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성의 혁신수업] 리더가 남길 유산, 바통을 온전히 건네는 일
가을 하늘이 높다. 계절이 바뀌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호흡을 돌아본다. 조직의 리더에게도 그런 점검의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언어를 철인 3종경기에서 배웠다.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한 번에 이어 달리는 종목, 그 안에도 개인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바통을 이어가는 릴레이가 있다. 각자의 구간을 맡아 달리지만 결국 목표는 팀의 완주다.
몇 해 전, 필자는 한강에서 열린 철인 3종 릴레이에 참가해 사이클 구간을 맡았다. 팀 동료들은 수영과 마라톤을 담당했다. 준비 과정에서 곧 깨달은 사실이 있다. 팀에서 가장 찾기 어려운 자원이 바로 ‘수영 주자’라는 점이다. 릴레이는 세 구간이 모두 제시간에 통과돼야만 완주할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늦으면 팀 전체가 실격이다. 게다가 전환 구간에서는 정해진 자리에서 칩을 정확히 건네야만 경기가 이어진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의 본질은 내가 맡은 구간을 잘 달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온전히 넘겨 팀 전체가 완주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철인 3종 릴레이에서 배운 감각을 빌려, 리더가 후계자를 키울 때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정리해 봤다.
1. 코스를 함께 보는 겸손
철인 3종에서 코스 정보는 곧 생명줄이다. 수온과 유속, 바람의 방향, 오르막과 내리막의 비율까지 팀이 함께 아는 만큼 실수가 줄어든다. 조직도 다르지 않다. 고객, 파트너, 규제, 내부 의사결정의 기준, 실패의 이력은 리더 개인의 노하우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써야 할 자산이다. 회의록과 의사결정 과정, 대외관계의 맵을 남겨두면 후임은 같은 길을 더 적은 시행착오로 달릴 수 있다. 겸손은 미덕의 차원이 아니라 시스템을 세우는 출발점이다.
2. 전환 구간을 설계하는 기술
철인 릴레이는 전환 구간에서 승부가 갈린다. 수영에서 사이클로, 사이클에서 마라톤으로 이어질 때 짧은 순간의 질서가 전체 기록을 좌우한다. 조직의 승계도 다르지 않다. 다음 구간이 흔들림 없이 이어지도록 전환을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3. 병목을 짚는 통찰
철인 팀에서 가장 귀한 자원은 수영 주자였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대외 신뢰를 세우는 대변인, 내부를 조율하는 조정자, 리스크를 관리하는 재무 담당처럼 각 조직마다 병목이 되는 역할이 있다. 그 자리를 먼저 규정하고, 후보를 별도 트랙에서 집중 육성해야 한다. 드문 자원일수록 훈련과 그림자 업무를 강화할 때 전환의 충격이 줄어든다.
4. 공정을 장치로 만드는 규범
릴레이는 기록과 규정이 투명하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직의 승계에는 사적 호불호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그래서 공개 프로젝트, 명확한 평가 기준, 교차 멘토링 같은 제도를 통해 기회를 구조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공정함이 선의가 아닌 ‘장치’로 구현될 때 승계는 건강해진다.
5. 실패를 학습으로 바꾸는 관용
전환 훈련에서는 실수가 반드시 나온다. 철인 경기에서 칩을 떨어뜨리면, 속도가 과했는지 손이나 발목 위치가 어긋났는지 원인을 따져본다. 조직도 같다. 실패 보고는 벌점이 아니라 학습의 기회다. 원인·과정·결과를 기록하고, 재발 방지 설계를 후보자가 직접 주도하게 해야 한다.
6. 80%에서 건네는 절제
많은 리더가 최고의 순간에 물러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는 일만 남는다. 그래서 스스로 80%에 이르렀다고 판단될 때 후계자를 키우고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 최근 만난 한 중소기업 CEO는 “나이가 70에 가까워지니 판단력도 흐려진다”며 후계자 고민을 털어놓았다.
7. 보이지 않는 끈을 끊는 결단
명패만 바꾸고 뒤에서 전화와 메시지로 지휘하는 ‘그림자 리더십’은 릴레이의 규칙 위반과 같다. 대외 창구를 후임으로 단일화하고, 서명 권한을 재정의하며, 이해 관계자에게 후임을 공식 소개해야 한다. 조언은 요청이 있을 때만, 그것도 비공개로 1:1에 한정한다. 떠난 자리가 공백이 아니라 질서로 채워질 때 전환은 비로소 완성된다.
8. 사회적 가치의 연속성
영리조직은 성과 지표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사회복지·사회적경제 조직의 핵심은 이용자의 존엄, 지역사회의 신뢰, 윤리의 준수 같은 사회적 가치다. 후임자는 숫자뿐 아니라 이 ‘가치의 언어’를 물려받아야 한다. 미션 스토리, 의사결정 원칙, 윤리 가이드라인을 문서와 사례로 남겨야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다.
9. 리더에게 남는 한 문장
“언젠가는 내려온다. 그렇다면 내가 서 있을 때, 다음 사람이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길과 표식을 남기라.” 철인 릴레이의 목표는 ‘내 구간의 기록’이 아니라 ‘팀의 완주’다. 리더의 덕목도 같다. 코스를 공유하는 겸손, 전환을 설계하는 기술, 병목을 짚는 통찰, 공정을 보장하는 규범, 실패를 학습으로 바꾸는 관용, 80%에서 건네는 절제. 이런 덕목이 모여 후계자를 키우고, 조직은 더 멀리 달리며 지속가능해진다.
다가오는 한가위, 가족과 함께 평안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구간과 다음 주자의 구간을 함께 그려보면 좋겠다. 완주보다 더 값진 일은 바통을 온전히 건네어, 다음 주자가 더 멀리 달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더의 의무이자 우리가 남길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