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s⑪]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 고양 금정굴의 아픔은 계속된다
<올드스(OLDs)>기억해야 할 열한 번째 소식,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1950년 10월 9일~31일, 200여명 고양 황룡산 금정굴에서 학살당해 사건 발생 74년, 유해발굴 29년, 진상 규명 17년…남은 과제 산적 ‘빨갱이’란 이름으로 수십년간 고통받은 유족들의 명예 회복 필요해 금정굴 유족회 “‘역사의 희생양’이었던 우리를 기억해 주길 바랄 뿐”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단어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투데이신문 이수민 기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護國)은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이고, 보훈(報勳)은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국가는 국가에 공헌하고 희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호국 보훈의 달을 만들었다.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예우도 당연하지 않을까.
1950년 남침한 인민군이 아니라 침략을 당한 국군이 자기 국민을 죽인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이 ‘사실’을 애써 지웠다.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이 그렇다. 이 사건은 9.28 서울 수복 이후, 고양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10월 한 달 동안 고양과 파주 일부 지역에서 거주하던 153명 이상의 주민들이 부역 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 경찰서 경찰관들, 치안대, 인민군에게 가족을 잃은 일부 주민들에 의해 금정굴에서 불법적으로 집단 총살당한 참극이다. 이 슬프고 끔찍한 사건은 전쟁 이후에도 유족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흐름도 있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을 통해 국가의 책임을 규정했고, 2012년 사법부는 유족 92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사건 희생자들에게 총 124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금정굴 유족회 채봉화 회장(78)은 아직도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에 대한 진정한 대우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힘이 없는 유족들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하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어요. 우리 힘 없는 유족들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금정굴 학살 사건 당시 4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자라면서 남편이자 가장을 잃은 어머니의 한맺힘을 봐야만 했고, ‘연좌제’로 인한 차별 등을 견뎌야 했다.
이들이 이런 오명을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전쟁’이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이들의 희생도 없었을 터. 전쟁을 시작한 침략자를 비판해야 할 국가는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눴다.
역설적으로 금정굴 학살 사건은 6.25 전쟁 당시 있었던 민간인 학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은 앞으로 있을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에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이 사건을 다루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의 역사적 배경
고양 금정굴의 또 다른 이름은 황금무덤이다.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일제 강점기 당시 황룡산 자락에 있는 금정굴이 금광으로 개발됐다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금정굴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수탈 장소였다. 그리고 광복 후 5년 뒤, 같은 장소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은 빠르게 남하했고, 6월 28일 고양 및 파주지역을 점령했다. 주민들은 당시 정부가 초래했던 후퇴전략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그 지역에 남아 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20일에 고양 지역이 수복되기 시작해 28일 완전히 수복됐다.
수복 이후 숨죽이고 있던 잔류 국군, 경찰 등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은 대한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 소속원이 주를 이뤘던 대부분의 치안대 간부들과 함께 부역 혐의자 및 그들의 가족들까지 연행했다. 고양 지역 태극단원들도 부역 혐의자 연행에 가세했다.
1950년 10월 9일, 태극단 단원들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모인 이들은 부역 혐의자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 구금됐던 이들은 재판을 받으러 가는 줄 알았지만, 금정굴로 끌려갔다. 그렇게 31일까지 200여명의 주민이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 태극단에 의해 희생됐다.
이들의 희생은 개인의 원한을 이유로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 의용경찰대 중 한 명은 수복 직전 인민군에 끌려가 살해당한 두 형의 원수를 갚고자 금정굴 학살에 5번 가담했다. 하지만 희생자들은 그의 형들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경찰서에 갇힌 자기 가족의 밥을 챙기기 위해 매일 경찰서에 갔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희생자들이 다른 곳으로 갔으니 더는 밥을 가져오지 말라는 얘기만 들었다고 했다.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었거나 희생자들이 금정굴로 끌려가는 걸 봤다는 목격담으로 가족의 행방을 추측할 뿐이었다.
유족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고통을 받았다. 사건에 대한 해결이 부침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가 나오게 되고 거창, 경주, 울산 등 지역에서 결성된 유족회가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하면서 6.25 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조치가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유족단체는 이적단체로 규정됐을 뿐만 아니라 유해 수습 지역에 있던 위령비는 파괴됐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금정굴 관계자들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괴로운 시간만 떠안게 됐다.
하지만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정굴 유족회를 꾸리고 위령제를 지낼 수 있게 됐다. 1995년 9월 24일, 마침내 합동위령제와 함께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10월 6일에 완료된 작업에서 총 153여구의 유해가 나왔다. 사건이 일어난 지 45년 만에 금정굴 학살 사건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유족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해 10월 9일 유골 감정 및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관련 기관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같은달 13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유골 57점과 유품 30여점을 펼쳐놓고 국회 진상조사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2007년 진실화해위는 진상 규명을 통해 ‘국가의 공식적 사과’, ‘금정굴 희생자 유해 영구 보관할 수 있는 위령시설 설치’, ‘평화공원 설립’ 등을 권고했으며, 학살된 주민들은 대다수 부역과 무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대한민국이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한 것이다. 2008년에는 고양 경찰서장의 공식적인 사과도 있었으며, 2013년에는 금정굴인권평재단이 설립되면서 금정굴과 관련한 활동에 대한 불씨를 지폈다.
지금은 어떠할까. 2024년 현재,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사건 발생 74년, 유해발굴 29년, 진상 규명 17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다.
유해는 전국 곳곳을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1995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창고에 보관됐고, 이후 고양시 청아공원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2014년 고양시 하늘문추모공원에 안치됐다가 계약만료로 지난 2019년 한국전쟁기 유해가 모여있는 세종시 추모의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희생자를 위해 설립된 시설에 유해를 안장해 편히 추모하고 싶었던 유족의 바람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유족의 바람과 달리 지난해 고양시 금정굴 관련 지원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이에 대해 고양시 관계자는 “고양시 내부 재정 상황으로 이렇게 됐다”는 짤막한 입장을 내놓았다.
실제 방문한 금정굴의 현장은 예상보다 열악했다. 안전상의 문제로 천막으로 가려진 금정굴 현장이 전부였고, 금정굴 학살 사건에 대한 설명판 및 현수막과 희생자 사진 및 추모비만이 있을 뿐이었다. 금정굴 현장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면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입구도 그러했다.
금정굴 학살 사건에 대한 ‘확실한’ 예우는 언제쯤 이뤄질까. 금정굴 사건의 희생자와 유족이 ‘거대한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금정굴 학살 사건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평화교육을 목표를 활동하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이현옥 사무국장은 “유족분들의 연세가 많다보니 해결되는 걸 못 보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유족으로서 모진 세월을 참고 살았던 금정굴 유족회 채 회장은 “이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이 필요하다”며 “‘역사의 희생양’이었던 우리를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힘없는 유족들이 편히 추모할 수 있는 공간 그거 하나만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면서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의 ‘진실’이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수복의 환호 속에 묻힌 금정굴의 아픈 역사는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국가 폭력 앞에 쓰러진 희생자들과 남은 유족들을 위한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