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그 너머를 말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대학의 역할 – 민주적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주의, 그 너머를 말하다 – 대학생이 진단하는 민주주의의 현주소와 과제’ 토론회는 청년 세대가 직접 발제자로 나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대안을 모색한 자리였다. 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의 여름방학 프로그램인 ‘링크로스 아카데미 2기’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직접 기획한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대학생들의 시선에서 도출된 문제 인식과 대안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동시에 미래의 방향을 가늠할 단초를 던졌다. 투데이신문은 청년의 목소리가 담긴 이번 논의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들어가는 말
민주주의를 둘러싼 담론은 그 정의만큼이나 다양하고 논쟁적이다.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는 민회를 통해 공동체의 운명을 직접 결정하는 체제였으나,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든 시민의 직접 참여는 불가능해졌다. 이로써 현대 민주주의의 논의는 선거, 대의제와 같은 절차적 장치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1987년 한국 사회는 시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며 민주주의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완성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갈등 조정 능력이 약화되는 징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은 이러한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연세대 청소노동자 처우 개선 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형사 고발, 인권자치기구의 폐지 압박 등은 민주주의가 더 이상 제도적 절차만으로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구성원 간 갈등이 공적으로 조정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는 현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정치 제도에 국한하지 않고, 일상의 관계와 삶의 방식 속에서 구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살펴보고, 대학이 ‘민주주의 학교’로 기능하기 위한 과제를 모색한다.
거시적 차원: 정치와 사회의 괴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보통선거권이 투쟁 없이 주어진 반면, 반공주의를 토대로 강력한 국가가 탄생하면서 정당들은 이념적 다양성을 상실했다. 여야 모두 보수적 틀 안에서 경쟁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시민사회와 정당은 괴리됐고, 군사정권 하에서도 기존 정치 엘리트의 기득권은 유지됐다. 이러한 과정은 정치가 사회경제적 현실과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제도로 머물게 했다.
미시적 차원: 생존주의적 근대성
정치가 삶과 유리되자 그 자리를 개인의 생존 문제가 대체했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가 강화되면서 ‘생존주의적 심성’이 확산됐다. 청년 세대에게 취업은 절박한 과제로 떠올랐고, 정상적인 삶의 경로는 불확실한 과업으로 변모했다. 삶이 ‘탈-표준화’되면서 평범한 안정을 얻기 위해서조차 치열한 경쟁이 요구됐다.
이러한 생존주의는 사회적 관계와 가치를 무한 경쟁의 논리로 환원시킨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동체적 가치나 공공선은 무력화되며, 서바이벌은 청년 세대가 삶을 이해하는 핵심적 틀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과 긴밀히 연동된 사회적 현상이다.
삶으로서의 민주주의
이러한 위기를 넘어서는 길은 민주주의를 제도적 절차에 가두는 데서 벗어나, 삶을 조직하는 실천과 관계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규칙과 제도가 특정 집단에 체계적 불이익을 주는 상황을 ‘구조적 부정의’로 개념화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정치적 책임을 요청한다. 즉, 공동체 내의 불의한 구조를 의식하고 바꾸려는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중요한 생활세계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대학이 ‘민주주의 학교’로 거듭나려면
대학은 개인이 타자와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민주적 관계 맺기 방식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곳에서 형성된 사회적·정치적 감수성은 이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은 생존 경쟁 논리에 잠식돼 구성원들이 공동체적 문제보다는 개인 성과와 진로에 몰두하게 됐고, 민주적 공론장의 토대가 약화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를 민주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먼저, 대학 평의회를 실질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 현재 대학 내에서 교직원을 대표하는 평의회는 부재하고 유사한 역할을 하는 노동조합 또한 모든 대학에 보편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아, 노동·사무 부문의 의견은 제도적으로 반영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또한 학생 평의회에 해당하는 학생회의 경우 전술한 탈정치화 경향으로 인해, 대부분의 의제가 복지나 편의시설 개선 등 생활 편의 중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성소수자, 장애인, 저소득층 학생 등 소수 집단의 경험과 요구는 상대적으로 배제되거나 가시화되지 못한다. 따라서 소수자 의제를 포함한 다양한 목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총장 직선제의 민주화가 요구된다. 현재 일부 대학에서 교수, 직원, 학생이 참여해 총장 후보를 선출하지만, 구성원 간 의결의 반영 비율이 불균형하고, 총장의 최종 임명권은 소수에게 위임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총장 직선제를 보다 민주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구성원 참여를 보장하고 공동체 내 권한과 책임 분배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전술한 제도적 개선 뿐 아니라, 학습 문화의 변화 또한 필요하다. 현재 대학은 학점·스펙 중심의 경쟁 문화에 치우쳐 비판적 대화와 공동 탐구의 가능성이 약화되어 있다. 강의실뿐 아니라 동아리, 학술제, 학내 언론, 학생회 등 다양한 장에서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사회적 의제화가 이루어질 때, 대학은 민주주의의 생활세계로 거듭날 수 있다.
결론
민주주의는 제도적 장치나 권력 구조 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대학은 이를 학습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생활세계의 장이다. 구성원들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공동의 문제를 민주적으로 다루는 경험을 축적할 때, 민주주의는 추상적 원리를 넘어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된다. 결국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제도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