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네 살의 막내딸 죽음으로 내몬 참사는 ‘인재’
너무나도 길었던 일요일…참사 하루 만에 주검으로
유가족들, 소통길 막혀…“함께 위로·공유할 여건 필요”
정치적 이용보단 희생자 추모·재발 방지 대책 우선
정부, 객관적 기구 설치·재난 대응 매뉴얼 만들어야
아직 많이 아프고 힘들어…국민들 함께 애도해주길

이태원 참사 희생자 故(고) 송은지씨의 아버지 송후연(가명)씨. ⓒ투데이신문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송은지씨의 아버지 송후연(가명)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2022년 10월 29일. 그날 은지씨는 절친한 친구인 민서(가명)씨와 함께 이태원을 방문했다. 더 정확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려고 한남동을 방문했다가 근처 이태원을 잠깐 들러 ‘핼로윈’을 체험하고자 했다. 그렇게 두 절친은 손을 붙잡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두 사람이 향한 이태원 해밀턴 호텔 부근에서 문제가 생겼다. 해가 지자 급속도로 인파가 늘어나 채 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정체가 시작됐다. 결국 거리 중간에 있던 그들은 좁은 골목까지 밀려났고, 은지씨는 군중에 휩쓸려 민서씨의 손을 놓쳐버렸다.

핼러윈 축제가 한창이던 이태원. 수많은 사람들로 앞뒤가 꽉 막힌 골목길에서 서로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던 찰나, 이태원 한 골목에서는 최악의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골목 안 참사 현장에서 가게 쪽으로 넘어진 민서씨는 극적으로 구조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은지씨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은지씨의 아버지 송후연(가명)씨는 그날을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했던 날로 기억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대화를 하고, 이미 독립해 따로 살고 있는 큰 딸과도 살갑게 통화했다. 그리고 주말을 맞아 외출한다는 작은 딸 은지씨와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송씨는 더 이상 작은 딸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10월 29일 이후로 아버지의 기억 속에 은지씨는 유달리 아름답던 스물 네 살, 청춘의 모습으로 멈춰버렸다.

송씨가 조심스럽게 보여준 사진에는 은지씨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축제가 즐거웠는지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그는 영락없는 20대 그 자체였다. 송씨의 카카오톡 메시지 창에는 아버지에게 케이크를 선물해주며 생일 축하해주는, 고양이 사진을 주고받으며 귀엽다 칭찬하는 사랑스러운 막내딸 은지씨로 가득 차있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158명의 목숨을 앗아간, 믿기지 않는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2주가 다돼갔을 무렵, 하늘의 별이 된 딸 고(故) 송은지씨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그는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며, 본보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사랑하는 딸을 추모하고 추억하며,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진상규명에 한 발자국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태원 참사 인근인 이태원역 1번출구에 추모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nbsp; ⓒ투데이신문<br>
이태원 참사 인근인 이태원역 1번출구에 추모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투데이신문

은지라는 사람의 이야기

Q. 이번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따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야말로 착한 딸이었습니다. 은지는 2녀 중 막내인데, 언니는 독립했고 작은 딸인 은지만 같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딸은 여느 20대 초반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몸매 생각하느라 다이어트한다고 밥을 안 먹곤 해서 걱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우리 딸이 원래 체구가 작고 말랐다 보니, 더 걱정돼 부모로서 ‘많이 먹고 살 좀 찌워라’고 투닥거린 것 말고는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습니다.

Q. 아버님께 은지씨라는 존재는.

큰 딸은 현재 독립해 신림동 쪽에서 자취를 해서 저희 부부는 은지와 함께 셋이서 아주 재미있게 잘 지냈습니다. 딸이 애교도 많고 싹싹했고,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다 보니 더욱 돈독했습니다.

같이 사는 저희 세 식구 전부 다 일을 합니다. 은지도 회사를 다니는데, 어떤 때는 집에 제일 먼저 귀가해서 외롭고 어두운 빈 집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다이어트한다고 밥도 안 먹고 방에 가만히 있곤 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그 어둡고 텅 빈 집에서 혼자 덩그러니 있었을 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애처롭고 미안합니다.

Q. 이번 참사 이후 어머님도 많이 충격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같이 지냈던 딸이어서 더욱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아내와 집에서 같이 일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아픔을 극복해나가고 있습니다.

Q. 따님과 24년 동안 쌓아온 추억들도 이젠 과거가 됐는데.

코로나19가 찾아오지 않은 5년 전, 은지와 같이 갔던 강릉 정동진 바닷가에서의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큰 딸이 모두 일을 하고 있어 단 둘이서만 여행을 갔는데, 그때 은지가 바다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당시 푸른 정동진 바다를 보며 좋아했던 딸의 두 눈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기억하는 은지는 바다를 참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친구들하고도 가끔 바다나 갯벌을 가서 놀고 오곤 했습니다. 해맑게 좋아하던 은지의 웃음이 가장 많이 떠오릅니다.

Q. 따님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생전 따님이 앞으로 이루고 싶었던 꿈은 무엇이었나요.

은지는 여의도에 있는 한 여행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생계에 뛰어 들 정도로 당찼지만, 가끔은 걱정됐는지 저한테 근로계약서 등을 보여주며 ‘이게 맞냐’, ‘월급 계산이 잘 된 거 맞냐’고 물어보곤 했었죠. 그때마다 저도 같이 고민 상담을 해주며 회사 생활을 응원했습니다.

은지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무언가 꾸미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잘했기 때문에 바리스타를 꿈꿔왔죠.

Q. 이번 참사로 은지씨 친구들도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날 이태원에 같이 갔던 친구 민서가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사고 당시 그 친구는 건물 쪽으로 넘어져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하반신에 10명이 넘는 인원이 덮쳐 다리를 크게 다친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파에서 몰린 두 사람이 서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민서의 말에 의하면 당시 두 사람은 한남동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8시경 근처에 있는 이태원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당시 화장실도 30~40분 기다릴 정도로 인파가 많았지만, 마스크를 벗고 맞는 3년 만의 축제라 두 사람은 구경하기 바빴고, 그러다 보니 사람이 제일 많이 몰리는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문제의 내리막길로 몰리게 됐고,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됐습니다.

민서는 딸의 마지막 행적을 궁금해하는 저희 가족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줬습니다. 특히 민서는 사람들에게 밀쳐져 넘어진 와중에도 은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의 다리 위로 넘어진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지 못해 딸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습니다. 결국 민서는 구급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도 주변을 둘러 은지를 찾아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기절하려고 하니까 계속 얼굴 위로 물 뿌리고...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저랑 다른 피해자들이 계속 기절 하니까 계속 뺨 때리면서 물 뿌리고 일어나라고 소리쳤어요. 어떤 사람이 저를 구조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리가 너무 끼어 있어서 안 된다고 얘기하니까 그럼 계속 정신이라도 차리고 있으라는 말을 계속 해줬어요. 그러다가 구급대원이 오셔서 저를 끌어내셨어요. 저는 구급대원한테 다리를 못 움직여서 아예 절단해야 되는 줄 알고 다리를 못 쓴다 말씀드렸더니 들것 갖고 오셨고, 이후 바로 구급차로 옮겨지는 바람에 은지를 찾을 경황이 없었어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친구 증언 中 -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 앞에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투데이신문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 앞에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투데이신문

‘그 날’의 이야기

Q. 사태의 심각성은 언제 인지하셨는지.

그날 밤 저는 일찍 퇴근해서 9시도 안 돼 바로 잠을 잤고, 아내는 TV를 보다 잠에 들었습니다. 자기 전 저녁에 은지가 집에 안 들어오기에, 가끔 친구 집에서 자거나 밖에서 노느라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잠을 청했습니다. 딸이 외출하기 전 아내에게 홍대입구 역 근처에서 전자제품 가게를 구경 갔다가 친구를 만날 것이라고 해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에 갔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던 아침 6시경 전라도 광주에 사는 친척이 뉴스를 보고 걱정이 됐는지 ‘서울에서 난리가 났던데 애들은 괜찮냐’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서야 저희도 다급하게 TV를 틀고 뉴스를 봤습니다. 이미 TV에서는 이태원 압사 현장이 보도되고 사망자 수가 집계되고 있었죠. 저는 큰 딸과 작은 딸에게 급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둘 다 전화가 안 돼서 초조했는데, 몇 분 뒤 큰 딸은 전화가 와서 자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작은 딸인 은지가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처음엔 아닐 거라고 믿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점점 예감이 좋지 않아서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아내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고 몰래 집 밖으로 나가 경찰을 만났고, 은지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해줬습니다. 당시에는 현재 신원 파악된 사망자 명단 중 딸의 이름이 없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경찰들의 연락을 기다렸고, 초조한 마음에 홍대를 가 딸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전 7시 반쯤 담당 경찰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를 해온 경찰이 머뭇거리며 말하길 은지의 휴대전화 최종 위치가 이태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정신이 멍해지고 아득해지기 시작했습니다.

Q. 따님은 참사 당시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나요.

그 사실조차 알 수 없어서 너무나 초조했습니다. 은지의 최종 위치를 듣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경찰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150여명의 사망자 중에 신원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 10명이라고 하더군요. 그중 남자가 8명, 여자가 2명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에게 인상착의 등을 설명해줬는데,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일단 안심이 먼저 됐습니다. 경찰이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부상자가 있다고 말했고, 이에 저희들은 차라리 은지가 다친 상태라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 믿고, 부상자 명단에 딸이 있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을 알려 달라고 경찰에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경찰의 대답은 병원 측에서 부상자를 찾는 과정에 협조를 안 해준다였습니다. 경찰은 이태원 인근 병원에 부상자들이 분산됐는데, 그 병원마다 일일이 물어 부상자 여부를 확인해야 해서 자신들도 힘들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이런 급박한 상황임에도 왜 그렇게 일처리를 하냐고 따져 봐도, 경찰 측은 가족들이 직접 병원 측에 전화하는 게 더 빠를 것이란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신촌 세브란스, 이대 목동, 순천향대 병원 등 일일이 전화했습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는 신원 파악이 된 사람들만 환자로 받고 있어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신분 확인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지는 사망자인지, 부상자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말이었죠.

결국 저희는 너무 답답해서 한남동 주민센터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실종자 접수를 했습니다. 또 혹시 몰라 주민센터에서 다시 한번 사망자 명단을 확인했는데, 그곳에서도 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후 2시경 부상자가 제일 많이 있다는 이대 목동병원을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은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저희에게 해당 병원에서는 부상자 명단에 자녀의 이름이 없다면 장례식장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차마 장례식장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을 뒤로하고 집에 가서 연락을 마저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오후 4시 반쯤 관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경찰들이 은지로 추정되는 사진을 받았다며 이를 보기 위해 당장 경찰서로 오라고 했고, 이를 들은 저희는 얼른 경찰서로 향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경찰서에서 다시 온 전화가 왔습니다. 담당 경찰관은 경찰서가 아닌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 장례식장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은지의 신원 파악이 완료됐으며, 현재 장례식장에 안치돼 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장 평택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저는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옆집에 사는 처남이 급하게 와 운전을 도와줬고, 저희 부부와 함께 평택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렵게 도착한 그곳에서 기다렸던 우리 딸, 은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 송은지씨의 유품. 치마, 지갑, 가방 등이다. ⓒ투데이신문<br>
고 송은지씨의 유품. 치마, 지갑, 가방 등이다. ⓒ투데이신문

Q. 유품은 전달받으신 게 있는지요.

장례를 치른 뒤 용산구에 있는 유실물 센터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은지가 당시 입었던 치마, 양말 한 짝과 스타킹, 신발 그리고 가방을 찾아서 왔습니다. 가방 안에는 지갑 등 소지품이 거의 그대로 있었습니다. 지갑 안에는 돈부터 신분증까지 그대로 있었고요.

하지만 휴대폰을 비롯한 재킷, 상의 등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바로 신분증이 든 지갑이 있었는데, 일요일 오후까지 신원파악이 안됐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긴 시간 동안 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럽고 답답했습니다.

Q. 딸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하셨을 때 감정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셨을 거 같습니다. 

사망자 수가 점점 증가하는 뉴스 보도가 나올 때에도 점점 걱정이 커졌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딸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후 담당 경찰관에게 은지의 핸드폰 최종 위치가 이태원 현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일말의 희망을 계속 걸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경찰이 관할서로 오지 말고 바로 평택 장례식장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전화 한통에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긴 시간 동안 희생자 명단에 없고, 신원 불상인 부상자가 많다는 사실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었는데, 정말 은지가 저희 곁을 떠난 것이 맞는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내는 심한 충격에 거의 실신하다시피 했으며 전 허공만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처남은 가끔씩 소리 없이 눈물을 보였지만 저희 부부를 위해 끝까지 운전을 이어 나갔습니다. 평택 장례식장에 가서도 안치된 희생자가 확실히 내 딸인 게 맞는지 계속해서 관계자들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들이 ‘거의 확실하다’고 답변했음에도 저는 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계속 부정했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도 여러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은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주한 은지는 피투성이에 멍이 든 모습이었고, 목 부근에 찢어진 상처도 있었습니다. 그런 딸을 보고 난 저희 가족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경황이 없어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경찰에게 항의했습니다. 주소지가 서울인데 어쩌다 이 먼 평택까지 왔느냐고요. 경찰은 서울에 있는 장례식장이 부상자, 희생자들로 꽉 차 무작위로 오게 됐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답답하고 무책임한 답변 아닙니까. 여기 오기까지 우왕좌왕하며 소비한 시간이 너무나도 비통했습니다.

그날 저는 사랑하는 딸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평택에서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은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너무나도 길고 긴 일요일이었습니다.

남은 건 진상규명 

Q. 현재 유가족분들이 바라는 건 정확한 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저는 이번 참사의 원인을 ‘인재(人災)’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경찰, 용산구청 등은 참사 당일인 29일 핼로윈을 맞아 이태원에 사람이 몰릴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전날 금요일에도 이태원 거리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당연 토요일에는 더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는 걸 과연 몰랐을까요.

보도에서 알려졌듯, 이를 용산 경찰서를 비롯한 서울경찰서 측에서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정보과 관계자는 이태원 인파 우려에 대한 문서를 지우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대응할 수 있던 사고였는데, 이를 보는 정부의 태도가 안일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시 경찰 인원이 용산이나 삼각지 인근에 윤석열 대통령 퇴진 관련 집회에 집중 배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된 바 있는데, 이 역시 자세히 살펴보고 규명해야 할 문제입니다.

더욱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할 행정안전부, 그리고 수장인 이상민 장관은 ‘정부가 파악하기로는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등 진실을 밝히기도 모자란 이 시간에 책임을 전가하는 소리만 하니, 저로썬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 근처에 국화꽃과 추모 글귀가 남겨져 있다. ⓒ투데이신문
이태원 참사 현장 근처에 국화꽃과 추모 글귀가 남겨져 있다. ⓒ투데이신문

Q. 현재 정부가 진행하는 진상규명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은지를 찾는 과정에서 제가 바라본 경찰, 소방, 병원, 구청 등은 너무나도 우왕좌왕했고, 혼란스러워 보였습니다. 일반 시민인 저도 그 모든 것을 느낄 정도로요.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였지만, 이를 대응할 제대로 된 매뉴얼조차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부에서 과연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참사가 발생하면, 관련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신속하게 운영돼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을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희생자 가족에게 직접 병원에 전화하라고 다그치지 않나, 유실물 센터에서도 제 아이의 유품을 찾으러 간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직원 어느 누구도 제가 누군지도, 챙겨가려는 유품이 무엇인지 확인조차 안 한 채 그냥 가져가도록 냅뒀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유품인데 혹시 다른 이가 가져갔을지,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것들이 당시 유가족이 마주한 현실이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컨트롤타워의 빈틈이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재난에 대한 대응이 제대로 준비되고 이뤄지지 않아 상황은 더 악화됐고, 대참사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더 안타까운 건, 앞으로도 이런 사회가 유지된다면 이 같은 참사를 앞으로 누구라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Q. 정치권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에 관한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희생자 본인이 없는 장례식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더불어 영결식에 초대가 되거나, 합동으로 이뤄지는 등 유가족을 위한 조치가 하나도 이뤄지지도 않아 답답합니다. 희생자의 이름, 유가족도 없이 정부 인사들만 다녀가는 장례식은 과연 누굴 위한 추모일까요.

현재 유가족들이 경황이 없다 보니 당장은 대규모 영결식을 진행하지 못하는 게 맞습니다. 다만 참사 발생 2주가 넘은 지금이라도 유가족들을 위한 위로의 자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생자의 이름, 얼굴 등 공개를 원치 않는 유가족분들이 있으시겠지만, 그 외 원하는 분들에 한해 선택적으로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경향을 떠나, 이 참사를 같이 위로하고 뒤이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봅니다. 이 같은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쉬쉬하고, 차단하고 은폐하는 이전 정부나 사회의 행동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한마디 더 보태자면, 일부 정치권에서 이번 참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들끼리 판단해가는 과정은 유가족 측에서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정치가 아닌, 목숨을 앗아간 사고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Q. 현재 유가족들끼리 소통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단 한 분하고만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구민 중 희생자가 나와, 그의 부모님들과 연락이 닿아 자주 연락하고 관련 소식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의 경우 희생자들이 어느 집단, 소속이 있는 것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황이고, 이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흩어져 바로 장례를 치르는 등 갑작스러운 일의 연속이다 보니 연락처를 교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나름 최소한의 인맥을 동원하고 연락처를 묻고 물었고, 이에 앞으로 몇 분과 연락이 닿을 것 같습니다.

참사 이후 서로 왕래가 없다 보니, 현재 유가족끼리의 연결망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유가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 1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nbsp;서울광장 합동분향소.&nbsp;ⓒ투데이신문
지난 1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서울광장 합동분향소. ⓒ투데이신문

Q. ‘이태원 참사’는 무려 158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입니다. 이는 세월호 참사와도 비교가 되는데, 세월호 참사는 현재까지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이태원 참사도 규명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데요.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현재 특검이니 국정조사니 말도 많고 특별수사본부(이하 특수본)를 꾸려 진상규명에 돌입했는데, 저는 그 특수본이 객관적인 기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이 사고를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기구를 따로 신설하는 것이 더욱 진상규명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기구에서 이번 참사를 다루고 수사하는 게 맞는 처사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희는 금전적인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정부가 참사의 원인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 진상을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단 하나입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나오면 책임을 지고, 이후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정부의 올바른 행보라고 봅니다.

Q. ‘이태원 참사’ 대신 ‘10.29 참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당사자가 빠진 이런 움직임들과 대응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당사자, 혹은 지명이 빠진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유가족들의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참사 명칭을 쉽게 바꾼다는 것이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Q. 마지막으로 국민이 이태원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면 좋겠나요.

이태원에 간 이들이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제 딸이 그날의 축제를 즐기러 간 것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죽음을 예상하고 일부러 이태원에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놀러 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무슨 보상금을 주냐는 등 참사 관련 악성 댓글을 볼 때면 마음이 너무나도 미어집니다. ‘이태원 압사 참사’는 충분히 누구나 당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아직 유가족들은 많이 아프고,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저희를 위해 국민들이 함께 애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송후연씨가 은지씨에게 남긴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 ⓒ투데이신문
송후연씨가 은지씨에게 남긴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 ⓒ투데이신문

Q. 하늘에 있는 딸에게 한 말씀해주신다면.

목이 메여서 차마 말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딸을 위해 쓴 편지를 공개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은지야...

깨끗하고 흠 없는 네 얼굴, 흰 피부에 짙은 눈썹, 곱게 넘긴 찰진 머릿결, 조그만하지만 잘 정리된 손톱에 손등..엄마, 아빠가 기억하는 너의 선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이태원의 그 황량한 도로 위에 가슴을 조여 오는 처절한 압박감에 너의 조그마한 심장은 터져버릴 듯 부풀어 오르고, 밀려드는 두려움과 공포감 속에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처절하게 엄마, 아빠를 불렀을 너를 생각하면 우리 가슴은 찢어졌다. 생명과 운명을 주관하시는 모든 신께서 바꿔주실 수 만 있다면 차라리 엄마가, 아빠가 그곳에 있겠다.

사랑하는 우리 딸 은지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엄마 아빠를 용서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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