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N 인터뷰] 한국성폭력상담소 조은희 원장 “영화 ‘세계의 주인’, 스스로 회복하는 피해자의 힘 보여줘”
윤가은 감독, 피해자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써 '피해자답지 않다' 의심받는 사회…편견이 악순환 만들어 현실 피해자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혼자 남겨지는 경험' 회복엔 시간 걸려…주거·의료·심리 지원 꾸준히 이어져야
【투데이신문 전세라 기자】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주체적인 회복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며 입소문만으로 10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상처를 안고도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주인공 ‘주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에 질문을 던진다.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삶의 주인’으로 서기까지는 영화보다 훨씬 긴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특히 사회적 고립과 편견은 이들의 회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현실적 어려움이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세계의 주인> 의 자문을 맡았던 한국성폭력상담소 조은희 원장을 만나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과 피해자가 스스로 회복할 힘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회적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조 원장은 궁극적으로 성폭행 생존자들이 자신의 속도로 회복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는 ‘세계의 주인(主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와 제도적 지원을 촉구했다. 다음은 조 원장과의 일문일답.
Q. 윤가은 감독이 각본 단계에서 자문을 직접 구했다고 들었는데.
감독님이 처음 우리 상담소에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활동가들이 먼저 ‘빨리 답장 드려라’고 할 정도로 반가워했다. 감독님은 특정 장면의 기술적 질문보다는 전반적인 맥락과 감정, 현실성에 대한 점검을 원했다. 또 감독님은 성폭행 피해 생존자를 직접 만나 다양한 이야기도 들으며 영화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썼다.
Q.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가 스스로 삶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담히 보여준다. 실제로 피해자들의 회복을 지켜보는 전문가로서 영화의 서사나 묘사를 어떻게 평가하나.
영화 속 ‘주인’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스스로 삶을 이어나가며 분노나 두려움뿐 아니라 희망과 변화의 의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윤 감독님이 피해자의 현실과 감정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표현하고자 함이 느껴졌다. 특히 영화 속 세차장 장면처럼 피해 감정을 해소하는 장면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표현해내기 어려운 부분임에도 잘 짚어 내주셨다. ‘주인’처럼 피해자들은 특히 엄마에게 ‘왜 몰라줬느냐, 왜 보호해주지 못했느냐’는 감정을 깊숙이 가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세차장 장면은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했다는 분노와 그 마음을 받아주는 가족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영화가 피해자들의 ‘희망’을 담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영화를 함께 본 일부 생존자들은 ‘현실은 저렇지 않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피해자가 어둠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이다.
Q. 영화 속 주변인은 실제와 비교해 어떤가.
‘주인’을 돕고자 했던 ‘수호’처럼 선의의 마음으로 피해자를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영화 속 ‘주인’은 건강한 피해자로 설정돼 있어서 수호의 행동을 크게 상처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훨씬 예민하고 힘든 상태다. 그래서 서툰 행동이나 의도치 않은 말이 피해자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도 주변 지지자들이 피해자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관계가 깨지는 사례를 자주 본다.
영화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인 ‘주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건강한 지지자다. 특히 동생 캐릭터처럼 누나를 기꺼이 돕기 위해 애쓰는 장면은 현실에서 보기 쉽지 않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에는 같은 피해를 경험해도 ‘조용히 살고 싶다’며 그만두자고 하고, 누군가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등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가 깨지거나 피해자가 가족 안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흔하지는 않지만 이런 지지자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피해자는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Q.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 상담 현장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고정관념의 구체적인 모습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편견과 통념이 강하다. 피해자에 특정한 모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프레임이 씌워져 있고 그와 다르면 ‘피해자답지 않다’고 의심받는 경우도 흔하다. 실제로 성폭행 생존자가 성폭력 피해 이후 여행을 갔다 오거나 친구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피해자가 저럴 수 있느냐’며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계속 울고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사회가 그런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다 보니 피해자 스스로도 ‘나는 괜찮아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긴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계속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목소리가 사회에 울림이 돼야 피해자를 보는 시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결국 편견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피해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어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Q. 실제 피해자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상담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고립’이다. 특히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가족과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관계망이 거의 없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경제적 문제 또한 발생한다. 피해 이후 학업이나 직업 경로가 끊기면서 생계 기반이 약해져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또한 피해 사실을 언제,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며 친구를 맺거나 유지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혼자 남겨지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위기 지원을 넘어 이들이 다시 사회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데 집중하고 있다. 주거와 자립을 돕거나 정기 모임과 심리 지원 등 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피해자들이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Q. 그렇다면 피해자를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주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피해 경험을 인정해주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에게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회복할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주변인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앞서서 조언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속도와 감정을 놓치면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인은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조급해하기보다 피해자의 속도에 맞춰 옆에서 조용히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신 해결해주려는 태도보다 ‘언제든 손 내밀면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이러한 안정적인 동행이 피해자가 다시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Q.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삶의 ‘주인(主人)’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공론화를 위해 ‘들어달라’며 일부러 공개적으로 말하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또한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생존자들이 웃을 수도 있고 일할 수도 있고 일상을 회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회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회복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는 제도적 여유도 필요하다. 주거·의료·심리·생계 지원이 단기간으로 끝나지 않고 피해자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이후 가족 단절이나 고립을 경험하는 피해자들이 많기 때문에 국가와 지역사회가 ‘지지자’가 돼주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생존자가 자신의 속도로 회복하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가 마련될 때 비로소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Q.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피해자 혹은 영화 속 ‘수호’처럼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줬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전한다면.
피해자들이 무엇보다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지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상담소든, 믿을 만한 지인이든, 손을 내밀면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한다.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수호처럼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가 미안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지지하려는 마음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큰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작품이 나온 시기가 좋았던 것 같다. 예전이었다면 이러한 서사가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제는 관객들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시대다. 그런 점에서 윤 감독님이 정확한 시기에 용기 있게 작품을 내주셔서 더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