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한국 뮤지컬의 자부심, 25주년 기념 뮤지컬 ‘명성황후’ 프리뷰
최근 들어 우리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애국 의식이 날로 고취되고 있는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 올라왔다. 바로 오랜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찾아온 뮤지컬 ‘명성황후’ 이야기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지난 1월 19일과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반가운 인사를 전했다. 이번 공연은 뮤지컬 ‘명성황후’ 탄생 25주년을 기념해 1995년 첫인사를 올렸던 장소에서 상연돼 더욱 의미가 깊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틀에 걸친 단 3회의 프리뷰 공연만을 마치고 곧바로 공연을 중단해야만 했다. 애당초 1월 6일 개막 예정이었던 공연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연장으로 인해 이미 한차례 연기된 상황이었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막을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작금의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현재로선 2월 2일부터 본격적인 개막을 예정하고 있는데, 추후 상황 변화에 따라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끈 인물을 논할 때 가장 많은 의견 차이를 보이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명성황후다.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주인공이다. 여흥 민씨 성을 지닌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8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으로 자랐는데, 오히려 그런 점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마음에 들게 한 요인이 되었다. 비록 든든한 가문의 비호를 기대할 순 없었으나 왕비가 된 이후 스스로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가 하면, 고종이 친정을 할 수 있게 돕고 외국과 두루 관계를 맺으면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주창하던 흥선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이후 아슬아슬했던 국내 정세가 외세의 영향으로 혼란해지자, 러시아와 손을 잡아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던 와중에 일본 공사 미우라와 낭인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명성황후를 두고 조선의 국모로서 근대의식을 갖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여러 방편으로 애썼던 선구적 인물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외세에 기대 국력을 약화하고 일본의 침략을 야기하는 데 일조했다고 보기도 할 만큼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다 보니 오랜 기간 상연된 작품임에도 뮤지컬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늘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혹자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명성황후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해 역사적 실책으로부터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냐며 날을 세워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작품은 특정 인물을 미화하거나 신격화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당대 역사 속에 등장한 인물들에게 잠시나마 새 생명을 부여해 시간에 따른 상황 전개와 그에 따른 관계 변화를 두루 조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격변의 시대, 거친 풍랑을 헤치며 살아온 여인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도 조금씩 달라져 왔는데, 특히 이번 시즌 ‘명성황후’엔 여러모로 상당한 변화가 눈에 띈다. 이번 25주년 기념 뮤지컬 ‘명성황후’는 윤홍선 프로듀서가 새롭게 참여해 감각적인 결과물을 선보인다. 일부 장면의 배열은 좀 더 자연스럽게 재배치됐고,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던 기존 성스루(Sung-Through) 형식의 진행에도 약간의 대사가 가미되면서 극의 이해와 몰입을 높일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양방언이 편곡을 맡아 다채롭고 울림 있는 음악을 선보였으며 무대와 소품, 의상까지 새롭게 제작돼 또 한 번 눈길을 끌었다. LED를 활용해 공간감을 확보하고 볼거리 가득한 배경을 선사한 것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무대를 깊숙하게 사용하면서 중앙에 위치한 회전식 경사 무대 활용으로 집중도를 끌어올린 점 역시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막이 오르자 어둠 속을 가른 칼날에 사정없이 튄 붉은 피가 이곳저곳에 배어든다. 곧이어 펼쳐진 재판에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는다. 그리고 시간은 과거 고종과 명성황후의 첫 인연이 시작된 시점으로 향한다. 어린 왕과 왕비는 점차 한 나라를 이끌 국부와 국모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책임에 대해 노래하고, 다시 흐른 시간은 어른이 된 두 사람을 조명한다. 처음에는 왕비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 채 방황하던 고종도 점차 명성황후와 뜻을 함께하는 사이로 변모한다. 그토록 바랐던 세자를 얻은 뒤 열강의 내정간섭과 대립을 멈추게 하고 더욱더 강성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명성황후가 고종을 움직여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군주로서의 권위를 되찾게 돕는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개화 정책에 반발하는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신식 군대와 차별당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구식 군대가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홍계훈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피했던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환궁하고, 이를 본 일본이 앞으로 러시아를 배후에 둔 명성황후가 조선을 탈취하는 과정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해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여우 사냥’이라 명명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끝내 성공하고 만다.
이번 뮤지컬 ‘명성황후’에는 김소현, 신영숙, 손준호, 김도형 등 명성황후와 인연이 깊은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그중에서도 2회 차 프리뷰 공연에서 명성황후를 연기했던 신영숙은 섬세한 표현력으로 연기뿐만 아니라 목소리로도 인물의 성장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냈다.
또 강필석이 연기한 고종은 그저 나약하기만 한 이미지가 아닌, 나름대로 주체적인 인물로서 깊이 갈등하며 고뇌하는 역할을 잘 표현했다. 대원군 역의 서범석과 미우라 역 최민철도 묵직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앙상블의 역할 역시 눈에 띈다. 잘 짜인 군무와 생동감 넘치는 액션, 힘이 넘치는 목소리는 우리 고유의 가락과 유려하게 어우러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힘찬 박수를 부른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크리에이터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이렇게 감동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명성황후’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손에 꼽아야 할 것은 음향이다. 물론 장소적 한계에서 오는 문제점이긴 하나, 노래하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전반적으로 소리가 울려 가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던 점은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또, 1막 초반부 일부 장면 연결에 다소 어색한 지점이 있는 부분도 눈에 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하다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암전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연결될 방법을 찾는다면 훨씬 더 충분한 여운을 느끼면서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하려면 고종과 명성황후가 조선을 통치했던 시기의 역사 이야기를 미리 살펴보고 가는 것이 좋다. 마지막 장면에서 흰옷을 입은 명성황후와 죽은 이들의 영혼이 무대로 등장해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부를 땐 한순간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무궁한 조국을 기원하며 한 걸음씩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순간 지나간 우리 역사를 마치 투명한 스크린에 비춘 필름처럼 빠르게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 고유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오늘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다시금 힘찬 시작을 내디딜 수 있기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