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성의 혁신수업] 군자무본(君子務本), 근본에 힘쓰는 삶
가을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 하여 예로부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불렸다. 하지만 요즈음의 가을은 예전처럼 길게 머물지 않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사계절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짧은 가을의 여유는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겨울의 찬바람에 밀려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한 점 스며드는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 문득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몇 해 전, 명절에 서예가이신 장인께서 한 점의 작품을 내게 건네주셨다. “이 작품은 강서방이 가지고 있어라.” 그 말과 함께 내 손에 쥐어진 서예작품에는 ‘군자무본(君子務本)’이라는 글귀가 힘 있게 새겨져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거실 벽에 걸린 그 작품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림이 일어난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유자왈(有子曰) 군자무본(君子務本),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즉 “유자가 말했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본(本)’은 단지 뿌리나 기초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람됨의 근간’, ‘삶의 중심축’을 의미한다. 인격, 도덕, 그리고 가치관이 바로서야 바른 길(道)이 생기고, 그 길 위에서 인생의 방향이 선명해진다.
장인께서 이 작품을 내게 주신 것은 아마도 단순한 예술품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근본을 잃지 말라는 묵묵한 가르침이었으리라.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 그분을 떠올리면,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유언처럼 가슴 깊이 파고든다.
인간의 삶을 무대에 비유하는 철학자는 많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인생을 한 그루의 나무로 보고 싶다. 봄에 새잎이 돋고 여름에 무성한 가지가 자라며, 가을엔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단단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약하면 아무리 무성한 잎도, 탐스러운 열매도 오래가지 못한다.
조직의 리더도 마찬가지다. 직함이나 권한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존중하고 신뢰를 세우는 ‘뿌리의 힘’이 그 사람의 진가를 결정한다. 근본이 바로 선 리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화려한 열매를 자랑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토양을 가꾸고 뿌리를 깊게 내리는 일에 힘쓴다.
인생을 무대로 이야기한 것으로 되돌아 가보면, 어떤 이는 리더로, 또 어떤 이는 부모로, 혹은 동료나 친구로서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배역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가이다.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객은 감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원 각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할 때 그 조직은 하나의 작품처럼 조화를 이루며 빛난다.
그렇다면 나는 내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가. 리더로서의 책임, 동료로서의 진심, 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온전히 지켜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AI, 디지털 전환, ESG, 지속가능성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쏟아지고, 조직은 끊임없이 혁신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혁신이란 결코 ‘근본의 해체’가 아니다. 오히려 근본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의 출발점이다.
군자무본의 가르침은 지금의 리더들에게 더욱 절실하다. 조직의 정체성, 사람에 대한 존중, 신뢰와 윤리의 기반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전략과 비전이 있어도 그 길은 오래가지 못한다.
리더가 중심을 잃지 않아야 조직의 방향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가능하다. 돌아보면 나 역시 수많은 무대를 살아왔다. 영리기업에서의 30년, 사회적기업에서의 10여 년, 그리고 비영리기관의 리더로서 또 다른 10여 년.
각 무대마다 역할은 달랐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과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나의 ‘본(本)’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위하고, 함께 성장하고, 서로의 가능성을 믿는 일. 그 근본이 흔들리지 않는 한, 어떤 변화의 파도도 넘을 수 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거실의 작품 앞에 서서 장인의 글씨를 바라본다. 굵고 단단한 획 하나하나에는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의 품격이 배어 있다. 그 글귀는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군자는 허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근본에 힘써라.”
인생의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배우이지만, 그 연기의 본질은 진정성(Authenticity)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스스로의 ‘본’을 지켜내는 삶, 그것이 바로 군자의 길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