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근의 나는 이 작가를 주목한다㉟] 위험한, 그러나 성공적인 표현들-신종식
신종식은 근래에 보기 드문 뛰어난 작품들로 개인 전시를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전시는 작가가 그간 해온 작업 중 잘 된 작품을 선정해 보여주는 것이 상식이고 관례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호한 표정으로 거부했다.
오히려 거부보다는 자연스럽게 그가 했던, 혹은 그 자신이 변화해 온 과정의 작품들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전시장에 출품된 그림은 초기부터 지속해서 보였던 전형적인 신표현주의의 화풍부터 미니멀적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안정되게 묘사했던 부조적 입체 작품에 이르기까지 회고전의 성격을 보였다. 이러한 전시 형태는 작가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반향이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종류만큼 그의 변화를 바라다보는 시선들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양한 비난과 찬사가 회오리 폭풍처럼 지나간 뒤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매우 담담했으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뿐이며 그 이후에 대한 평가는 나의 몫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장 최근 작품들은 분명히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흐름의 절정기에 핀 꽃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초기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가 70년대의 신구상이나 80년대의 자유 구상적인 화풍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작가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1992년 작품 <신전과 검은 뱀>, <화석 잎과 신전>, <물고기> 등은 그의 작품세계의 출발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 시대의 코린트풍의 신전 모습과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화석들이 그의 회화에 중요한 소재들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는 “땅은 항상 하늘과 반대의 자리에 있다”며 “하늘의 활동적인 능동성과는 반대인 수동성, 남성이 아닌 여성, 밝음이 아닌 어두움 등 음양의 이치처럼 땅은 무한한 포용성을 보여준다”고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말했다.
왜 여기서 땅과 하늘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며, 신전의 모습을 화면 속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도상학적 차원을 보여주는 여러 요소들에 관해서는 얼마간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 속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신전의 의미가 혹시 이런 가정을 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신의 집 즉 신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신상(神像)을 안치하는 장소의 방을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했고 신은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였다. 사람들은 그런 절대적인 권한과 섭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신을 경배하기 위한 하나의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다. 신전을 상징하는 황소가 때로는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신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하는 장식적 표현들 대부분은 신을 찬양하기 위한 인간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건축술과 조각·그림, 저부조들은 신전 속에서 완벽한 하나의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신종식은 그러한 저부조의 릴리프 형식의 미술을 이때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의 예술은 하나의 제의(Ritual)이자 하나의 의식(Ceremony)에 포함된다. 고대의 희랍이나 이집트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제의는 서로 아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J. 해리슨은 <고대 예술과 제의>에서 지적했다.
제의가 춤이 되고 그것이 예술이 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신종식에게 있어 땅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땅은 하늘을 떠받들고 있고 모든 탄생의 기원이 되며 이런 의미에서 모성이나 여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모든 탄생의 원천을 위해 땅을 이야기하며 신전을 말한다. 여기서 신전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종식은 예술가는 모든 숨어 있는 자연 속에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주체이자, 창조자의 메시지를 전하고 노래하는 역할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그의 회화를 이야기할 때 신전의 의미는 첫 번째 탐색 과정의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러나 달팽이·푸른 칼과 함께 대두되는 신전과 다른 도상들의 형태는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그가 취하고 있는 이미지 형태의 대부분이 역사적인 자취를 풍겨준다는 것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신화적인 성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 <기둥과 칼> 등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90년대 말을 전후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그의 종교적인 희랍적인 역사성을 고려한 작품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다만 초기에 부드럽지만 거친 색조에서 벗어나 세련된 화면 구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화풍에 큰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풍은 다소 거칠게 칠해진 원색적인 색채며 검은 흑색의 선으로 형태를 규정짓는 다양한 이미지의 그림형식으로 옮겨간다.
주제면에서는 '별을 마시는 남자', '탈출하는 남자' 등 매우 직설적인 어법으로 거친 신표현주의적인 붓 터치를 힘 있게 묘사한다. 그는 초기의 이미지들을 화면 속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서서히 인간을 모델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표현형식에 비춰보면 여전히 그는 신전의 모티브를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다만 신전의 모습이 전체적인 구조물로서 등장하고 소도구들이 그것과 결합하는 구성주의적인 패턴으로 자리한다. 반면에 그 작품들은 대부분 입체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거친 필치와 단순한 구성 사이에서 완결되고 있다. 그는 그런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역사적 도시의 이미지를 회복하거나 회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화제가 되었던 그 릴리프 형태의 입체적 작품으로 돌아갈 차례다. 많은 사람은 그 작품에서 낯섦을 발견하고는 비판적인 의견과 관점을 드러냈다. 언뜻 보면 그의 작업 방식은 그가 이전에 해왔던 방향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1996년의 <델피>, <미토스>에서 우리는 지금 그가 해내고 있는 작업들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된 것인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입체성과 오브제, 보드 위에 콜라주 한 형상들이 더욱 그 원형적 성격을 확실히 하고 있다. 최근 작품에서 그는 캔버스 위에 화려하고 다소 원색적인 색채들로 퍼즐을 맞춘 듯 구성미를 검은색 모노크롬의 톤으로 완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 대해 이일은 “그의 회화는 형상과 기호의 상징 공간이다”라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고 그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자유스러운 상상력과 미적 공간의 형성에 대해 평가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과 함께, 인간의 존재를 그려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그는 현재의 작업에 이르는 과정 중에까지 직접적인 도상이나 이미지를 그려놓던 전통적인 방식을 그동안 고집해 왔다. 그러나 신종식은 이번 전시에서 완전히 종래 그가 사용하던 기법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형식들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일단 치열하게 정리를 해보자는 입장에서 발단이 돼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백 점의 작품을 정리해 창고에 넣었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본보다 자유로운 구성과 신선한 작품의 형식은 독특하다.
그의 최근 작품의 유형은 대략 두 가지로 집중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패널 위에 릴리프 형태로 판형을 만든 후, 색칠하고 프레스기로 압축을 하거나 못 쓰는 그룹전 등의 전시 카탈로그를 잘게 썰어 바탕을 만든다. 그 후 잘게 분할된 면 위에 몇 번이고 색칠한 뒤 다시 위에 새로운 형태의 종이를 오려붙이거나 세운다.
그러나 그가 평면 위에 오려 세운 형태들, 이미지들은 사실 그가 오랫동안 사용 해오던 것들이며 칼과 달팽이와 신전 이미지 또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가 추구해오던 세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화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가 이러한 작업에 도달하기 직전의 <종이고기>시리즈의 작업은 그가 앞으로 변모할 색채의 방향을 이미 지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변모를 충분히 예감해야 했는지 모른다.
검게 칠한 화면에 흰 선의 색으로 그려진 화석형의 물고기, 그는 예술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형상들의 의미를 빌리는 것”으로 “소멸하고 말 운명의 유한한 존재자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 정의 했다. 그러한 정의를 곧 신과 인간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한 존재의 흔적을 그는 화석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이용되는 그 생물학적인 오브제의 이미지, 그 조형적 형상화는 궁극적으로 신종식의 정신적 자양분이다.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그래서 그에게 입체적 표현으로의 탈바꿈은 매우 자연스러운 주제의 지속 된 변형일 뿐 다른 세계가 아니다. 그가 형상화하고자 하는 형식의 진부함과 보편성에서 벗어나 그만의 신선한 옷을 이제 갈아입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옷은 그 자신과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옷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처음 보는 그의 옷이 어색하고 서툴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작품들 속에 감추어진 신선함과 새로움은 분명 주목할 만한 특별함을 갖추고 있다.
간결한 표현과 수려한 언어, 세련된 묘사와 표현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세계가 이런 것이라고 조용히 말할 뿐이다. 그래서 신종식의 전시는 가장 위험했던 전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새로운 표현형식에 접목한 인상적인 변신으로 우리는 그를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