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s⑭] ‘강남역 살인사건’ 9년 지났지만…여전히 혐오 속에 사는 여성들

<올드스(OLDs)> 기억해야 할 열네 번째 소식, ‘강남역 살인사건’ 강남역 사건 이후, 한국 사회, 여성 안전 시대 도래했나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3만 포스트잇이 전한 메시지 ‘여성혐오’ VS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 논쟁 여전 유가족 고통은 현재진행형…정상적인 경제활동 불가해 여성계 “여성혐오 범죄 인식해 국가차원 안전망 구축해야”

2025-11-18     박효령 기자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단어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2016년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사건 피해자 여성을 애도하는 내용의 글들이 남겨져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박효령·권신영 기자】봄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는 어느 5월, 우리 사회에 거대한 돌풍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 폭력과 살인에 저항하려는 열기가 달궈지기 시작됐다. 뜨거운 파도가 가장 먼저 덮친 것은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죽지 않겠다고, 폭력을 두고 보지 않겠다며 열기가 오르기 시작한 거리로 나섰다.

2016년 5월 17일, 오가는 사람이 많고 한밤중에도 간판들의 환한 빛이 거리를 밝히는 서울 중심지 강남역 근처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했다. 당시 30대였던 피의자 김성민은 피해자를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살해했다. 피해자는 20대 초반의 여성, 피의자와 일면식이 없는 인물이었다.

2025년 현 시점 사건이 발생했던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나, 여전히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두려움은 강남역 일대를 지나는 여성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

이 사건으로 대중이 공유한 사회적 충격은 당시 추모 열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다음날부터 강남역 10번 출구 일대는 사람으로 붐볐고, 인파가 떠난 자리에는 각양각색의 포스트잇이 남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그날 우연히 강남에 있지 않아 살아남았다”,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각종 추모 문구 속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독보적인 빈도로 목격됐으며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과 잠재적 피해자로서 겪는 공포에 대한 정서가 포스트잇 내용의 주를 이뤘다. 

이는 피의자 김성민이 범행 이유에 대해 경찰에게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는데, 이 진술이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파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범행 당시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화장실을 오간 총 6명의 남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향한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여성들의 정서적 공감을 산 이후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결집된 추모 운동은 매해 이어져 올해 5월까지도 진행됐다. 5·17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에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살인 사건은 꾸준히 발생했고 애도 물결이 사회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2016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지났다. 한 달 후면 햇수로 10년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라 빗대도 과언이 아닌 이 긴 기간 동안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지난해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8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운동에서 여성들이 노란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강남역 살인사건, 여성운동 물결을 부르다

사건 이후 ‘여성 안전’에 대한 젠더 불평등 이슈가 도마 위에 올랐다. 2010년대부터 끊임없이 발생하던 여성 살해와 폭력 이슈에 대해 허점투성이였던 정부 대처와 안이한 인식에 대한 불만이 해당 사건으로 폭발됐다.

강남역뿐만이 아니었다. 해당 사건으로 시작된 포스트잇 추모 운동은 전국 규모로 퍼지기 시작해 부산, 대구, 전주, 대전 등 지역에서도 진행됐다. 양성평등아카이브여기모아에 따르면 전국에서는 약 3만7100개가 넘는 포스트잇이 기록됐다.

절반 이상의 포스트잇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문구가 적혔고 그 다음으로 많이 남겨진 문구는 ‘고인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됐으며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2016년 대구 지역에서 추모 운동을 개최했던 ‘민뎅(활동가명)’씨는 사건 당시 보건의료인들이 회원들로 있는 단체의 평범한 시민 활동가였다. 그는 국내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한 2015년 관련 독서모임을 구성한 것을 계기로 대구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추모운동에는 독서모임 구성원들이 주로 참여했다.

민뎅씨는 “유동인구가 많고 공간 확보가 가능한 동성로 중앙로역 2번 출구 앞에서 운동을 시작했다”며 “성폭력과 여성 폭력, 여성 살인에 대한 자유 발언부터 시작해 시민들에게 포스트잇으로 메시지를 받는 운동까지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 속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한 마디 제안으로 시작된 그들의 소규모 추모운동은 추후 대구여성회와 지역 여성인권센터 활동가들이 동참하며 규모가 불어났다.

그는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계속 이야기하지만 변화가 여전히 더디고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죽임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운동은 여전히 그 상징성이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러한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는 “죄 없는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불만이 제기됐고 여성들 역시 “남성들은 여성의 안전보다 자신의 감정이 상하는 것만 우선시한다”는 반발을 내놓으며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2016년 당시 강남역 10번 출구 일대에서는 극단적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현장을 찾으면서 일시적으로 과격한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여성회 박지아 성평등교육센터장이 본보와의 인터뷰 중 준비해 온 강남역 살인사건 운동 관련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투데이신문

달라진 것들, 그리고 변화해야 하는 것들

9년이 흘렀다. 강남역 화장실 앞에 놓였던 수많은 포스트잇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연 여성은 안전한가?”

강남역 사건 이후 정부는 △공중 화장실 분리 확대 및 CCTV 확충 △공중화장실 내 여성안심 비상벨 설치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 대책 △국선전담변호사 추가 배치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놨지만 범죄의 피해는 여전히 성별화돼 있고 혐오는 더욱 세밀하고 집요한 형태로 번지고 있다.

이에 여성들은 “제도는 늘었지만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 등 90개 여성시민단체는 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역 9번과 10번 출구 사이에서 개최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9주기 추모행동’에서 “강남역 사건 이후에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부산 돌려차기 사건 등 여성을 타겟으로 한 폭력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며 “N번방 사건과 딥페이크 성범죄 등 온라인 여성폭력도 이어진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여성폭력과 성차별을 방관하고 만든 정치와 사회에 강력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성단체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사건 이후 9년이 흘렀음에도 구조적 변화가 미비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2022년부터 관련 집회를 주최해 온 서울여성회 박지아 성평등교육센터장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큰 변화로 “여성들에게 집단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것”을 꼽았다.

박 교육센터장은 “해당 사건은 여성들에게 ‘대한민국 사회가 여전히 얼마나 안전하지 않은가’를 보여준 사건이자 개별적 피해가 아닌 ‘여성 집단 전체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한 계기였다”며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가 촉발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건은 사회 전반에서 ‘여성혐오’ 범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바 있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으로 볼 것인지 혹은 구조적 여성혐오가 낳은 범죄로 봐야 할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논쟁이 격화됐다. 한국 사회가 젠더 기반 폭력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셈이다.

한국범죄재피해자지원중앙센터 신두일 사무처장이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발언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당시 경찰은 피의자의 정신질환 경력과 범행 동기를 근거로 특정 성별에 대한 증오만으로 사건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렸다. 이후 이 같은 경찰의 결론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사건 이후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죄의 본질을 둘러싼 인식 차이는 완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표창원 프로파일러는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해 자신의 SNS에 “피의자의 정신질환 경력 등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짓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는 글을 게재했다. 

이어 “하지만 ‘낯 모르는, 관계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인 범행임은 분명하며 그 저변에는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대변되는 비뚤어진 남성중심주의 하위문화가 존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 설계(공용화장실 등) 및 ‘치안선진국’을 강조하는 정부가 조장하는 지나친 범죄위험 불감증도 문제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해당 사건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단체인 한국범죄재피해자지원중앙센터(이하 지원센터) 신두일 사무처장은 강남역 사건은 사회적으로 여성혐오 담론을 촉발했다고 보면서도 피의자의 질병 등 여러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신 사무처장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해석은 다소 앞서나간 측면이 있다고 본다”며 “가해자는 조현병과 조울증을 앓고 있었고 약 복용을 중단한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가졌을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에서의 ‘여성혐오 범죄’로만 규정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실제로 유가족들도 사회적 담론보다는 ‘한 개인이 질병과 폭력으로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그들에게는 ‘여성혐오’보다는 딸을 잃은 상실감과 삶의 붕괴가 훨씬 더 직접적인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 짓기 어려운 점은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일탈이나 정신질환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젠더 권력 관계 속에서 이 사건을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여성계에서는 가해자의 개인적 배경보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성격과 사회적 맥락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기보다 ‘여성혐오’ 범죄로 명확히 인식하고 이에 걸맞은 국가적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교육센터장은 “사건 당시 여성들이 가장 분노했던 지점은 가해자가 ‘여성이라서 죽였다’고 직접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언론이 이를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으려 했던 태도였다”며 “범인의 발언은 비합리적이었지만 그가 ‘여성’을 특정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사건의 사회적 의미를 지우려는 시도는 여성들에게 또 한 번의 억압으로 다가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해자의 개인적 특성과 정신질환이 범행의 한 요인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 특성이 사회적 차별의 조건과 만나면서 폭력으로 발현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그 점을 무시하고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것은 범죄의 구조적 측면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해자의 범행을 ‘조현병 때문’으로 단정한 것에 대해서는 “조현병은 관리와 치료를 통해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한 병인데, 이런 식의 서사는 해당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치료 접근을 막는다”며 “결국 사회 전체의 안전을 오히려 위협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2016년 5월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의 성격을 두고 시민들이 피켓을 든 채 대치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반복되지 말아야 할 그날의 ‘비극’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를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촉발시켰지만 법·제도적 개념 정립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은 아직 여성혐오가 동기가 된 범죄를 따로 집계하고 있지 않다. 여성혐오에 대한 법률적인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이렇게 법제화가 지지부진하고 있는 동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는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한다”며 한 여성을 폭행한 ‘편의점 숏컷 여성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아무런 개인적 원한도 없는 여성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2022년 9월에는 신당역 화장실에서 여성 역무원이 전 직장 동료 전주환에게 스토킹 끝에 살해당했고 지난해 5월에는 서울 서초구의 한 빌딩 옥상에서 의대생이 교제 중이던 여성을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교육센터장은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법이나 제도의 안이 아니다”고 짚었다. 이미 여성폭력과 젠더 기반 범죄를 다루는 단체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축적한 데이터를 토대로 수많은 법안과 제도 개선안을 이미 제시해 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왜 실행되지 않는가’에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어 “여성폭력 문제 해결의 책임이 개인이나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있다는 인식이 명확히 세워져야 한다”며 “모든 국민은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특정 집단이 성별 등 이유로 반복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현실은 구조적 사회문제”라고 봤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개인의 불운이나 범죄자의 일탈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대응해야 할 ‘안전권 보장’의 영역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법·제도적 보완과 함께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신 사무처장은 ‘피해자 중심의 사법체계’와 ‘사회적 예방 시스템 구축’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신 사무처장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그 이후의 대응 체계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신적·심리적 치료 지원은 단기적 조치로 끝나서는 안 된다”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신적 문제는 성장 환경, 폭력 노출 경험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어 피해자의 트라우마 회복에는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2차·3차 피해의 심각성도 지적했다. 그는 “많은 2차 피해가 젠더 갈등이나 사회적 논쟁보다 오히려 경찰·검찰 등 형사 절차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수사 과정에서 반복적인 진술 요구나 증거 제출 압박, 담당자의 회유나 무관심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가 한 번의 신고로 모든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기관 간 정보 연계, 피해자 전용 진술 공간 마련이 반드시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6년 5월 22일 오전 시민들이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모습. [사진제공=뉴시스]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여성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 여성은 일면식조차 없던 범인에 의해 소중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남겨진 가족의 시간은 그날 이후 멈춰 섰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뒀다. 사고의 충격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며 지금도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건이 일어난 그 집에서 지내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유일한 정서적 지지망이기에 “이곳을 떠나면 더 고립될 것 같다”며 이사를 거부했다.

아버지는 샷시 제작 일을 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간헐적으로 단기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다. 피해자의 오빠 역시 사건 이후 심리적 충격으로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한동안 일을 쉬다가 최근에서야 낮 시간대에 배달 일을 시작했다. 사람을 마주하는 일에는 여전히 불안을 느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배달라이더 일을 택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족 모두의 일상이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왜 이 비극은 반복되는가. 사건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여성의 일상이 얼마나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드러낸 사회의 단면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수많은 추모와 약속이 있었지만 그 기억이 일상 속 안전으로, 더 나아가 제도적 변화로 이어졌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여성 안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점에서 공동체의 각성과 실질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다시는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비극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단지 애도의 방식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최소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