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노의 뉴스 피처링] 이재명의 시정연설, 그리고 정청래의 ‘숨은 발톱’
대통령실, 민주당 재판중지법 추진에 공개 제지 “‘너무 앞서가는’ 정청래 대표에 경고장 날린 것” 해석도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충돌은 이재명 대통령의 ‘숙명’
하루 10분, 오늘의 주요 이슈를 사실-맥락-관점의 세 축으로 풀어드립니다. 음악에서 ‘피처링’은 협업과 도움을 뜻하고, 저널리즘의 Feature는 단순 속보가 아닌 깊이 있는 맥락과 스토리를 다룹니다. 〈뉴스 피처링〉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담아 뉴스의 본질과 함의를 알기 쉽게 풀어내 여러분의 뉴스 생활을 입체적으로 피처링 해드리겠습니다.
【투데이신문 성기노 기자】11월 4일 이재명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대통령실의 ‘성공’ 자평 속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1년에 한번 짓는 이 ‘농사’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그 흔적도 보입니다.
사실 대통령 시정연설을 전후로 더불어민주당이 ‘재판중지법’을 전격 추진하기로 하다가 대통령실 ‘명령’으로 입장을 번복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재판중지법을 두고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대표 간의 ‘당대 갈등설’도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내막과 배경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에 나가 발언을 하고 싶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예산안 제출 시’ 국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이는 헌법 제84조 “대통령은 예산안 제출 시 국회에 출석하여 시정연설을 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합니다.
예산안이 국회로 넘어가는 매년 9~10월 무렵에 정부가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대통령이 직접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국회 연설입니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단순한 ‘예산안 설명’ 자리가 아닙니다. 이는 헌법 제84조가 규정한 대통령의 국회 연설권 중 유일하게 법적 근거를 가진 정치행위입니다. 정권의 철학과 향후 1년의 국정운영 방향을 압축해 보여주는 ‘정치적 선언문’이자 대통령에게는 고도의 정치행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대 대통령들은 이 시정연설을 자신의 존재감과 리더십을 드러낼 ‘정치무대의 절정’으로 여겨왔습니다. 국회에 가서 대통령 폼도 한번 잡고 싶고, 또 국정 최고 지도자로서 국회의원들과 소통을 하며 통합의 정치를 실현해보고 싶은 욕심도 많이 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시정연설에 담긴 의미가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 보니 역대 대통령들은 이 행사에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노무현은 “정치가 국민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철학을, 이명박은 “실용정부”, 박근혜는 “창조경제”, 문재인은 “포용국가”를 각각 시정연설을 통해 선언했습니다. 이렇듯 시정연설은 단지 예산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권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의례이자 여야 관계를 ‘정립’하는 정치행위로도 간주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윤석열에게는 이 시정연설이 비상계엄령의 ‘트리거’가 돼 버렸습니다. 정치 신인 윤석열의 당선을 바라보는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시선은 차갑고 냉담했고, 은연중 ‘초짜’를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2022년 취임 첫 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은 윤석열은,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민주연구원 압수수색 등 야당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감사에 반발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보이콧하고 로텐더홀에서 규탄 집회를 여는 상황을 몪도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야당의 ‘폭거’로 엉망이 되는 상황을 접한 윤석열은 그 성정 그대로 ‘격노’했을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비상계엄 뒤 진행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윤석열은 지난 2월12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7차 변론기일에서 “제가 취임할 때 야권은 선제탄핵을 주장하며 계엄 선포 전까지 무려 178회 퇴진과 탄핵을 요구했다. 예산안 기조연설을 하러 가면 아무리 미워도 그래도 (대통령의) 얘기를 듣고 박수 한번 쳐주는 게 대화와 타협의 기본인데 제가 취임하고 갔더니 아예 로텐더홀에서 (야당이) 대통령 퇴진 시위를 하며 의사당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여당 의원만 보고 반쪽짜리 예산안 기조연설을 했다”고 말했다. ‘뒤끝 작렬’의 멘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뒤의 결과는 국민들이 이미 목도한 그대로입니다. 대통령 시정연설이 뭐라고 대통령들이 그렇게 국회의원들의 반응과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지적도 있겠지만, 윤석열은 당시 민주당 의원들의 ‘국회 보이콧’ 때문에 비상계엄이라는 헌정질서 파괴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물론 야당의 시정연설 보이콧이라는 동기 하나만으로 윤석열이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는 야당이기에 ‘언젠가는’ 확실히 손보겠다는 복수심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당이 무시한다고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하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처럼 시정연설은 국가 존망을 좌우할 정도로 민감하고 예민한 정치행위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시정연설은 참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윤석열처럼 국회에서 폼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취임 후 처음 맞이하는 자리인데다 AI강국이라는 그랜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예산안 설명 자리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상당히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에서 APEC 직후 자신의 사법특혜 논란이 일고 있는 ‘재판중지법’을 ‘국정안정법’이라는 희한한 단어로 바꾸며 ‘강행’하려 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자 화들짝 놀랐습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이 추진하던 재판중지법을 강훈식 비서실장을 직접 브리핑룸에 세워 중지시키는 정치적 강수를 뒀습니다.
아마 정청래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재임 중 사법리스크 지뢰를 완전히 제거하고 어찌 보면 ‘꽃길’을 깔아주려는 ‘선의’로 진행한 일이 대통령에게 꾸중을 듣는 ‘이적행위’로 몰리게 되는 것이 억울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치 8단쯤 되는 정청래 대표가 재판중지법이 통과될 경우 가장 욕을 먹게 될 사람이 바로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APEC 직후 급하게 추진하려 했던 배경에 정치적 저의가 있는 것 아닌가”하며 의구심도 나오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위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위기에 빠뜨리려 한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경계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강훈식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정쟁으로 끌어넣지 말아 달라”고 말한 것과 연결이 되는 지점입니다.
대통령실이 직접 나서서 시정연설 전 불거질 당대 갈등설을 일단 진화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이재명 대통령이 재임하면서 지속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충돌 중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강훈식 비서실장이 정청래 대표에게 “죄송하다”면서 90도로 절을 했다는 것은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갈등과 그 ‘불꽃’이 외부로 퍼져나가려 하는 것을 최대한 억지시키려는 대통령실의 조심스러운 접근일 것입니다.
그동안 정청래 대표의 ‘숨은 발톱’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법개혁을 두고도 대통령실과 긴장 관계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정청래 미래권력이 이재명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급부상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정치 관례상 미래권력의 부상은 대통령 임기가 절반을 넘어서는 시점이거나 특정 선거의 결과에 따라 그 대응책으로 나오기 마련인데 정청래 대표는 그런 시기나 동기를 ‘무시’하고 열혈 지지층을 등에 업고 강경 일변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어차피 국정운영 평가는 당대표가 아니라 대통령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재판중지법 공개 제지는 그동안의 정청래 강경노선을 참다 못한 대통령실의 강력한 브레이크였습니다.
정청래 대표로서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한테 왜 이러나’ 할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눈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에게 모든 정치적 책임과 부담이 전가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면 정청래 대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정청래 대표는 4일 이재명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끝난 직후 이 대통령과 환히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것이 정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