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마지막 가는 길…‘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
[르포] 故 백남기 농민 빈소에서 열린 ‘촛불추모제’ 현장
| ▲ ⓒ투데이신문 | ||
“백남기 농민 지켜내자”, “살인정부 규탄하자”, “책임자 처벌하자”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2015년 11월 14일에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 중 경찰이 쏜 물폭탄을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백남기 농민. 그가 오랜 시간 사경을 헤매다 지난 25일 끝끝내 영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음날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한 오후 6시 무렵, 그가 잠들어 있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선 장례식장 입구에서 처음 마주한 모습은 경찰과 조문객 사이에서 벌어진 마찰 현장이었다. 조문객은 백남기 농민의 망연자실한 죽음에 울분을 토로했다. 하지만 윗선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앳된 얼굴의 경찰들은 꿈쩍도 않은 채 정면만 응시했다. 그들이 조문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지만 어차피 들을 수 없는 대답이며, 질문과 동시에 백남기 농민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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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지나자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세월호 유가족 역시 오랜 시간 숱하게 경찰의 과잉진압에 맞서 싸워왔기에 백남기 농민이 느꼈을 고통과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다. 문득 어쩌면 그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마냥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소가 마련돼 있는 3층으로 올라가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었다. 기자 역시 서둘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신도들의 기도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차례가 다가오고, 기자 역시 가지고온 카메라와 가방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평범한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백남기 농민의 영정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렸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허리 굽혀 인사만 건넨 기자에게 유족은 옅은 미소를 띠고 “와줘서 고맙다”는 짧지만 진심을 담은 한마디를 전했다.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 빈소 밖에는 조문을 마친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대학생 손모(25˙여)씨는 “사인 원인 규명이 가장 문제로 떠올라선 안 된다”며 “시민들이 자신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 모인 집회에서 물대포 등을 사용한 살인적인 진압을 시도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꾸만 책임소재를 회피하기 위해 정부와 경찰에서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후 7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촛불추모제를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각종 언론사들도 카메라를 들고 삼삼오오 나타났다. 이에 한 시민이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오냐”며 왜곡된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을 향해 호통쳤다. 순간 기자임을 예상할 수 있는 손에 들린 카메라가 부끄러워 감추고 싶어졌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진실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기자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둘씩 촛불이 켜지며 본격적으로 추모제의 서막이 열렸다. 추모제는 여러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투데이신문 | ||
특히 이날 추모제에는 평생을 거리의 투사로 살아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도 참석해 힘을 실었다. 백 소장은 당신 몸 하나 가누기도 무척 버거워 보였지만 이 자리에 함께하겠다는 의지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해보였다. 그의 선창으로 시민들이 다함께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백남기 농민에게 보내는 한통의 편지 같았다.
백 소장은 “(부검을 요구하는 경찰의 태도는) 백남기 농민을 다시 참혹히 학살하겠다고 하는 만행이다. 내가 됐든 젊은 여러분이 됐든 백남기 농민의 제2의 학살을 막아야 한다”고 목 놓아 외쳤다.
내내 밝은 모습을 잃지 않으려 웃음 짓던 김미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경남연합지회장은 “이성이 없는 나라, 상식이 없는 나라, 양심이 없는 나라. 이런 나라를 갈아엎지 않으면 우리에겐 그 어떤 미래도, 희망도 없다는 생각뿐이다”라며 끝내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목소리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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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동아리 ‘사다리’ 여성민씨(좌), 부산교대 황선영씨(우) ⓒ투데이신문 | ||
백남기 농민이 타계한 날부터 쭉 빈소를 지킨 대학생들도 마이크를 잡았다.
역사동아리 ‘사다리’ 소속 여성민씨는 “토요일 저녁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려고 했지만 이곳에 왔고 일요일 지방에서 올라온 아빠와의 만남도 이곳에 오기 위해 일찍 헤어져야 했다”며 “지금처럼 살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실망과 걱정을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고 운을 뗐다.
그는 “여기 오지 않았다면 주변인과의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어제 경찰 진입 소식을 들었을 때 미안함·죄책감·고마움·걱정·함께한다는 확신 등 복잡한 감정이 저를 이 곳에 있게 만들었다”며 “여기 있는 분들과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고 함께 싸우고 싶다”고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연이어 부산교대에 재학 중인 황선영씨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면서 “백남기 농민께서 돌아가신 일을 통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것을 오늘 가슴 아프게 그리고 잔인하게 깨달아 버렸다. 백남기 농민이 주신 가르침을 잊지 않고 더 열심히 살아 이 미친 세상의 끝을 보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내일의 백남기 농민이 될 수도 있을 ‘동혁엄마’ 김성실씨도 세월호 유가족 대표로 시민들 앞에 나섰다.
그는 “우리는 내 새끼도 잃고 백남기 어르신도 잃었다. 우리가 더 빨리 끝내지 못해 어르신이 이렇게 된 거 같아 너무 죄송하다”라며 허리를 숙였다.
이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우리가 더 잘하는 밥 하고 자식 키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가족과 내 이웃을 돌보는 것으로 2014년 4월 16일 이전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을 위해 이바지하고 싶다”고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소리쳤다.
침통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추모제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활기찼다.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면하는 ‘살인정권’으로부터 백남기 농민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도 점점 더 강해졌다.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남겨두고 먼저 가는 백남기 농민의 마음이 더 편치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육신은 떠났지만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영정사진 속 모습으로 영혼만은 이곳 어딘가에서 함께 하고 있을 그를 위해서라도 더욱 힘을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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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도 시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울지언정 떠나는 길만큼은 외롭지 않으며, 그 길을 기자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다행이었다.
촛불추모제가 끝나갈 무렵 경찰이 또다시 부검 영장을 요청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남기 농민을 지켜내기 위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살려내기 위해 다시 한 번 몸을 내던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가 아닌 ‘우리’ 사실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함께 외쳤다.
“백남기 농민 지켜내자, 투쟁! 살인정부 규탄하자, 투쟁! 책임자 처벌하자, 투쟁!”
누군가는 진실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울부짖음을 ‘시체팔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전한다. 진실을 왜곡하는 당신의 ‘양심팔이’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죽였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