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짓는 아재의 독서 일기⑰] 스승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2022-02-14     책짓는 아재
ⓒ유유

▪2월 14일 월요일

박동섭 선생이 쓴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을 읽다.

나는 비고츠키 연구자로 알려져 있는 독립 연구자 박동섭 선생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은 맛깔나서 읽는 맛이 있다. 이번 책도 술술 읽혔다. 더욱이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책답게 판형도 작다(46판). 물론 내용은 꽉꽉 차 있다. 그냥 후후룩 읽고 넘겨버릴 책이 아니란 소리다.

우치다 선생의 배움론이자 박동섭 선생의 배움론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은 우치다 선생의 배움(學習)론이자, (우치다 선생의 학습론을 빙자한) 박동섭 선생의 배움론이다. 즉 우치다 선생의 배움론을 통해 제련되고 형성된 박동섭 선생의 배움론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치다 선생의 사상을 박동섭 선생의 언어로 되새김질하고, 그 자신의 사유로 재구성한 산물이다. 하나 이는 그의 의지와 의도를 넘어선 산물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 속에서 빚어진 창조적 산물이라는 소리다.

“배움이란 애당초 배우려고 한 것 이외의 것을 배우고, 배우려고 한 것 이상의 것을 배우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계속 열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우치다 선생께 배운 건 정말로 큰 수확이었다. ‘배운다는 것은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새로운 어휘꾸러미도 얻었다.”(4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의 주체는 박동섭 선생이다. 그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수용자요, 창조적인 제자이다. 당연하게 우치다 선생의 여러 책에서 인용문을 발췌하여 소개하지만, 결코 이를 정연하게 배열하는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그보다는 우치다 다쓰루라고 하는 촉매를 매개로 언어를 벼리고, 사유를 발화(發火)시킨 것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도 적극적으로 여러 문장을 인용한다. 하지만 박동섭은 자기 사유의 중심이 견고한 사람이기에 여러 글월에 휘둘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전유(專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승과 제자가 하나되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그만큼 조밀하고 섬세하나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배움에 대한 불완전하나 끊임없는 탐구의 여정

“물론 배움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 삶과 가장 가까운 소재로 알뜰히 기술하였다. 그런데 […] 우리가 기술하고자 하는 대상은 매번 그 기술하는 것으로부터 미끄러진다.”(49-50쪽)

우치다 선생도 ‘배움의 역동성’을 조감해서 포착하는 데에 언제나 실패했으나, 실상 그런 무능감과 불능감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배움에 대해 쉴 새 없이 기술하도록 추동하는 원동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스승을 따라 그 끝없는 실패의 길에 올라선다.

“선생의 말은, 외람되지만 ‘미완의 말’이다. 그리고 제자인 나의 역할은 스승의 미완의 말에 쉴 새 없이 ‘화답’하는 것이다.”(51쪽)

실제로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은 “내[박동섭]가 선생을 만나며 새로운 배움의 여정을 걷게 된 이야기”(66쪽)이기도 하다. 다채로운 메타포를 통해 우치다 선생의 언어와 사상 세계를 그려보여준다. 박동섭 선생의 역동적인 언어 구사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소통에의 강력한 의지

그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수시로 지적 자극을 받게 될 테지만, 특히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가 눈길을 잡았다. 하나는 우치다 선생(화자, 발신자)의 절박함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서 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 주지 않으면 이 생각은 끝이다.”(89쪽) 이는 화자와 청자 모두 살리는 축복의 말이다. 이런 자기만의 소중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이어야 한다고 박동섭 선생은 강조한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다른 하나는 수신자에 대한 경의(敬意)이다. “‘당신의 지성이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라는 수신자의 지성을 신뢰하는 바탕 위에 구축된 말은 절대 길을 잃지 않고 독자와 청자에게 가닿는다.”(96쪽) 이는 모국어 학습으로 예증된다. 언어를 가르치는 발신자(부모)가 수신자(아이)를 신뢰할 때에만 가능한 것으로 모국어 학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모의 무한한 신뢰 가운데 아이는 모국어를 차츰차츰 습득하게 된다.

여하간 발신자의 절박함과 수신자에 대한 경의 모두 소통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필경 훌륭한 선생의 기본 자격이리라. 하지만 어디 선생에게만 필요하겠는가. 실상 교양시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갖추어야 할 미덕이지 않을까? 도시라는 인위적 공간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자질이 아닐까?

그렇기에 선생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나 자신의 소통을 돌아보게 된다. 내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한 나는 이 메시지를 소통하고자 얼마나 절박하게 씨름하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청자와 독자를 존중하고 믿어주는가? 이는 나의 현재 상황에 대한 반성보다 미래 목표에 대한 다짐으로 새겨야할 것 같다. 작은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믿었다가 큰 숙제를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괜히 읽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