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라지지 않는 무속, 말해지지 않는 공공성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윤석열의 갑작스럽고 말이 되지 않는 계엄 시도, 이에 따른 탄핵으로 대통령 선거가 5년이 아닌 3년 만에 시행될 예정이다.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고 그의 내란죄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석열의 재임 기간 중 각종 의혹에 대한 증거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소위 ‘무속’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 공관과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과정, 이태원 참사 직후 영결식에 안치된 이름 없는 위패, 부인 김건희의 얼굴 화장, 후보 토론에서 보였던 윤석열 손바닥의 ‘왕(王)’ 자, 천공스승을 시작으로 건진법사, 명태균, 그리고 불명예 전역 후 점집을 운영하며 윤석열의 내란에 깊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노상원 등 윤석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주술 관련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무속’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이런 시국에 필자에게도 작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필자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 담당하는 과목 가운데 ‘한국인과 한국사상’, ‘종교와 현대문명’이라는 이름의 수업이 있다. 필자는 이 수업에서 특별 강사로 현직 무당을 초빙하고자 기획했다. 한국인과 한국사상 속에서 유교, 불교, 도교 등은 익숙하지만, 무속의 내용과 한국인에게 무속이 갖는 의미는 접하기 어렵다. 또한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엄연히 활동하고 있는 무당의 생활과 현대문명에 대한 시각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짜로 특강을 요청할 수는 없기에, 필자는 이 무당에게 지급할 강사료를 학교에 요청했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는 무당이 현직임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강사료 지급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필자는 학교의 ‘전문가 특강 강사비 지급 기준’대로라면, 직장이나 운영하는 공식 업체는 없지만 대학 강의에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모실 수 없다는 논리를 근거로,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문의했다.
최근 친위 쿠데타 미수로 인한 윤석열 정권의 몰락과 필자가 겪은 해프닝은, 무속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무속은 음성적이며 공적인 성격을 띠기 어렵다. 무속은 종교도 아니고 민속도 아니지만, 종교이자 민속이자 문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힘들고 불안할 때 무당을 찾지만, 이를 당당히 말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가 펼친 이해하기 힘든 정책과 친위 쿠데타 시도를 보고 ‘무속정권’이라는 명칭을 붙이지만, 주술에 종사하는 사람이 여기에 얼마나 개입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학에서 무당을 특강 강사로 요청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공식적인 증빙서류를 만들 수 없어 강사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무속이 공적 종교였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유교, 도교가 모두 외래 종교였기에,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무속은 유입된 외래 종교들과 공존하며 일정한 위상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이전의 시기로, 무속이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성리학은 이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무속은 많은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조정은 무당을 어느 정도 통제했고, 무당에게 ‘무포세’라는 세금을 부과하며 의료와 자연재해 타계를 위한 의례를 맡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무속은 일정 부분 공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았다.
무속이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근대 이후였다. 과학의 발달과 합리성, 이성을 강조한 ‘근대’가 조선 말 외세에 의해 이식되면서, 무속은 미신이자 잘못된 무엇인가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특히 근대의 조선 이식에서 선봉장 역할을 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무속을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보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민족말살정책,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박정희 독재정권의 ‘조국 근대화’라는 경제 개발 과정에서 무속은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신군부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무속의 일부가 공적 영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유입은 ‘문화’, ‘민속’이라는 이름이지, ‘종교’라는 이름은 아니었다. 과거처럼 마을제를 지내고 마을 주민의 고충을 상담하는 기능이 아닌,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속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무속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무의식 어딘가에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속은 문화재로서의 공공적 성격과, 주술·예언·점사 기능으로서의 사적 영역 사이에서 공존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유행하며 이제 AI가 점을 보는 시대다. 과학, 이성, 합리성이 주류를 이루며 공적인 영역은 시민들이 따라야 하는 엄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무속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시 윤석열 정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공적인 정책은 법적 근거와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주술이 정책 시행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시대다. 그렇다고 정책을 시행하는 사람이 무당, 점술사 등 주술 전문가의 조언을 절대 들어선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필자가 겪은 해프닝도 다시 떠올려보자. 무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는가? 일부 무업 종사자들이 이를 위해 노력했고, 나름의 결실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무당들 특유의 “내 신령님이 최고!”라는 태도는 무속의 공적인 체계 확립을 위한 논의의 장을 여는 데 한계가 됐다. 굳이 공적 체계를 만들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상태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최근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무속은 다시금 이상하고 제거해야 할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을 ‘무속정권’이라 명명하고, 그를 비판하기 위해 무속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가 상영을 앞두고 있다. 언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속을 시청률과 조회수 상승을 위한 소재로 삼고 있다. 무당도 욕망을 지닌 인간이기에, 정권과 유착해 이익을 추구하는 무당, 종교의 자유와 특수성 뒤에 숨어 종교적 신념이 아닌 사기로 금전적 이익을 노리는 무당도 있다. 유튜브 등 SNS를 활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무당도 있으나, 이는 극히 일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이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무당을 찾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이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무업을 이어가는 평범한 무당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