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둔청년, 닫힌 문을 열다] 7년 간 길 잃었던 청년…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다

[인터뷰] 고립·은둔 ‘회복’ 청년 송경준씨 학교폭력 경험으로 17살 때부터 7년 동안 은둔 생활 대학·군대서도 적응 어려워…공황장애·우울감 경험해 프로그램 참여로 변화…청년들 돕는 사회복지사가 꿈 “막막해도 분명 도움 줄 사람 있어…믿고 밖으로 나오길”

2025-04-07     박효령 기자

어둠에 길들여진 방, 닫힌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어도 그 변화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세상과의 연결이 희미해질수록 시간은 고요하지만 빠르게 흘러갔고 적막은 깊어졌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은 문을 열었다. 세상이 마냥 차갑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그들은 용기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은 그들을 심각한 문제로만 다뤘고 어둠의 존재로만 그려냈다.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2024년 청년의 삶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의 비율은 5.2%로 2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도 전국적으로 약 54만명의 청년이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고립’, ‘은둔’이라는 단어와 단순한 숫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혼자 견뎌낸 시간 끝에 피어난 용기의 이야기들이 있다. 삶을 되찾기 위해 조용히 내디딘 발걸음을 시작으로 세상을 채우고 주변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있는 청년들이 존재한다. 지금, 그 청년들이 닫힌 문을 열고 다시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송경준씨가 본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줄은 몰랐다. 그에게 세상은 시린 겨울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그는 고립·은둔을 택했다. 학교폭력의 상처는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들 만큼 거대한 어둠이었다. 가혹한 말과 반복되는 괴롭힘 속에서 마음은 굳게 닫혔고 세상과의 연결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했다.

하지만 긴 고요함과 외로움 끝에 그는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아주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자신의 삶을 되찾아갔다.

<투데이신문>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시작을 알린 송경준(28)씨를 직접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불안정한 삶과 재고립 위에 여러 차례 직면하기도 했지만 그는 굳세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사회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그는 같은 상처를 겪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도움을 주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두려움을 이겨낸 그의 단단한 진심이 세상을 채워 가고 있다.

경준씨가 회복 과정의 일환으로 한 모임에 참석해 있다. [사진제공=본인]

마음의 문을 닫게 된 이유

밝던 경준씨가 마음의 문을 닫게 된 계기는 학창 시절에 있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동급생들에게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들의 가혹하고 거리낌 없는 괴롭힘은 경준씨를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해진 폭력은 그를 세상으로부터 숨기게 하기 충분했다.

“친구들한테 많이 맞았어요. 분필을 던지거나 갑자기 목을 조르던 아이들도 있었죠. 어떨 때는 가만히 서 있는 저를 갑자기 툭 치고 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당시 너무 힘들었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고통 속에 지쳐가던 경준씨는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워 가출을 감행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부모님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그를 강제로 차에 태워 등교시켰다. 그럴수록 그는 저항했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17살의 그는 자퇴를 결심했다. 어머니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선택이었으며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탈출구이자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후 그는 7년간의 고립·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작은 방에 몸을 숨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준씨는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심지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했지만 사람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다. 남들은 쉽게 하는 눈맞춤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더욱이 당시 전북 전주에 거주하던 그는 고립·은둔 청년을 지원하는 체계를 찾기 어려웠다.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가 전혀 없던 셈이다. 

“뭔가 하고 싶어도 결국 사람을 만나야 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극도로 긴장했고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으면 주변에서 ‘왜 여기 왔지?’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죠. 당시 공황장애도 심했어요. 그런 저를 도와줄 수 있는 환경도, 지원 체계도 전혀 없었습니다.”

고립이 길어질수록 그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어떻게 나가야 할지,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힘겹게 용기를 내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관계 형성이 벅차 결국 자퇴를 선택했다. 이후 입대를 해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존감은 더욱 바닥을 향했다. 

작은 방에 담긴 그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오전 8시쯤 일어나 가족의 눈치를 보며 공부하는 척을 했다. 부모님이 출근한 후에는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웹소설, 웹툰을 읽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 사회에 나가고 싶어서 나가봐도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해 혼자인 경우가 많았어요.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어디를 가도 그곳에 속한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해 본 적이 없었어요. 만날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가족과도 관계가 소홀했어요. 저는 제 하루를 보통 집, 작은 제 방에서 보냈죠.”

이런 생활이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가족들과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경준씨를 답답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과 아픔을 간직한 아들은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을 뿐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저녁을 함께 먹을 때도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는 날이 많았어요. 저도 가족들과 대화하고 싶었고 공감받고 싶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이었죠. 정서적으로 아무에게도 지지받지 못한 채 집에서 눈치만 보며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 너무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경준씨가 회복 과정의 일환으로 일경험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다시 세상에 나오기 위한 작은 기지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감춘 경준씨는 초조함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극대화된 자신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면 또래들은 대학교를 졸업해 취업하고 연애를 하는 등 이상적인 타임라인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정체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멈춰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밖으로 나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곳을 찾던 경준씨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먼저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경준씨를 잘 이해해 줄 수 있고 공감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에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청년모임을 찾아냈고 그곳에 나가서 낯선 이들과 대화하면서 주변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익혔다.

이후 청년재단이 진행하는 한 프로젝트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모집 대상을 읽어보니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그제야 경준씨는 자신이 ‘고립·은둔 청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이를 회복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신청했고 곧이어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이 있는 청년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무리 또래라고 하지만 경준씨는 낯선 청년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지내는 게 무섭고 어려웠다. 매 순간 긴장했고 불안함에 잔뜩 움츠러들다보니 처음에는 동료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불편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경준씨를 이해했다. 동료들과 코치진은 그의 속도에 맞게 차근차근 다가왔고 불안함을 다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밥 먹었어?”라는 작은 말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다가왔고 그 덕에 서서히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과거에 피해망상이 좀 심했어요. 모임을 나가기도 전부터 사람들 속에 있어도 잘 어울리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을 했고 나가서도 끝없이 다른 이들과 저를 비교하면서 자책했죠. 그러다가 ‘체인지업’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는데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한 공간에서 또래 청년들과 자는 시간 말고는 거의 붙어있으면서 사회성도 생기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가던 경준씨는 현재 고립·은둔에서 회복하고 있는 청년들이 모이는 ‘잘나가는 커뮤니티’ 등에 소속돼 많은 이들과 대화하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가 필요한 곳에 가 아낌없는 도움을 주고 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 등을 통해 사회에서 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 있어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든 것을 느꼈어요. 공황장애 증상도 많이 나아졌어요. 가족들과 사이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인터뷰도 못 할 정도로 많이 갇혀 있었고 제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웠죠. 사람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밖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예전에는 뭘 한다고 하면 무조건 사람을 마주해야 하니까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거든요. 한마디로 말하면 ‘살아갈’ 용기가 생긴 거죠.”

경준씨가 한 사회복지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당사자에서 종사자로…누군가의 희망이 되다

자신이 경험해 봤기에 더욱 고립·은둔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경준씨는 자신이 많은 도움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현재 꿈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년들을 도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에 경준씨는 회복 과정을 거친 뒤 현재 사회복지센터에서 종사자로 근무하고 있다. 현재 행정업무를 주로 맡고 있지만 앞으로 정식으로 사회복지사가 돼 사회에서 소외돼 있거나 고립·은둔 생활 중인 청년들을 도울 생각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한 사이버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다. 3학년인 그는 올해 안에 조기 졸업을 한 뒤 관련 자격증도 취득해 사회복지계에서 일할 예정이다.

“요즘 고립·은둔 회복 프로그램 등을 살펴보면 단기적인 프로그램들이 많더라고요. 사실 제가 경험해 보니 너무 짧으면 적응만 하다가 끝나버려요. 친해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낄 수도 있고요.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립·은둔 청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짧고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아닌 장기적으로 자주 소통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더 안정된 속도로 적응하고 나아가면서 최종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꾸준히 공부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며 현장과 행정을 능숙하게 오고 가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했다. 더욱이 고립·은둔을 회복한 경험을 지닌 청년으로서 현재 작은 방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터뷰 중인 경준씨의 모습. ⓒ투데이신문

“과거에 비해서 그래도 현재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까 이 같은 부분을 잘 파악해 도움을 주고 싶어요. 또한 현재 어둠을 걷고 있을 청년들에게 당장은 앞이 캄캄하고 막막할 수 있어도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이 많으니까 용기를 내서 한번 밖에 나와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경준씨에게 고립·은둔의 시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때로 두렵지만 그는 한 걸음씩 나아가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고 이제는 그 경험을 나누려 한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과거의 자신과 닮은 이들에게 희망의 존재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