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연히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있는 만큼 약물 치료에도 다르게 반응한다고 짚었다.

임 교수는 “남성과 여성의 DNA는 대부분 동일할 수 있지만 장기 크기부터 신체 구성까지 성별 간 생물학적 차이는 매우 크다”며 “평균적으로 남자들은 더 무겁고 큰 근육량과 두꺼운 피부를 가진 반면 여성은 보통 더 작고 체지방이 10% 더 많으며 조절되는 호르몬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또 “성별 간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점은 약물 치료에도 모두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의 경우 높은 체지방으로 인해 몸에서 약물 성분이 제거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간과 신장이 작아 처리 시간도 더 길다”며 “여성은 단순히 몸집이 작은 남성이 아니기에 기계적으로 덩치에 맞춰 약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여성 뿐 아니라 남성 또한 성별 차이에 대한 편견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흔히 여성형 질환으로 알려진 골다공증 사례가 대표적이다. 보편적으로 폐경기 여성에게 발병 위험도가 높다고 알려졌지만 미국과 유럽 골다공증성 골반 골절 환자의 셋 중 하나는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골절로 인한 결과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치명적이었지만 골다공증은 여성 질병이라는 편견 탓에 1997년에 남성 표본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해당 질병의 골밀도 판단 기준은 여성을 표준으로 이뤄졌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br>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조금씩 주목받는 젠더 의학…혁신과 기술에서 성평등 모색해야

이처럼 명백하게 성별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연구 단계에서부터 젠더 문제가 고려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존재해 왔다.

미국의 경우 국립보건원(NIH)은 1990년에, FDA는 1994년에 각각 여성건강연구실을 설치해 임상 연구에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반드시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여성 건강에 대한 자료가 축적됐고 우울증 등 다양한 질병에서의 성차 연구가 이뤄졌다.

또 2001년 미국 국가과학재단(NSF)은 과학연구에서 젠더 편견을 없애기 위한 체계적 펀딩인 ‘NSF 어드밴스 프로그램(NSF Advance Program)’을 전개했다. 2009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론다 슈빙어 석좌교수가 그간 과학 연구에서 남녀의 생리학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10년에는 NSF 심장학 관련 저널들이 투고지침을 개정해 역학 및 임상연구결과 보고 시 젠더 영향 보고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유럽연합(EU) 또한 2001년부터 다양한 젠더 혁신 방안을 고민해 왔다. 연구비 지원 시 젠더 이슈 고려를 의무화하고 중장기 과학기술계획에 여성 역할 증대를 위한 연구윤리원칙 개정 등을 추진했다. 또 약물 임상시험에서 젠더 고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국제연합(UN)은 2011년에 과학과 공학 연구개발 및 교육에서 젠더 영향평가 실시를 촉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5년 의학적 성차이를 연구하는 ‘성인지의학회’가 출범했다. 남녀 간 분명한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함에도 지금까지는 여성이 그저 작은 남성으로 여겨져 왔기에 여러 질환에서 여성을 위한 제대로 된 치료와 예방조치에 나서겠다는 취지였다. 

생물학적 여성,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의학적 차이를 연구하는 성차의학(性差醫學)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 연구팀은 암 판정 및 수술을 받은 환자 2983명의 기록을 분석해 남녀에 따른 위암의 병태생리학적 특성과 예후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 결과 여성 위암 환자의 비율과 예후 등 성별에 따른 다양한 병태생리학적 특성과 예후 차이가 밝혀졌다. 그간 남성과 여성의 위암 생존율과 발병 비율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여성 위암 환자는 발견이 어려운 ‘미만형 위암’ 비율이 남성보다 높고, 3기 이상에서 남성보다 예후가 나쁘며, 심뇌혈관 합병증에 의한 사망 위험이 높다는 점을 밝혀내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지난 2018년과 2019년에는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을 대상으로 ‘성차의학’ 선택과목 수업이 개설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통해 질병의 발생률이 남녀 간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례나 같은 발병률 남녀 간 임상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질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의학적 성별 차이를 연구하게 된다.

과학계에서는 이처럼 젠더 다양성에 기초한 연구 생태계가 조성돼야 궁극적인 사회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으로, 이는 성별과 젠더 차이를 인식하고 비교하는 연구 방법을 과학기술 연구에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과학기술 연구물에 남성 중심의 편향이 스며들어 있다는 지적과 함께 2009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국내에서도 성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016년 ‘특정 성별영향분석평가 연구보고서’를 통해 여성의 임상시험 참여율이 극히 낮음을 지적했다. 이에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의약품 임상시험에서의 여성 참여율을 높이고 성별 분석을 강화하라는 권고를 내린 바 있다. 

지난해 국회 본회의에서는 ‘성별특성을 반영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 일명 ‘젠더혁신법’이 통과됐다. 연구개발에 성별 특성을 고려하고, 기술영향평가를 할 때 대상기술의 성격을 고려해 성별 특성 분석을 반영하며, 과학기술통계와 지표 조사·분석에도 성별 등 특성이 반영되도록 했다.

지난 2020년에는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에서 ‘성과 젠더요소를 고려한 연구 가이드라인: 의생명분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이혜숙 소장은 “그간 남녀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남성이 대표되는 지식과 기술이 생산돼 왔다”며 “과민성 대장증후군 환자의 70%가 여성인데도 임상시험은 수컷 쥐만 대상으로 진행됐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결국 성별 차이에 따라 원인과 치료법에 대한 연구도 새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성과 젠더 차이에 주목해야 세계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객관적인 지식과 기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