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짓는 아재의 독서 일기㉒] 서구 신비주의를 떠받치는 고대 문헌

2022-04-30     책짓는 아재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 4월 30일 토요일

『헤르메티카』는 전설적인 존재의 전설적인 텍스트로 널리 알려져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다. 사실은 수년간 서재에 고이 모셔두었을 뿐인데, 드디어 이번에 읽었다. 『예수는 신화다』로 유명한 티모시 프레게와 피터 갠디가 역시 같이 쓴 편역서(『고대 이집트의 지혜 헤르메티카』)도 더불어 보았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원래 이름의 일부가 아니라 세 배나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수사다. 마치 독일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생(Master)인 에카르트를 후대에 마이스터(Meister) 에카르트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원전 3000년 당시의 인물로 전해지는 헤르메스(토트 Thoth)가 이집트 신비주의 안에서 차지하는 입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사실 『헤르메티카』는 기원후 초기에 해당하는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사람이 쓴 글들을 수합한 것이다. 당연히 체계적으로 구성된 텍스트도 아니라서 산만하게 나열된 감이 적지 않다. 『마태복음서』,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처럼 실제 인물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유형의 고전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구의 신비주의 사조의 면면한 흐름을 거의 맨 앞에서 이끄는 고대의 문헌이라는 것 또한 확실하다.

헤르메스와 이집트 신비주의

서구의 신비주의는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세 가지 토대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집트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영화 <갓 오브 이집트>나 브렌든 프레이저의 <미이라> 시리즈나 탐 크루즈의 <미이라> 등 대중문화 속에서도 이집트 신비주의의 영향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헤르메티카』는 바로 이집트 신비주의의 대표 문헌이다. 따라서 서구 신비주의 특유의 분위기와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그 다채로운 면모를 온전히 보여주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특별히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적 명료하게 보여주는 구절들만 소개하기로 한다.

“하느님이신 위대한 영, 즉 정신은 남자이며 여자요, 생명과 빛으로서 존재하나니[…].”(17쪽)

“생명과 빛이 곧 하느님이며 아버지라. 그로부터 인간이 생겨났도다.”(23쪽)

“인간은 이성과 정신을 통해 이 우주를 압도하나니, 인간이 신의 작업을 지켜보는 목격자이기 때문이라.”(47쪽)

“하느님께서는 생명체 중 오직 인간과 교통하나니, 밤에는 꿈을 통하고 낮에는 징조를 통하느니라.”(119-120쪽)

이렇듯 인간은 신과 교통 가능한, 신의 독특한 피조물이다. 그런 독특한 존재에게 계시되는 몇 가지 원리가 있다. 온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고대 이집트의 지혜 헤르메티카』의 역자후기에서 간결하게 소개해주듯 헤르메스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은 다음 일곱 가지이다.

헤르메스 철학의 일곱 원칙

1) 유심론의 원칙: 모든 것은 마음이고, 우주는 관념적이다.

2) 상응의 원칙: 위에서와 같이 아래서도, 아래서와 같이 위에서도.

3) 진동의 원칙: 모든 것은 움직이며, 진동한다.

4) 양극성의 원칙: 모든 것은 이원적이며, 양극단이 있다.

5) 리듬의 원칙: 올라가면 내려가며, 나가면 들어온다.

6) 인과의 원칙: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

7) 성별의 원칙: 모든 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래서와 같이 위에서도’라는 상응의 원칙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점성술을 비롯하여 신비주의의 핵심 원리에 해당한다. 언뜻 보기에는 신약성경의 주기도문의 초반부와 유사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지만 이 간구는 유일신론의 강력한 기조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며, 하늘에서 땅으로 향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헤르메스의 금언이 갖는 특이점이 드러난다. 내가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다른 대표 금언과 결합하여 보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으로 새겨읽을 수 있다.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신비주의적 자기계발 가르침에 직결된다.

신비주의와 민족주의

이렇듯 오랜 기간에 걸쳐 인류 문화, 정확히는 서구 문화에 영향을 끼쳐왔던 텍스트임에도 그 안에 지역과 민족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 우주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신비주의 문헌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의 낙관(落款)을 발견하게 된다.

“왕께서는 강대하시니 당신이 권력을 갖고 있는 한 이 책이 번역되는 일은 없을 것이요, 이 위대한 비의가 그리스어로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 믿나이다. 사치스럽고 유약하며 멋만 부리는 그리스 관용구들이 위엄있고 간결한 이집트 관용구의 활력을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옵니다. 왕이시여, 그리스어는 맥 빠진 언어인지라 감정을 드러낼 때만 활기를 띠나이다. 그리스 철학이란 것이 이와 같나니 알맹이 없는 ‘언어의 천학(淺學)’이 아니겠나이까.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충만한 소리를 사용하옵니다.”(145쪽)

헤르메스(를 사칭하는 무명의 저자)는 이집트어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어에 대한 반감이 느껴진다. 특정한 언어에 특별한 권능과 신비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령 유대교는 히브리어를, 가톨릭은 라틴어를 신비화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경전 속에 노골적으로 담겨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여튼 신비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는 흥미롭다. 신비는 추상적이고, 민족은 구체적이다. 신비의 보편성과 민족의 국지성은 대비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해서 둘의 관계가 상호 무관할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령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럽 각국의 신비주의자들도 각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 이면세계를 탐구하는 신비가가 현실세계에 개입하는 첩보원이 된 것이다. 오욕칠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현인의 길을 걷는 이들이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자신을 내던지며 국가의 요원으로 활약한다는 것은 어딘가 기이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럽다.

『헤르메티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앞서 말한 것처럼, 『헤르메티카』는 헤르메스라는 신비주의 현인이 단독으로 쓴 게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여러 후대인들이 쓴 것이다. 물론 그 자체는 고대의 문화에서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현란한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만 주목하면 된다.

그렇다. 『헤르메티카』가 설파하는 내용이 관건이다. 간단히 말하면 요설(饒舌)이다. 스케일이 거대하고 현란해서 나름 재밌고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우주적 거짓말에 불과하다. 읽지 말아라는 것이 내 입장은 아니다.

무엇보다 신비주의 문헌 특유의 읽는 맛이 있다. 신비주의 애호가라면 당연히 흥미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헤르메티카』의 문화적 영향력이다. 이 책은 하나의 사유 체계를 형성하는 원시 텍스트다. 신 사고(new thought) 운동 계열의 텍스트나 주로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 문헌들로 이어지는 계보의 맨 앞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유에, 특히 그 원초적 형태에 관심 있는 교양인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 하다. “앎은 배움의 목표라. 배움은 신의 선물이로다.”(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