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대학생 시절 동녘출판사에서 나온 <여자는 왜?>라는 책을 활자 하나하나 꾹꾹 눌러 읽었다. 초판 1쇄 발행일이 1991년 4월 10일이니 꽤 오래된 책이다.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읽어나가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겪는 구조적인 억압과 소외, 차별을 깨닫게 됐으니 말이다. 내가 남자라서 전혀 고민해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문제들이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에게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이다 보니 이래저래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도 읽었다.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성평등 의무교육도 받았고 페미니즘 활동가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혜택을 받으며 자라온 남성인지라 성인지 감수성이 예민할 수는 없었다. 마치 모의고사 문제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잘못됐습니다. 시정돼야 합니다.’라고 영혼 없이 답을 적는 고3 수험생의 느낌이랄까? 당위적 차원에서야 응당 동의하지만, 이게 나와 무관하지 않은 절실한 문제임을 체감하는 데에는 구체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바로 결혼이다.

나는 2009년에 결혼했다. 사회주의자를 남편으로 선택한 사람이니만큼, 아내 또한 진보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이며 무엇보다도 페미니스트이다. 결혼할 당시 아내는 신문사 기자였는데(지금은 아내도 작가다), 보수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주로 취재하다가 이상을 품고 소신껏 글 쓰고 강의하는 나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내는 종종 ‘단칸방 생활 각오하고 너랑 결혼했다’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난 그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서 가사노동과 육아노동 분담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 ‘관념’에만 머물던 것이 결혼 후 구체적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니 예측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가사노동 분담은 ‘설거지, 세탁물 개기, 화장실 변기 청소하기, 막힌 하수구 뚫기, 진공청소기 돌리기’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이러한 행위의 특성상 주기가 짧아 금세 다음 차례가 돌아왔다.

아이가 태어나 육아노동이 추가되니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갓난아이는 그저 예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면 알아서 어린이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4세 이전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 보니 그 지난했던 일들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똥오줌은 부모가 일일이 치워주는 것이지. 젖 먹이는 일도 고되다. 갓난아이는 한밤중에도 두세 시간마다 깨어서는 젖을 달라며 세상 떠나가게 울어댄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밤중 수유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몹시 당황했다.

새벽 두 시쯤 아기가 그 특유의 신경 곤두서게 만드는 주파수 대역으로 울어대면, 수면 상태를 유지하려는 몸뚱이를 억지로 이끌고 아기한테 가서 안고 달랜다. 냉동실 문을 열어 낮에 유축기로 짜 얼려놓은 모유 한 팩을 꺼낸다. 냄비에 물을 끓여 꽁꽁 언 모유를 중탕으로 녹인 후 젖병에 담는다. 아기에게 물리기 전에 내 손등 위에 한두 방울 정도 떨어뜨려 본다. 온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차면 더 데우고, 뜨거우면 찬물에 식힌다.

준비가 끝나면 아이에게 젖병을 물린다. 어이구 내 새끼! 먹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하다. 다 먹으면 바로 재우지 않고 트림시킨다. 한쪽 어깨에 가제 수건을 얹고 아이를 수건 쪽으로 세워 안은 후 등을 쓰다듬어 주다 보면, 제법 그럴싸한 트림을 한다. 가끔은 트림하다가 모유가 역류해 입으로 흘러나오는데 그때 가제 수건이 임무를 수행한다.

한참 자장가를 불러주면 어느새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다. 중간에 깨지 않도록(깨면? 도돌이표) 조심스럽게 눕힌다. 급한 불은 껐다는 안도감에 잠자리로 돌아가지만, 아기가 두세 시간 후에 젖이 필요하다며 어김없이 깰 확정적 미래를 잘 알고 있다.

다른 남자들은 힘든 육아에서 벗어나려고 직장으로 도피한다는데, 나는 작가라 일터가 집이다 보니 도피처도 없었다. 첫째와 둘째의 육아 기간은 우리 부부 작가의 글 생산성이 눈에 띄게 저하되는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어쨌든 대한민국 남편 평균치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는 내 모습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나르시시즘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런 나르시시즘의 가면 뒤에 존재하는 얄팍한 밑천이 드러나는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내면을 살펴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됐는데,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 2012년일 것이다. 당시 강의 일정이 많이 잡혀서 여유가 없다 보니 설거짓거리를 쌓아놓은 채로 강의를 다녀왔다. 연일 이어지는 일정으로 피곤했던지라 집에 와서는 소파에 누워 쉬고 있었다.

“왜 설거지 안 했어? 결국 내가 했잖아.”

피곤한 상태에서 아내의 문제 제기를 들으니 열심히 일하고 온 것, 그리고 평소에 가사와 육아에 참여한 것을 몰라주나 싶어 서운했다.

“요즘에 일이 많았잖아. 피곤해서 그랬어. 솔직히 나만큼 집안일 잘 도와주는 남편이 어디 있냐?”

내가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분담하더라도 대체로 아내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곤 했다. 그걸 알고 있었고 아내에게 항상 미안했는데, 그날따라 몸이 피곤해서인지 불쑥 이런 대꾸를 했다. 그때 부메랑처럼 돌아온 아내의 일갈.

“설거지를 네가 도와주는 거냐? 설거지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네 일이야!”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죽비 같은 한마디였다. 그렇구나! 설거지는 내가 아내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일인데. 결혼 후 가사노동 분담에 대해 아내와 의논하면서 설거지는 내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원래 아내 몫인 설거지를 ‘돕고’ 있을 뿐이며 이건 내 의무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자발적 봉사라고 은연중에 여긴 것이다. 한동안 이런 본심이 잘 은폐되었으나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이 되자 무의식중에 언어라는 형식을 빌려 드러나 버렸다.

그 본심이란 놈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며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그 안에는 나와 상대를 가르는 차별적 시선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좀 가혹한 비유를 들자면,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벤트를 열며 자기만족에 빠지는 재벌, 선거시기만 되면 시장통에서 꼬치어묵을 물고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유력 정치인, 저 ‘불쌍한’ 노동자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친히 기득권을 버리고 현장에 투신한다는 운동권 대학생의 기저에 깔린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나 할까.

이들의 내면에는 대상과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장벽이 존재하며 자신은 항상 그 장벽 너머에 서서 대상을 내려다본다. 설거지를 나의 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자를 도와주는 멋진 남자라는 착각에 빠져 가사와 육아가 실질적으로 자기 일임을 망각한 것이다.

장애인에게 장애우라는 시혜적 표현을 사용하는 게 적절하지 않듯이, 페미니즘은 우위에 있는 남성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여성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차별당하던 노비가 양반 세상을 뒤엎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선언이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가부장적 차별의 문제점을 깨닫게 된 여성들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분출되기 마련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정신적 노예 상태라는 증거 아니겠는가.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혜택을 입어온 남성의 관점에서는 그런 분노의 물결이 당혹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은 신분제가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양반의 그것과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다시피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은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차별을 지양하고 좀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성장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 발전의 순방향임이 명백하다. 오늘도 아내의 페미니즘 명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에서 읽었던 내용을 되새기며 역사 발전에 일조하는 마음으로 설거지와 청소 투쟁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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