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작가로 불리는 한국화가 이숙자 ⓒ뉴시스
보리밭 작가로 불리는 한국화가 이숙자 ⓒ뉴시스

예술가가 일정한 하나의 대상을 그의 예술에 집중적인 표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때 이것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 것인가.

다행히도 그러한 잘못된 비난의 화살 속에서 홀로 고집스럽게 채색작업을 한 작가가 있다. 보리밭 작가로 불리는 이숙자가 바로 그이다.

이숙자의 별명은 보리밭이다. 그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것보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푸른 보리와 누런 황금 빛 보리를 먼저 회상하고 떠올린다.

그만큼 그의 보리작품은 대중들에게 유명세와 강한 인상을 남겨 주고 있다.

그런 이숙자가 추구하는 작품의 양식은 채색화이다. 그의 일 가운데는 그 채색화를 정통회화로서의 채색화를 정립 시키는 일도 포함돼 있다.

왜냐하면 이숙자에게 있어 채색화는 단순히 회화의 세계를 넘어 채색화라는 표현양식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목적과 사명이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박생광과 천경자 그 다음 세대의 작가 중 우리는 다음으로 이숙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채색화가로서 이숙자가 화단에 본격적인 데뷔를 하고 활동하게 된 시기는 1963년 국전에 <제통소>란 작품을 계기로 시작된다.

그는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여성적인 취향이 보이는 작품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작품들을 주제별로 살펴보면 그의 다분히 여성적인 취향은 오랫동안 그의 그림에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소품들은 한결같이 족두리나 댕기 골무 색상자 등으로 대부분 민예품과 민속품 등 여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장신구들이다.

이 조선 시대 여성들의 규방에서 흔히 발견되는 기물들은 그 자체가 오방색이거나 한국적 정서가 강한 채색화의 대상으로는 더없이 적합한 그것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그것이 전통적인 대상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주제를 택하는 것에서도 우리는 그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일단의 남다른 새로움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숙자의 작품 흔적에는 그가 배웠던 스승들의 세계가 그의 회화세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채색화를 고집하면서 그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된 작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홍익대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박생광과 천경자다.

그러나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사실주의 기법을 익히기라도 하듯 전체적인 화풍에서선생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실 풍의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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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작가의 <청맥>

다만 눈에 띄는 것은 동시에 놀랍게도 그는 이미 1974년에 그가 앞으로 보리밭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게 되는 작품 <청맥>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두 번째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꽃 여인 백합 등과 더불어 이 그림은 당시의 작품으로 보아 아주 특별한 특징을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적인 표현의 나비와 봄철 보리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사실적인 방법으로 그의 후기에 이르는 보리밭 작품까지를 관류하는 극사실 기법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보리에 관심은 보편적으로 여류작가들이 쉽게 갖게 되는 꽃과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과 종종 병행해서 나타나며 기법상으로는 채색의 전통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그의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작품들의 전체적인 초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80년대를 지나면서 보리라는 일관된 주제를 깊게 천착 해오면서 다양한 표현의 시도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만한 작품이 이브의 보리밭 연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다.

보리밭으로 가득 찬 화면에 약간은 에로틱한 감정을 곁들이면서 종종 전라의 벗은 모습으로 자리한 그의 보리밭은 그 배경이 되는 보리밭이라는 문학적 상징성과 다소 요염하면서 그 에로틱한 자세와 진 채의 자세로 화단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누드의 표현이라든가 묘사에서는 그가 더욱 완벽한 형태의 누드 표현을 구하지 않는 작품들을 보여줬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이런 작품들은 에로틱한 감정을 그의 작품 속에서 승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다른 혹은 비판적인 평가가 가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보리밭은 그의 작품세계를 거론하는데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작업세계에 대부분이 보리밭을 통하여 응집되기도 하고 열리기 때문이다.

한국화가 이숙자가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품 '군우-얼룩소 1, 2, 3, 4'를 설명하고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br>
한국화가 이숙자가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품 '군우-얼룩소 1, 2, 3, 4'를 설명하고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물론 보리밭 말고도 그의 작품 중 주목할만한 1987년 <군우>도 그의 작품 가운데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이다. 장대한 규모와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탄탄한 구성력과 ‘침묵하고 있는 한무리의 군중’의 감정을 담아내기라도 하듯 당시의 현실을 읽어내고 담아내는 작가의 의식의 명료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청맥, 황맥등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들어서면서 그에게는 새로운 현실인식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소 전투적으로 보이기 까지 한 이 작품들은 농민들의 감정을 대신 드러내는 예술가의 또 다른 화법처럼 비침으로써 그가 현실 인식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즉 예술가들이 현실과 분리될 수 없는 상황들을 우리는 이숙자의 작품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숙자 예술의 중심에는 언제나 <보리> 또는< 보리밭> 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리밭을 그리는 일은 도를 닦는 일과 같았다’라고 토로했다.

수없이 들판에 펼쳐진 보리 알과 수염 하나하나를 일일이 그것도 입체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육체적 노동을 요구한다.

어느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그가 어떻게 보리밭을 그리게 됐는지 그리고 그때 그의 심경은 어떠했는지 그 배경을 밝힌 바 있다.

70년대 초 포천에서 교직 생활을 하는 시동생을 보러 갔다가 보리밭을 보게 됐고 그는 그때의 보리밭과 만남을 충격적일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피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때의 풍경이 어떠했는가는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밝은 회청색의 보릿대와 연둣빛 보리 이삭. 초록빛 안개처럼 자욱한 보리 수염, 그리고옆으로 뻗은 잎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도시 생활에 길들였던 그에게 보리밭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풍경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숙자 작가의 &lt;바람결 이는 푸른 보리밭&gt;<br>
이숙자 작가의 <바람결 이는 푸른 보리밭>

그렇다. 그의 작품은 거의 푸른 파도처럼 펼쳐져 있다. 그 보리밭에는 노랑나비 흰나비가 그는 환상 속의 행복 그 자체이었을 것이다.

과연 그의 회화는 그가 목적하고 있듯이 자연의 경이에서 출발해 보리밭이 단순한 “한 화가의 조형적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스며 있는 더 큰 의미의 대상으로 들어오게” 되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분명 이숙자는 꽃과 여인 그리고 누드, 보리밭으로 그 풍부하고 다양한 삶의 이미지를 보리밭으로 형상화 해내는데 적지 않게 성공했다.

또한 그 보리의 내적인 생명력을 사실적인 필치와 역동적인 구성으로 보리밭을 통한 전체적인삶의 모습들을 형상화하고 묘사하는데 기여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br>(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br>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그러나 여전히 이브의 보리밭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피상적인 에로티시즘 그 자체가 아니었듯이 어쩌면 그는 한국 여인의 의지, 생명력, 생에 대한 능동성, 그가 살아오면서 고뇌하고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 의식”을 포함한 적극적 세계관으로서 발걸음을 할 고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제 보리만 그리는 작가라는 이숙자에게 덧씌워진 우리 시대의 편견은 수정돼야 한다.

그는 보리밭을 통해 그의 슬픔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드러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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