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상처 입은 이들의 가장 조용한 연대기, 연극 ‘렛미인’

2025-07-16     최두진 객원기자
연극〈렛미인〉공연 장면 [사진 제공=TOV컴퍼니]

【투데이신문 최두진 객원기자】2025년 여름, 무더위 속에 조용히 귀환한 한 편의 연극이 있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7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무대에 오르는 연극 〈렛미인〉은 2016년 초연 이후 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관객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면서도 동시에 데워주는 이중적인 감정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 연극은 초자연적 소재인 ‘흡혈귀’를 다루지만, 정작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감정인 외로움과 소속감, 그리고 무조건적인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작품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 『Let the Right One In』과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하며, 잭 손 감독의 2013년 미국 연극판을 원안으로 무대화됐다. 한국에서는 2016년 초연 이후 정서적 밀도와 연출 완성도로 평단과 관객의 고른 찬사를 받았다. 2025년 공연에서는 연출가 이지나가 초연을 그대로 이어가며 ‘움직임과 감정의 정밀한 조율’로 이 이야기를 다시 무대 위에 불러냈다.

무대는 한적한 자작나무 숲과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다. 계절은 겨울. 설원 위에 펼쳐지는 하얀 풍경은 차갑고 침묵에 잠겨 있다. 이 배경 위에 학교폭력과 가족의 무관심으로 고립된 소년 오스카(천우진)와 영원히 늙지 않는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백승연)의 만남이 시작된다. 오스카는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외로움을 견디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라이의 등장은 그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던진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의 피를 마셔야 사는 존재임을 감추지 않으며, 동시에 오스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던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가장 전율을 일으키는 장면은 무대 위 수조 연출이다. 조니를 비롯한 학교 괴롭힘 가해자들은 체육교사조차 외면하는 가운데 오스카를 수조에 가둔다. 실제로 무대 위 수조에 물이 채워지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오스카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수조 위에 울려 퍼지는 비명과 물소리, 움직임만으로 긴장과 공포를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침묵을 뚫고 등장하는 이는 바로 일라이다. 그녀는 오스카를 구하기 위해 또 한 번 사람을 죽인다. 이 장면은 단순히 잔혹한 살인이 아니라 감정의 최후선에서 건네는 ‘동행의 손짓’처럼 느껴진다. 해당 장면은 연극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로 기능하며, 동시에 이후 결말에 대한 복잡한 여운을 남긴다.

연극〈렛미인〉공연 장면 [사진 제공=TOV컴퍼니]

무대 연출은 매우 절제돼 있다. 자작나무 숲과 설원의 무대는 철저히 간결하면서도 시적으로 구성돼 있으며, 조명은 계절의 시간감을 넘어 감정의 농도를 시각화한다. 특히 눈의 질감과 바람의 방향을 조명으로 표현한 순간들은 자연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용한 움직임, 느린 보폭,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은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오스카 역의 천우진 배우는 이 작품의 핵심인 ‘침묵 속 외침’을 완성도 높게 구현한다. 그의 시선, 떨림, 도망치듯 걷는 동작 하나하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청소년기의 불안과 단절을 오롯이 전해준다. 일라이 역의 백승연 배우는 무표정한 얼굴과 낮은 음성으로 인간과는 다른 생물의 시간성과 감각을 세밀하게 전달한다. 두 배우의 ‘비언어적 연기’는 이 작품이 지닌 정서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칸(지현준)이라는 존재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랜 시간 일라이 곁을 지켜온 인물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녀에게 헌신하지만 결국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진다. 이 인물은 결말의 복선처럼 기능한다. 관객은 연극이 끝날 무렵 오스카와 일라이가 함께 떠나는 기차 안을 보며 질문하게 된다. “오스카도 언젠가는 하칸처럼 되지 않을까?”, “이 사랑은 과연 누구에게도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 결말은 행복한 해피엔딩도, 완전한 비극도 아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감싸 안은 두 존재의 동행이 있을 뿐이다. 그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연극 〈렛미인〉은 단순한 뱀파이어 판타지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이자, 상처 입은 이들의 가장 조용한 연대기다. 이 연극이 특별한 이유는 그 고요함 속에 담긴 진심 때문이다. 대사를 줄이고 동작을 절제하며 감정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오히려 인간 내면의 깊이를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외로운 사람과 외로운 존재가 어떻게 서로의 세상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조용히 지켜보는 이 연극은 감각적인 무대와 깊이 있는 연기로 관객에게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사랑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동행 자체가 사랑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관람한 뒤 우리는 다시금 물어보게 된다.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