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짓는 아재의 독서 일기㊹] 힘으로부터의 탈주 혹은 은총의 추구

2025-03-05     책짓는 아재
도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읽었다. 이종영 선생의 번역이 유려하고 명쾌해서 단숨에 읽었다. 사실 대학생일 때부터 시몬 베유를 좋아했다. 실로 오랜 만에 베유 누님의 글을 읽게 돼 행복했다. 

중력과 은총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시몬 베유의 원고 두 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와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묶어 펴낸 것이다. 원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만 번역 제안을 받았던 이종영 선생이 얇은 분량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유사한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함께 번역해 수록한 것이다.

위의 ‘구조’는 중력과 은총이라는 구도를 뜻한다(이 두 편의 글에서는 중력 대신에 힘을 언급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중력(죄악)과 은총(구원)의 변증법적 태도는 기독교적이다. 단순한 정(正)과 반(反)의 충돌이 아니라 창조적 긴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녀는 페렝 신부에게 보낸 어떤 편지(〈영적 자서전〉)에서 자신은 늘 기독교적인 태도를 택했다고 밝힌다.

물론 두 논고는 다른 주제에 천착한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일리아스》를 주목하며,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은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을 고찰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일리아스》는 ‘힘의 시’이며, 힘의 제국을 보여준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권력관계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이나, 비판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그녀의 태도이다.

힘의 시, 《일리아스》

트로이 전쟁을 다루는 《일리아스》는 유럽 서사시의 전범이다. 오랫동안 그리스 시민들에 의해 널리 구전되어 오다 마침내 호메로스에 의해 수합되고, 우리가 아는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에 대한 관점은 이미 글의 제목에서 드러난다. 즉 이 시문학이 힘에 대해 주목한다는 뜻이다. “《일리아스》의 진짜 주인공, 진짜 주제, 중심은 힘입니다. 사람들이 행사하는 힘,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힘, 그 앞에 서면 많이 움추러드는 힘 말입니다.”(8-9쪽)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힘은 폭력적이다. 폭력은 그 대상을 망가뜨린다. 심지어 그 대상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들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사람을 문자 그대로 사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9쪽)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을 통해서 이 폭력적인 힘에 의해 사물화되어버린 군상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는 힘을 행사하거나 힘에 종속되거나 다르지 않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을 통해 힘의 지배의 전횡을 보여준다. 하지만 힘이 전횡하는, 힘에 사로잡히는 인간들의 모습은 고대에서든, 현대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모두 힘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에 더욱 특유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에고의 팽창과도 궤를 같이 한다. 특히 SNS에서 힘에 대한 자아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자아라는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의 전횡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힘의 숭배로부터 탈출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몬 베유에 따르면, “힘의 제국을 빠져나온 모든 사람은 사랑 받습니다.”(59쪽) 따라서 그녀는 “힘의 제국을 인식하고,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61쪽)을 사랑과 정의를 위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사실은 옷을 입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바란 태도는 “힘을 결코 찬양하지 않는 것, 적들을 증오하지 않는 것,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는 것”(63-64쪽)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중력에 저항하는 은총을 추구하라는 제안에 다름 아니다. “힘은 거짓의 갑옷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까지 고통을 가합니다. 은총은 그럼에도 그 사람이 파괴되지 않게 보호하지요.”(62-63쪽) 그 은총은 어디에나 있으며, 누구에게나 임하지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만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빛나는 순간들이 없다면, 오직 음울한 단조로움만이 존재할 겁니다. 그 짧고 신적인 순간 속에서 사람들은 영혼을 지닙니다.”(49쪽)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독해는 이러한 태도를 우리에게 독려하고자 작성된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그녀의 논의 또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약함 그 자체가 약하게 머물면서 힘을 이룰 수 있다”(107쪽)면서 이는 강한 자들이 사용하는 힘과는 다르다고 천명한다. “그것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힘,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이 힘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하지만 비밀스럽게, 조용하게, 무한하게 작은 겉모습을 하고 작용합니다.”(108쪽)

다시 시몬 베유

앞서 잠깐 언급한 SNS로 이야기해보자. 많은 이들이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 SNS라는 이매망량의 세계에 들어가 허우적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의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는 SNS가 진열하는 가공된 현실(포샵된 이미지, 편집된 순간)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포장된 모습에 미혹되거나, 자신의 연출된 모습에 도취되거나 매한가지이다. SNS에 중독된다는 것은 힘에 집착하는 자아의 폭주를 뜻한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시몬 베유에게 있어서 인간의 올바른 소명은 자아의 소멸이다(‘나’에 대해 생각하고 집착하는 건 나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이를 벗어나 우리가 놓쳐왔던 것에 주목하게 해주는, 또한 갈수록 증폭하고 있는 우리의 자기애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성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게 시몬 베유가 요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다시 부각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예리하고 반짝이는 글은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는 휼륭한 지침이다.

마침 《신을 기다리며》도 새 번역본(복있는사람 간)이 나왔고, 시몬 베유의 친구 시몬 페트르망이 쓴 전기(La vie de Simone Weil)도 재발간되었다(영역본을 축약한 고 강경화 교수 번역을 그대로 다시 낸 것 같긴 하다).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들도 여러 권이다. 이제 다시 시몬 베유를 공부할 때가 되었다. 비단 내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는 모든 현대인들이 시몬 베유를 읽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아라는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