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이정표⑤] “발달지연 아동 치료, 경제력 아닌 권리입니다”
가정의 경제력이 아이의 발달 기회 결정하는 사회 ‘발달지연 아동 권리헌장’이 밝힌 아동 발달 미래 공공과 민간의 틈새, 치료 접근성의 현실적 문제 건강보험 급여화, 조기 개입 출발선 될 수 있을까 시범사업서 제도화까지…평등한 치료권 실현의 길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질병분류(ICD-10)는 ‘발달지연’을 코드 R620, 즉 ‘지연된 이정표(Delayed milestones in childhood)’로 분류한다. 또래보다 느린 발달지연은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그 ‘느린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단과 치료 개입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공적 시스템은 느리고 복잡하며,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마지막 희망이던 민간 보험마저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절박함이 시장의 틈새로 흘러들어간다는 점이다. 난립하는 발달센터부터 보험사기에 이르기까지,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민간 시장은 활발히 움직이지만, 정작 부모들은 믿고 의지할 곳을 찾기 어렵다. 일부는 ‘사적 해결’을 택하고, 어떤 이는 결국 포기한다. 그 사이 아이의 치료 ‘골든타임’은 조용히 사라진다.
본보는 발달지연을 겪는 다섯 가족의 여정을 통해, 진단과 치료 접근의 어려움부터 비용 부담, 정보 비대칭, 공적 지원의 한계, 민간 치료 시장의 그늘, 그리고 제도 밖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가족들의 현실을 추적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단 개인의 고통이 넘어 우리 사회가 발달 문제를 어떻게 방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모든 아동은 최상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발달을 이룰 권리가 있습니다. 발달지연 아동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해 7월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발달지연특별위원회 등 시민사회 단체가 서울 코엑스에서 공동 발표한 ‘발달지연 아동 권리헌장’에 담긴 구절이다. 이는 단순한 선언을 넘어, 제도 사각지대에 놓인 수만 명의 발달지연 아동과 가족의 절박한 현실을 사회에 알리고 근본적 변화의 필요성을 촉구한 외침이었다.
헌장 발표 배경에는 열악한 치료 접근성, 미적용된 건강보험, 그리고 분절된 정책체계가 맞물린 복합적 문제가 존재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자폐 스펙트럼 아동은 약 3만6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전국 11곳 거점 행동발달증진센터에서 실제 치료받는 아동은 연간 약 1100명으로 전체의 3%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다수는 고비용의 민간 치료기관에 의존하거나 비용 부담으로 치료 자체를 포기하는 상황이다.
치료비 급여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치료 접근성은 오롯이 가정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 현행 건강보험은 이 영역에 사실상 적용되지 않으며, 공공 지원은 제한적이고, 의료·복지·교육 분야의 정책은 각각 분절적으로 운영된다. 부모들은 아이의 발달 가능성이 가장 큰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과 마주한다. 권리헌장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사회적 선언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제기된 문제의식은 이후 본격화된 급여화 논의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고, 단순한 치료비 문제가 아닌 ‘발달 기회의 평등’이라는 보다 넓은 사회적 의제로 확장되고 있다.
본지는 [지연된 이정표] 연속 보도를 통해 발달지연 치료비 문제의 실태와 구조적 한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뤄왔다. 현장에서는 치료비 부담이 양육자의 생존 문제로 직결되고, 제도 밖 사각지대와 민간 보험의 지급 거절 사례가 겹치면서 아동의 기회가 경제력에 따라 갈리는 구조적 불평등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대한민국에서 발달지연 아동을 둔 가정은 한 차례에 십만원이 넘고 월평균 수백만원에 이르는 치료비 부담에 직면한다. 일부 가정은 이로 인해 치료 빈도를 줄이거나 아예 중단할 수밖에 없다. 공공의료 바우처는 월 15만~25만원에 그쳐 전체 치료비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며, 지원 대상의 연령과 선정 기준도 협소하다.
민간 실손보험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등재 진단코드나 치료기관 자격 기준이 맞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이 거부되고, 이로 인해 보험사와 부모 간 분쟁이 반복된다. 지급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보험금 지급 여부가 치료기관이나 치료사 자격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에서 가족들은 혼란에 빠진다. 긴급 개입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대기 기간과 높은 비용, 정보 부족 등 장벽으로 인해 적절한 개입이 지연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기회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맞벌이 가정 월소득의 3분의 2가 치료비로 소진되는 사례도 적지 않으며, 결국 치료의 지속성과 서비스 질이 부모의 경제력에 직접 종속되는 구조가 고착화된다.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은 부모의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아이는 가장 중요한 발달 시기를 놓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기존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조적 허점이다. 무자격 치료사와 불법 의료기관 난립, 불투명한 비용 청구 구조, 공공과 민간 사이 책임 회피 등으로 인해 현장은 더욱 혼란스럽고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해결책 없이 병목 상황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최근 정치권과 정부 일부 부처 내에서도 구조적 재검토와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아이의 기회, 통장 잔고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지난 3일 국회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발달지연 및 발달장애 아동 치료비 보장체계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부모들과 전문가, 기관 담당자와 국회의원이 참여했다. 돌봄의 무게와 경제적 절벽, 행정의 벽 앞에서 무너진 현실들이 증언대 위에 올라왔다.
이소희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발달지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치료의 강도가 왜 가정의 소득수준에 따라 정해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생애 첫 기회가 돈의 논리에 맡겨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현장에 참석한 발달지연 아동 아버지 김희준 씨도 “병원비와 치료비는 늘 한계치를 넘고, 바우처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보험에는 늘 거절당하고요. 부모도, 아이도 점점 지쳐갑니다”라고 토로했다.
현장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경제력에 따라 아이의 기회가 제한되는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공지원 확대와 ‘기회의 평등’을 실현할 국가 책임 강화가 절실하다는 요구였다.
토론회에서는 정부, 국회, 시민사회, 전문가가 각자 제도 개선을 위한 구체적 해법을 제시했다.
가장 먼저 진단 기준과 적용 범위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DSM-5 기반 진단코드 체계를 세분화하고, 진단이 확정되지 않은 경계성 발달지연 아동이나 경증 아동도 조기에 치료비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진단 중심 제도는 도움을 받기 위해 ‘더 아프다’는 증명을 요구하며, 조기개입 원칙과도 모순된다는 비판이다.
치료 인력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와 자격제도 도입도 거론됐다. 현재 민간자격 치료사의 서비스가 의료법상 무면허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실손보험 청구가 거절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치료사에 국가자격제를 도입하고, 치료 질과 안전성을 국가가 일정 기준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특히 과학적으로 검증된 치료 행위 기준을 설정해 단기적 소비가 아닌 장기적 개입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건강보험 급여화에 필요한 예산 확보와 실손보험 등 민간 보장제도와 공공 시스템 간 연계 정비도 제안됐다. 민간보험과 의료현장 간 기준 차이가 방치되면 실손보험은 역할을 못 한다는 지적에서다.
이에 공공과 민간 지급 기준 명확화 법제화, 정보 투명성 제고, 보험금 지급 거절 사례 분쟁 조정 기능 마련, 보호자 대상 치료비·진단·행정절차 정보 실시간 확인 플랫폼 구축 필요성도 함께 제기됐다.
가족 지원 체계도 중요한 과제로 꼽혔다. 보호자들은 치료비뿐 아니라 정서적 부담, 정보 부족, 행정 소외를 겪고 있다. 가족 대상 심리상담, 정보 제공, 권리 교육 등 실질적인 ‘동반자 지원’도 필요한 이유다.
정치권도 응답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아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차별받지 않고 필요한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부모가 치료비 걱정 없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국가 책임 강화를 촉구했다.
남인순 의원은 “발달지연과 장애 아동의 조기 개입과 치료를 사회가 공동 책임져야 할 시점”이라며 민간 위주 지원에서 공적 보장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은 “발달지연 아동의 조기진단과 치료는 아이 인생에 중대한 영향이지만, 치료비 부담이 온전히 가족에게 전가되고 있다”며 “실손보험 청구 과정에서 빈번한 분쟁 등 제도 한계가 명확하다. 치료를 필수 의료로 규정하고, 건강보험 급여화와 실손보험 지급 기준 정비, 치료 인력 자격 관리 등 제도 전반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국회의원들은 치료비 부담 완화와 조기 치료 지원을 위한 국가 책임 강화에 뜻을 모으며, 입법과 예산, 보험 제도 정비 등 실질적 변화를 약속했다.
전문가들 “아동 발달 골든타임, 국가가 결단해야 할 순간”
전문가들도 아동 발달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조기 개입과 공적 지원 강화가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치료 접근성 개선 없이는 아이들의 성장과 미래에 심각한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다.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한은희 부회장(김포 우리소아청소년과 원장)은 발달지연 아동 치료 접근성 문제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현행 실손보험 체계와 진단 코드 제한으로 많은 발달지연 아동이 필요한 조기 개입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진단명이 치료 필요 판단 기준이 돼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
한 부회장은 “발달지연 치료는 개인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과제”라며 “실손보험 보장 대상에서 제외되는 치료비 때문에 수많은 부모가 매일 불안과 부담 속에 고통받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치료비 급여화 등 공공의료 체계를 정비하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치료 접근성 향상을 위해 민간과 공공보험 간 연계 강화와 치료 서비스 질 관리 및 표준화도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며 “사회가 발달지연 아동과 가족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과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미수 서울디지털대학교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부모들이 혼란과 경제적 부담 없이 필요한 치료를 받도록 제도 개선과 정보 제공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달지연 아동의 놀이치료 등 병원 내 치료가 모두 보험금 지급 대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제도적 한계도 있겠지만, 보험사 또한 가입 단계부터 보장 범위와 제외 대상에 대해 명확히 안내해야 한다”
최 교수는 “보험 가입 시 치료별 보장 여부를 소비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 의무를 강화하고, 치료 시작 전 해당 치료가 보험금 지급 대상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며 “민간자격 치료사의 역할이 확대되는 현실을 반영해 국가 차원의 관리·감독 체계를 구축하고, 일정 기준 충족 민간자격 치료에 제한적이나마 보험 보장을 허용하는 중간적 방안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발달지연 치료와 관련해 보험사가 부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방향으로 공공보험과 민간보험을 연계하는 포괄적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부연했다.
이은영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조기 치료가 개인과 가족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다.
“조기개입 치료를 사회적 비용으로 인식하고, 국가가 공적 보장제도를 통해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의 발달지연 치료비 급여화와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 지원금 현실화를 통해 공적 조기개입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로 보인다.”
이 연구위원은 “치료 품질 확보와 과도한 민간 부담 완화, 시장 투명성 제고를 위해 치료서비스 시장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감독이 요구된다. 이를 통해 가족들이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으며, 불필요한 비용 부담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공공과 민간 보험, 서비스 공급이 조화롭게 작동할 때 발달지연 아동 치료 접근성이 높아지고, 사회 전체 복지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권과 사회, 입법의 변곡점을 맞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현장 요구에 화답하는 입법이 잇따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송석준 의원은 지난해 10월 ‘발달지연아동 치료지원법’을 발의했다. 발달지연 아동 치료비 건강보험 급여화 근거 마련, 치료사 국가자격제 도입, 지역 공공 치료센터 설치 의무화 등을 핵심으로 담았다. 송 의원은 같은 해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발달지연 아동에게 치료비는 곧 아이의 삶이며, 이는 개인 책임을 넘어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시스템 문제”라며 정치권 결단을 촉구했다.
국민의힘 김영수 의원도 같은 해 12월 ‘아동발달지원법’ 개정안을 통해 기존 장애아동 중심에서 진단 미확정·경계성 아동까지 지원 범위를 확장했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지난 1월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해 발달지연 관련 치료를 건강보험 급여 대상에 포함하는 근거 조항을 신설했다.
중앙정부와 별개로 지방자치단체의 시범사업도 실질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전국 최초로 ‘발달지연아동 치료비 지원 조례’를 제정해 2025년 4월부터 중위소득 200% 이하 가정에 월 최대 40만원 치료비를 지원 중이다. 실제 지원받는 부모는 “아이 치료 횟수를 늘릴 수 있어 삶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경기도,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등도 올해 안에 조례 제정을 추진하며 관련 예산을 확보했다. 이들 지자체들은 전국 단위 공공 치료비 급여화 정책이 실행될 때까지 선제적 완충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산 부족’과 ‘정책 일관성 미흡’, ‘치료 인력 양성 및 관리 체계 부재’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치료비 급여화 범위, 대상, 서비스 질 보장, 민간보험과의 조율 등 세부 정책은 현장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재원 확보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박양동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이사장은 “결국 발달지연 아동 치료비 문제는 단순한 복지 대상 선정의 문제를 넘어 모든 아이에게 평등한 발달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 구조의 핵심 축으로 평가된다”며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국가와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근본적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