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가정의 달 오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2023-05-31     정인지 기자
▲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바야흐로 화창한 하늘과 초록의 자연이 가득한 봄의 절정이었다. 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지가 피부로 와닿았다.

계절을 만끽하라는 양 잇따른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주변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돈독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광주의 오월은 사뭇 달랐다.

광주송정역에서 받은 ‘오월광주 여행’ 책자는 5·18 사적지로 빼곡했다. 그나마 적힌 공원과 산, 호수 한 켠에도 사적지는 꼭 끼어 있었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캠퍼스도 예외는 없었다. 광주는 내딛는 걸음마다 현대사였다.

그렇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다만 다른 지역이 가족과 함께 테마파크를 찾고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다는 동안 광주는 하얀 국화를 잔디에 내려놓고 가족을 찾아 가슴 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오월의 묘지에서는 유족도, 정치인도, 학생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인적을 피한 지난 17일 아침 9시, 유족들은 검은 양복과 넥타이, 스카프로 색 맞춰 묘지를 찾았다. 꽃을 내려두지도 못한 채 잡풀을 먼저 뜯고, 비석을 쓰다듬었다. 일면식이 있는 서로를 알아보고 악수하며 온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어 10시 30분께는 학생들이 방문했다. 인근의 중고등학생들이 테마기행의 활동으로 묘지에 온 것이었다. 들고 다니느라 조금은 구겨지고 젖은 문제지를 손에 쥔 채 설명을 듣느라 열중이었다. 마땅히 평평하고 단단한 책받침이 없는 묘지에서 이들은 비석은 꿈에도 생각 않고 서로의 등에 종이를 대 답을 적어냈다.

11시가 넘어서부터는 정치인들이 속속 자리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저마다 오월 정신을 잊지 않겠다며 헌법 전문에 수록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회의 동의를 얻기까지 해결은 요원해 보였다. 기념촬영은 쉬워도 입법은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한편 광주에는 장미가 한창이었다. 철없이 장미가 예쁘다는 기자에게 민주광장에서 만난 이종숙(63)씨는 오월에 피는 장미가 그날의 광주를 닮아 싫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대놓고 붉은 것이 몽우리져 움트고 피어나고 지고 떨어지며 눈길을 잡아두니 그럴 수밖에.

날이 밝으면 시야가 선명해진다. 햇살 아래 티 없는 웃음과 볕 아래 드러난 상처가 대비되는 가정의 달이 오늘로 저문다. 광주의 오월에 몇 명이 왜 죽었는지는 아직도 진상규명 중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이 지나면 광주는 꼬박 내년 오월에서야 다시 입에 오를 것이다. 기자도 문득 두려워졌다. 광주 봄볕 아래 탄 목덜미가 채 돌아오기도 전에 이곳을 잊게 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