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저자,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활동가
‘빈곤’의 공포, 소득과 자산보다 심리적 압박이 더 커
거리의 사람, 빈곤을 자기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사람
부자연스러운 ‘공간의 변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도시를 일궈 왔던 사람들이 자리를 뺏기는 비극 반복 않길
【투데이신문 서정인 기자】 서울의 허름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가다 보면 ‘재개발 추진’ 문구가 박혀있는 현수막을 흔히 볼 수 있다. ‘개발’은 사전적으로 토지나 천연 자원을 유용하게 만들거나, 지식, 재능, 산업,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여기 ‘개발’을 어떤 이들의 쫓겨남, 가난한 자들의 희생, 삶의 터전을 밀어내는 행위라고 해석하며 평등한 도시를 만들자는 주장을 펼치는 활동가들이 있다.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활동가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건물 높이만큼 길어진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 그림자에 스스로 빛을 비춰 사람들에게 이 흔적을 다시 보자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잊힌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12년간 활동하며 함께해 온 철거민, 노점상, 홈리스,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을 지난 10월 출간했다.
책 안에는 신계 강정희, 두리반 강종녀, 종로 김동선 등 그들이 쫓겨난 공간의 명칭을 이름 앞에 붙여 소개했다. 마치 본관이 그곳인 듯 그들의 정체성을 표하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공간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쫓겨났고, 희생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본보는 그들의 기억을 기록한 김윤영 활동가와 재개발의 중심인 신도시 용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이곳저곳 맛집이 자리 잡고 있는 장소, 파란 하늘과 맞먹는 높이로 뻗어 있는 고층 빌딩, 그리고 대통령실까지. 현재 용산은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곳이 누군가의 울부짖음과 고통의 중심이었음은 기억하지 못한다.
2009년, 불과 13년 전 남일당 건물에서 일어난 참사 현장 위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세워졌고, 어마어마한 자본의 힘으로 포장된 공간이 돼버렸다. 참사 당시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소멸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리는 도시 변화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꾸준히 밀려 나가고 있는 시민들의 희생을 좇으며, 김윤영 활동가와 용산역을 시작으로 ‘용산 다크투어’를 함께 했다. 그가 기록한 과거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다시 들춰보려 한다. 독자들도 동행해주길 바라며.
Q. ‘용산 다크투어’부터 이번에 출간한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까지, 활동가님은 터전에서 쫓겨난 이들의 흔적을 쫓아가 왔는데요. 취지에 맞게 함께 산책하며 인터뷰를 하려고 해요. 먼저 간단하게 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2010년부터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김윤영입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했고, ‘거리 홈리스 상담’을 하는 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빈곤사회연대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을 저희가 참여하게 됐죠. 그 프로그램은 철거지역을 방문하고 노점상, 거리 홈리스들을 만나서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는 빈활(빈민 지원 활동)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참여하면서 빈곤사회연대를 알게 됐고, 마침 졸업할 때쯤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가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활동가가 됐습니다.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어요.
Q.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결정은 쉽게 할 수 없다고 봐요.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하는데, 활동가로 살아야겠다는 큰 계기가 있었나요.
활동가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저희 엄마가 있어요.(웃음) 계속 고민은 했죠. 하지만 일반적인 직업을 갖는다면, 나중에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활동을 할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일 것 같아서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전공이 사회복지다 보니 복지 정책도 좋지만, 현장에 나가서 평등의 기반을 마련하는 게 확률적으로 좋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아등바등 살아봐야 언젠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죠. 이런 자기 이해애 기반해서 시작한 것 같아요.
Q. 이번에 출간한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제가 약간 ‘미련둥이’라 서울을 돌아다니면서 아직도 어떤 장소에만 가면 눈앞에 선한 장면들이 떠올라요. “이 건물이 생기기 전에는 뭐가 있었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장소들이 사라지니까 생각보다 기억도 빨리 사라지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기억하고 있는 쫓겨난 사람들, 거리에서 싸웠던 사람들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새롭게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장소를 재해석하기 전에,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남기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출간하게 됐습니다.
Q. 활동하고 있는 ‘빈곤사회연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기네요.
빈곤사회연대는 약 40개 단체의 연대체입니다. 참가 단체 중에는 철거민, 노점상, 장애인, 홈리스같이 빈곤 문제에 대한 단체들이 있고, 빈곤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으는 노동조합을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구성 있습니다. 종교단체도 있고요.
저희는 반(反)빈곤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연대활동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반빈곤은 빈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하기보다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면서 어떻게 하면 현재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을 의미해요. 시혜나 동정과 같은 처방으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빈곤을 발생시키는 사회 제도,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Q. ‘빈곤사회연대’라는 말이 조금 낯설기도 해요. ‘빈곤’, ‘가난’ 현재 대한민국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데, 활동가님이 생각하는 ‘빈곤’과 ‘가난’의 의미나 차이가 있을까요.
‘가난’은 보통 개인적인 처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고, ‘빈곤’이라고 할 때는 사회적인 결과에 관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섞어 쓰니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둘 다 소득이나 자산을 기준으로 얘기를 하죠. 보통 일정 수준의 소득이나 일정 수준의 자산 이하인 사람들은 빈곤층이라 하고 국제적으로는 기준 중위소득 50% 미만의 소득을 가진 사람을 빈곤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회마다 소득 수준이 다 다르니까 빈곤이 규정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한국에서는 한 달에 80만원 번다고 하면 빈곤층이지만 소득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은 거잖아요. 소득만으로 빈곤층을 나눈다면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사람마다 빈곤을 경험하게 되는 방식도 다른 것 같아요. 자괴감이라든지 사회적 낙인이라든지, 자존감 박탈 시민권의 축소 등 이런 것들도 사회적으로 빈곤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죠. 사람들이 자산이나 소득 수준이 상당히 있어 보이는 사람의 실패를 보면서 “‘빈곤’은 아니네”라고 쉽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급격한 추락으로 인한 공포나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심리적 압박들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빈곤에 대한 공포로도 볼 수 있는 거죠. 빈곤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결과물이에요.
Q. 빈곤사회연대에서 진행하고 있는 ‘용산 다크투어’기획 취지는 무엇인가요.
용산 다크투어는 용산 참사 13주기를 맞아서 2022년 1월에 처음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용산역 맞은편에는 2009년도에 용산 참사가 일어났었던 ‘남일당’ 현장이 있고, 축구장 70개 크기의 용산정비창은 약 50만m²의 철도 공공부지로 뒤쪽에 위치해요. 도시 공간에 일어났던 이전의 역사와 이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에 대해서 기억해보자는 취지로 다크투어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곳에 어떤 사람이 머물렀고, 왜 쫓겨 났는지, 그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에 현재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기억하면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두 번째 눈을 얻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쫒겨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 마음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Q. ‘용산 다크투어’는 용산역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약속 장소, 요즘 젊은 세대들이 보는 용산역 광장의 의미는 한정적일 것 같아요. 왜 시발점을 용산역으로 정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용산역의 민자역사화가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주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철도 시설물 주변으로 상가 몇 개를 배치하는 수준이었다면 2004년도 이후에는 굉장히 입체적으로 시민들의 동선을 활용합니다. 동선을 거대하게 만들고 그 안에 대형 슈퍼마켓 이라든지 쇼핑몰 같은 것들을 유치해서 인근에 있는 주민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거죠. 철도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상업시설의 사용 비율을 높일 수 있어요. 용산역 같은 경우에는 역무 시설이 10%밖에 되지 않은데, 역무 시설과 상업시설의 비율이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고, 시민들이 이곳을 보면서 어떻게 편하게 쉴 수 있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용산역 외부 카페 앞 테이블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테이블’이라고 붙어 있어요. 하지만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지 않으면 이용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용산역에서 공공이 어떻게 더 우위에 설 수 있는가를 제안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Q. 다음 장소인 용산역 구름다리에 도착했는데, 용산역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요. 두 번째 장소로 정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과거에 이곳을 방문해 보신 분이라면 낮에 노점 좌판들이 깔려 있던 모습을 기억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노점상들이 사라지게 된 것은 맞은편 드래곤시티 호텔이 개장하면서부터였어요. 호텔이 개장하고 다리가 연결되면서 호텔 경비 용역들이 다리의 양 끝에 배치돼 이곳에 자리를 펼치려는 노점상들이나 밤에 박스 집을 짓고 잠을 청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한 거죠. 약 1, 2주 정도 그런 시간이 경과하고 나니까 더 이상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현재 텅 빈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다시 한번 중요한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구름다리 옆쪽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가 완공되면 구름다리는 사라질 예정이에요. 새롭게 만들어지는 교각 바로 아래에는 홈리스들의 텐트촌이 자리 잡고 있어요. 길게는 약 20년 정도 거주하신 분들부터 짧게는 7, 8년 정도 거주하신 분들까지 거주하고 계시죠. 이미 교각 공사 때문에 텐트 중 일부가 철거됐고, 그 와중에 또 화재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상황입니다. 용산 정비창이 개발되고 이곳에 새로운 다리가 만들어지게 되면 홈리스 텐트촌의 주거권에 훨씬 더 위험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관련한 대응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묘안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에요. 이곳이 누군가의 생계와 잠자리가 사라진 공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의미로 정하게 됐습니다.
Q. 누군가의 생계와 잠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린 걸까요.
도시변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노점상을 주제로 한 논문을 보았는데, 도시의 변화 자체를 우생학으로 정의하더라고요. 깔끔하게 도시가 발전하고 변화할수록 이런 변화에 포함되지 못한 가난한 사람, 노점상, 거리 홈리스 등의 탈락을 자연스러운 걸로 인지하고, 이런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도시 변형의 결과인 것으로 사고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고를 통해 그곳에 포함되지 못 한 사람들에 대한 낙인이나 멸시 역시 강화될 수 있죠.
서울역에서 야간 노숙 퇴거 조치로 1인 시위를 했는데, 한 홈리스분께서 지하철은 백화점과 다르게 누군가 자기를 막지 않는 차별 없는 공간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차별의 공간이 된 거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자기를 막는 공간이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야간 노숙 행위 금지 방침이었지만 경제력이 없는 시민들은 내쫓기 위한 방책이었죠.
Q. 노숙자를 보는 시선은 매우 차갑기도 해요. 요즘 세대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가난의 여부가 정해진다고 보는데, 어떻게 보면 본인이 거리로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보는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도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현재 가난에 빠진 사람은 우리 사회에 결과로서의 빈곤을 자기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거리로 나오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겠죠. ‘나’도 많은 경험이 쌓여서 현재에 내가 있는 거잖아요. 가난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빈곤의 이르기까지 그전에 여러 모습을 거쳐 왔을 것이고 통시적인 과정에 대해서도 우리가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로 재개하는 것이 긴급한 일일 텐데 그 긴급함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을 때 “자활 의지를 밝혀라”, “취직해라”라고 하는 것이 무망한 요구가 돼 버리거든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 의욕적이지 않은 사람, 스스로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으로 상징하기가 쉬운데 어떻게 보면 빈곤을 보는 심리·사회적인 외상의 일종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 상황을 개인들이 행하는 평가로 도약시키기 시작하는 순간 이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는 데는 실패하게 된 거죠.
Q. 사회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굴고,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부가 법과 절차만을 외치며 문제해결을 하려는 태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디테일하게 모든 조건을 따지는 경우들이 많아요. 이걸 다 들어야 한다. 기준에 충족시켜라 그리고 이 충족이 안 되면 너는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위협이 너무 많아요. 사회 보장 제도가 조금 안정적이면 좋겠습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사람들이 탈빈곤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라도 안정적인 게 있어야 가능한 거죠. 안정성의 시작은 주거권, 일정한 소득, 그리고 내가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확신. 이런 것들이 있어야 자신이 새로운 사회관계망도 만들어가고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정성을 지속해서 박탈당한 사람들한테 내일, 모레부터 갑자기 방식을 정해 놓고, 이 방식대로 살라고 한다면 할 수 없다는 거죠.
고시원이나 쪽방에 머무는 사람들이 코로나19에 걸려 위생시설을 따로 사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겪으니, 주거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한 가지도 이뤄지 않았죠. 그냥 무작정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상황을 보면서, 머무는 집이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의 위기는 정부가 중요한 위기로 판하지 않는다고 느껴졌습니다.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는 거죠.
Q. 그렇다면 시민들이 어떻게 빈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면 할수록 세상은 변화하게 돼 있습니다. 저희 단체는 서울역에서 오랫동안 홈리스 거리 상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활동을 하면서 역무원들이랑 싸움도 많이 하고, 코로나 19시대에 퇴거명령도 받았거든요. 그럴 때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저지도 하고, 도와주셨어요. 이런 행동들을 반복적으로 해주시니까 드러내놓고 퇴거 명령한다지, 심하게 밀치는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런 시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는 게 느껴집니다.
Q. 홈리스 거리 상담을 하면서 그들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됐을 것 같아요. 활동하면서 만나본 그들의 특징이 있을까요.
일반적인 특징은 없다고 봅니다. 사람마다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홈리스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 이미지는 홈리스들이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자주 관찰되는 이미지일 뿐 훨씬 다양합니다. 개개인이 다른 것처럼 생활하는 방식도 다 다르고, 새벽에 일을 나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거리 노숙을 하는 분도 있어요. 단지 거리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자기 몸을 가릴 벽이 없고 외향을 감출 수 없어서 쉽게 눈에 띄는 것뿐이에요. 모두 똑같은 사람이고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Q. 용산 정비창을 둘러보며 걷는데, 참 넓은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 넓은 땅을 가지고 ‘기회의 땅’, ‘아시아 실리콘밸리’, ‘서울 마지막 금싸라기’로 부르기도 해요. 이러한 시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가 다크 투어를 몇 번 해보니까, 종종 본인 의지가 아닌데 오는 분들이 있어요. 하루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투어를 참여했는데, 한 학생이 정말 악의 없이 “사람들은 국제업무지구 오픈하는 거 좋아할 것 같은데요?”라고 질문을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낙후된 도시공간이나 빈 땅을 아주 새롭고 번쩍이게 만드는 개발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봤어요. 개발이 익숙했던 거죠. 근데 그런 ‘익숙함’이란 이유로 우리는 이곳을 걷는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그런 개발이 천문학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지만, 누군가가 분명히 피해를 입었다는 에 대해서는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경관이 좋아지고, 세련된 물건으로 가득 차는 게 공익적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용산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리를 뺏기지 않는 것이 훨씬 공익적 결과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 넓은 빈 땅을 보고 우리의 상상력이나 새로운 사회적 약속을 개입시켜보는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Q. 정치인들의 공약 중에 ‘개발’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용산 말고도 ‘개발’이라는 청사진을 미끼로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는데, 용산 외에도 어디가 있을까요. 그곳의 사람들은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나요.
서울에서는 구도심이죠. 종로 청계천 일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 답변을 통해,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서 낙후한 도심을 보니까 피눈물이 난다고 했어요. 박원순 10년 동안 지체된 도심 개발이 이 낙후한 도심의 풍경을 낳았다고요. 그러고 나서 몇 주 있다가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에 있는 상인들이 오세훈 말 한마디에 피눈물은 우리가 흘리고 있다며 기자회견을 진행했어요. 오세훈 시장의 말 한마디로 언제 이 공간이 개발될지 모르니까 건물주들이 재계약 안 하겠다는 반응을 내비친 거예요.
세운상가 상인들은 짧게 20년, 길게는 수십 년씩 장사를 계속했던 분들입니다. 계약이 해지되면 막막한 거거든요. 어디에 가서 다시 장사를 할 수 있겠어요. 영세한 가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물건을 만들고 주문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지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오밀조밀한 산업 생태계가 물론 최신의 반도체 공장만은 아닐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생산물을 만드는 곳이거든요.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공간에 자기 생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생계가 달린 곳을 오세훈 시장은 서슴없이 낙후된 곳, 없어져야 할 곳으로 단정 짓는 상황인 거죠.
Q. 자기가 사는 곳이 개발되면 돈도 벌고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여요. 재개발이라는 말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3년에 서울 강북구 미아동이 뉴타운 지구로 지정돼 재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서 뉴타운 재개발 정책 반대한다고 서명운동 받고 있으면 정말 뺨 맞아야 했어요. 재개발이 진행되면 그곳에 사는 주민들 다 부자 될 줄 알았거든요. 근데 막상 그곳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추가 부담금을 낼 여력이 없어서 입주를 못 하는 일들이 발생한 거예요. 헌 집 주면 새 집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결국 이명박 대통령한테 속고, 오세훈 시장한테 속았다는 분위기로 바뀌었어요. 사회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사람들이 개발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보다 최종적으로 법제도가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Q.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주거 공간’은 안전한 개인공간을 떠나서, 투자가치가 있는 자산이 됐다고 생각해요. 주거 공간과 돈을 별도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미래가 올까요.
글쎄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오길 바라기는 어렵겠죠.(웃음) 빈곤사회연대는 용산정비창에 공공임대주택시설을 짓자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곳에 임대 아파트를 짓자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지만, 일단 땅을 팔지 않는 것이 저희의 강력한 주장입니다. 공공이 임대하는 집이나 상가 같은 것을 만드는 거죠. 왜 이런 넓은 땅을 두고 주택 공급을 할 곳이 없다고 하는지 좀 의문이에요.
저도 현재 임대 주택에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6년까지 살 수 있어요. 처음에는 월세나 관리비가 부담스러워서 1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이 됐어도 고민했는데, 최근 들어 전월세 폭등, 깡통전세 등 소나기를 피하고 있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인 거예요. 6년의 주거 기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근데 이 감정이 좀 황당하더라고. 계약 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요. 계약 기간에 정함이 없고, 일반적인 임대차 계약을 맺고 있는 해외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뺏기고 사는 게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내 주민등록 초본은 네 쪽에 달한다. 세입자에게 단 2년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이 사회에서 38년간 살아온 증거다. 주소지를 이전하지 않고 살았던 집들까지 추가하면 아마 한두 쪽은 너끈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무수한 주거 전쟁들의 마지막에는 단지 이사가 아니라 집을 빼앗긴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새롭게 차지한 사람들은 쫓겨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걸 나는 무엇보다 내 자신의 무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삶이 위태로울 때 바로 옆 내 삶은 그토록 평온했다는 것이 두렵다. 타인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평화는 가짜일 텐데, 이 평화를 의심없이 즐겼던 시간은 진짜로 달콤했기 때문이다.
-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중
Q. 용산정비창을 지나 용산참사 현장으로 가는 길이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 같네요.
한쪽은 시티뷰. 한쪽은 숲 뷰. 많이 다르죠. 그냥 용산역으로 가는 길이라 걷는 거리이긴 한데, 나름대로 운치도 있고, 오래된 동네예요. 옛날 서울의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과거의 경의선 숲길처럼 기차가 지나가는 길이에요. 신촌, 홍대부터 여기까지 기차가 지나갈 때 차단기에서 ‘땡’, ‘땡’하고 울리니까 땡땡거리라고 부릅니다.
Q. 마지막 장소는 ‘용산 참사’ 현장인데, 활동가님과 용산참사와 관련한 기억이 있을까요.
용산 참사가 벌어진 날 아침부터 다 기억이 나긴 합니다. 그때 시신 탈취 우려가 있어서 학생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저는 매일 순천향대병원에 방문했어요. 사실 용산 참사에 대한 기억은 참사 당시나 장례를 치르기 전 1년의 기억보다는 그 이후가 더 많아요.
빈곤사회연대가 용산 범대위를 같이 꾸리고 활동했던 단체이기도 하고 용산 참사 진상규명위원회랑 같이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용산 참사 2주기, 3주기, 4주기를 준비하고 참사의 가해자들이 막말한다든지,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에 나서지 않을 때 유가족들과 함께 대응 활동을 했던 기억이 훨씬 더 많아요. 저는 그렇게 십몇 년을 보내왔는데, 어떤 사람들에겐 용산 참사는 흐릿해져 가는 일, 없었던 일이 된 거죠.
Q.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용산 참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왜 기억해야 하며, 사라져가는 기억을 어떻게 상기시켜야 할까요.
지금도 용산 참사 현장에 가보시면 표지석 하나도 없어요. 용산도시기억전시관에 있는 관 하나의 용산 참사가 기록돼 있긴 하지만 원래 장례를 치를 때 합의했던 내용으로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추모 식수를 하자는 거였죠. 조합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행되지 않았어요. 그냥 아무 표시 없이 빈 땅으로 남겨져 있는 거예요.
공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사라지니까 과거에 어느 공간이었는지 가늠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던 대부분 사람들 처지 같기도 해요. 존재했던 어떤 사람들의 흔적이 너무나 쉽게 지워져 버리고, 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좋았는지. 과연 현재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인지. 질문하기 위해서 용산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 같아요.
‘용산 다크투어’에 참여하는 분 중에서 용산 참사 미사 현장도 가보고 연대 현장도 가본 분들이 간혹 계시거든요. 정말 놀라세요. 용산역 많이 와봤는데 이 텅 빈 공간이 참사 현장이라는 생각을 모르고 살았다는 거예요. 풍경이 다 바뀌었으니까.
용산역 앞에 잔디밭 깔린 광장이 원래는 성매매 집결지였고, 그 옆에는 포장마차촌이 있었어요. 근데 이제는 기억이 안 나요.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자리도 뺏기고, 목소리도 뺏기고, 존재도 뺏기는 현상이 절대 자연스럽지 않은데, 공간이 사라지니까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거예요. 부자연스러운 공간의 바꿈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책의 부제목이 ‘쫓겨난 자들의 잊힌 기억을 찾아서’인데, 본인이 생각하는 ‘기억’을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정말 아프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다 아픈 기억들이잖아요.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쫓겨난 기억이 있다고 하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좋은 일들이 과연 온당히 좋은 것일까,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식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고 엄청 기운차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에요.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생기있다는 것이에요.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싸우는 거에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싸우지 않아요. 자신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저돌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시도를 시민들이 자신의 상태인 것처럼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후에 우리가 함께 바꿀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아요.
Q. 활동가 ‘김윤영’은 앞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까요.
‘빈곤 김윤영’ 아닐까요?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야 빈곤!” 이렇게 부르곤 해요. 빈곤 사회연대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으니까, 그냥 대충 부를 때만 “빈곤!” 그럼 저는 “제가 그래도 빈곤은 아니죠..”라고 웃으며 반응해요. 상징적인 의미로 빈곤인 거예요. 빈곤사회연대를 줄여서 빈곤. 가까운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애칭인 거죠. 그 애칭이 좋아요.
Q. 활동가님이 꿈꾸는 도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꿈꾸는 도시의 미래에 대해 말하려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도시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치밀하게 소득수준과 경제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구획을 나눠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거대한 개발이 일어나면, 일어난 곳일수록 그곳에 진입하기 어려운 소득이나 재산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밖으로 쫓겨나게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도시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도시를 새롭게 계획할 때 ,현재 이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미래도 머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겠죠. 좀 더 나은 미래를 우리가 계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살아왔고 머물러 왔으며 이 도시를 함께 일궈 왔었던, 그 사람들의 자리가 빼앗기지 않는 그런 도시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