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짓는 아재의 독서 일기㊶] 가치투자의 세계관, 가치투자로의 회심
전업 투자자인 친구가 내게 가치투자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지식이 일천하여 이에 대한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서 기초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가치투자는 고사하고 투자 자체를 모른다. 듣기야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나의 경험과 나의 지식은 아닌 거다. EPS니 PER이니 하는 기본 용어도 낯설고 가치주 성장주 분류도 어색하다. 그래서 요즘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렸다.
부자 아빠 가난한 딸
그러다 만난 책이 바로 『아빠와 딸의 주식 투자 레슨』 이다. 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를 추종하는 아빠(필)를 투자 멘토로 삼아 가치 투자의 길에 들어선 딸(대니얼)의 이야기다. “금융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교육을 통해 투자자가 되었고 그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14쪽) 내가 역서 제목을 단다면 –로버트 기요사키로부터 차용해- 『부자 아빠 가난한 딸』이라 했을 것 같다.
아빠는 일찌감치 재정적 자유를 얻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처음 5년 만에 1000불을 100만불로 늘렸다!), 딸은 명민한 두뇌로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대출금을 갚기 위해 시간의 자유를 포기해야 했다(주 80시간 노동!). 사실 많은 이들이 재정의 증가 대신에 시간의 상실을 경험한다. 미카엘 엔데가 동화 『모모』를 통해 이를 통렬하게 지적하지 않던가.
가치투자는 재정의 자유와 시간의 자유, 두 마리 토끼를 쫓는다. 확실히 내 눈에는 대단하게 보인다. 기존의 투자와도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혹자는 가치투자를 거의 종교처럼 대하고, 가치투자로의 전환을 회심(回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는 가치투자가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기 때문이다(그것도 매우 낙관적인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한 투자론이다).
가치투자의 세계관
따라서 이 책을 간증집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 회심 전의 타락도 묘사된다. 가령 대학 친구들을 따라 단타매매를 하다가 이틀 만에 투자금의 절반을 날렸다(금액 자체는 미미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명상센터 체류비용이 없어서 돈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단 한 가지가 바로 돈이라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단다.”(56쪽)
돈이 얼마나 중요한가. 딸은 돈으로 여유를 사기를 원했을 테고(“돈 걱정 없이 언제까지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아버지는 돈으로 치유를 얻고자 했다(“그때는 영적 자유가 제일 중요했거든. 그런데 돈 때문에 하지 못했어. […] 늘 돈이 문제였지.”). 그렇다. 늘 돈이 문제다. 돈은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권능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 버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돈 버는 방법이 막막한 이유는 돈이 흐르는 영역에 대한 시야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관점이 투자의 전략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치투자’교(敎)는 자본주의 종교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 주식시장이 (중단기적으로는 상승장과 하락장이 오가지만) 장기적으로는 우상향한다는 신념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이 이 종교의 근간을 지탱한다. 이러한 접근은 사실 아파트 불패론을 지지하는 부동산시장 신도들과 비슷하다. 가독교의 여러 교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간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기독교에서 선(善)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교는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딸(대니얼)은 아빠(필)의 전도로 믿음을 갖게 됐다.
모든 신념 체계에는 가장 핵심적인 기본 신념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도그마(dogma)라 한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다른 신조나 신념 등을 지탱시켜주는 믿음이다. 도그마는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시금석이다. 도그마를 거부하면 이단이 된다. 지금 하려는 말은 시장에 대한 도그마, 즉 주식시장의 지속적 성장(우상향)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가치투자의 근간이라는 거다.
또한 강력한 도그마는 신자의 구체적인 헌신을 독려하는 믿음이기도 하다. 아파트가 제아무리 불패라도 구매해야 내것이듯 주식투자도 궁극적으로는 우상향한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와도 같다. 신의 사랑은 불변하나 인간의 자신의 노력으로 이에 부응해야 관계가 시작되고 또한 성장한다.
가치투자에의 회심
국내 가치투자자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치투자의 세계관이 기독교의 세계관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나아가 다른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의 세계관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신념체계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특정한 세계관으로 세계를 보기 위한 조건은 신념의 전환, 즉 회심이다. 단타를 중심으로 하는 투자자들의 세계관은 가치투자자들의 세계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특정한 하나의 투자철학에 동의하기 전에는 그 투자방식에 온전히 뛰어들기가 어렵다. 특히 가치투자처럼 장기보유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슈퍼 리치를 향한 조롱으로 가득한 오오드레 베르농의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는 일단 워런 버핏부터 까고 시작한다. 작가의 마르크스적인 신념과 그로 기인한 냉소의 첫 타깃으로 투자자들 가운데 높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 버핏을 택한 것이다. 박민규의 단편 「버핏과의 저녁식사」도 자본주의의 한계 혹은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버핏을 호출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애초에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의 역사관(타락과 구원, 역사의 완성에 이르는)을 차용한 신념체계이다. 기독교의 그리스도(Messiah)에 상응하는 구원자로 노동자 계급(proletariat)을 내세울 정도로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회심과 헌신이 필요하다. 이는 가치투자 또한 마찬가지다.
투자의 성공에서 관계의 회복으로
결국 우리의 주인공 필 타운은 훌륭한 가치투자자로 거듭난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회사 홀푸드의 주식을 샀다. 그리고 결혼으로 미국을 떠나게 되자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그 주식을 팔았다. 자신이 사랑한 기업의 주식을 매도한다는 것에 그녀는 슬픔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매도했다(이때 그녀 마음에 탐욕이 일어난 건 비밀이 아니다). 첫사랑을 떠나보낸 것이다.
“우리는 ‘절대 팔지 않기’를 강력하게 바랐지만 매도는 이 수련에서 막을 수 없는 요소였다. […] 이 매도는 단지 수련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는 다른 것을 수련했던 것처럼 매도하는 수련을 해야만 했다.”(448쪽)
이후 일주일 동안 애도의 기간을 가지고 나서 투자 수익률을 살펴보니 배당금을 합산할 시에 무려 41%에 달했다. 아빠가 정한 최적의 수익률 26%를 훨씬 상회한 것이다. “이제 기업 조사로 돌아가서 두 번째로 선호하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나는 이 수련에 푹 빠져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449쪽) 가치투자의 꿈나무가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아빠 필은 아내와 이혼한 이래 잃어버린 -자신을 향한 딸의- 신뢰를 회복했다. “워런과 찰리를 신뢰하기로 한 대니얼의 결정은 나를 신뢰하겠다는 결정이기도 했다.”(452쪽) 그뿐이겠는가. 이제 지금은 딸와 아빠가 같이 투자 관련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딸을 되찾은 나는 두 사람[워런 버핏과 찰리 멍거]에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특별을 빚을 졌다.”(453쪽)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가치투자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됨과 동시에 부녀관계가 회복됐다. 하지만 기껏 딸이 투자에 관심을 기울여도 서로의 투자관이 다르다면? 가령 가치투자를 신봉하는 아빠와 달리 딸은 단타매매에 전념한다면 어떨까? 아마 소통의 벽이 생길 것이다. 혹은 가치투자를 하더라도 딸의 수익률이 형편없다면? 그렇다면 아빠에 대한 신뢰 대신 원망이 딸의 마음에 넘칠 것이다.
아빠는 확신한다. “워런과 찰리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해냈다. 두 사람이 고안한 전략을 면밀히 따른다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453쪽) 그는 딸을 이 믿음으로 회심시켰다(전도!). 독자인 나의 경우에는 어떨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자본주의와 -그보다 더 크고 오랜 관념이자 실체인- 시장에 대해서 이제 겨우 알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이 늙은 구도자에게 『아빠와 딸의 주식 투자 레슨』은 충분히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