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짓는 아재의 독서 일기㉝] 인생 2회차라도 안 되는 건 안 돼
페테르 우스펜스키의 소설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을 읽었다. 이는 러시아의 신비가 우스펜스키와 그의 스승 구르지예프의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집어든 책이다.
과거로의 회귀를 소재로 한 이 명상 소설은 백여 년 전에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대적이다. 요즘 널리 읽히는 회귀물 웹소설을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웹소설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웹소설의 핵심 장치로서의 회귀
웹소설의 주요 경향은 잘 알려진 대로 회빙환, 즉 회귀, 빙의, 환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회귀(回歸)이다. 이는 자기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하는 말처럼 인생 2회차에 돌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회귀의 본질은 과거로 돌아갈 때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는 2회차 인생의 성공을 보장한다(남들보다 빼어난 면모를 보여줄 때, 인생 2회차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중에 땅값 오를 동네를 미리 선점한다거나 미래에 가치가 폭증할 블루칩에 투자한다거나 길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회귀는 회한(悔恨)의 결과이다. 과거의 후회스러운 선택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인생 2회차에 나서는 것이다. 애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 회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오류를 정정하는 데에 있다. 스스로 돌아가건 혹은 그가 과거를 정정할 수 있게 누군가(동료건, 신적 존재건) 회귀를 시키는 것이다.
회귀 서사는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복수, 축재(蓄財), 정의 실현, 인류 수호 등을 성취한다. 비록 회귀는 아니고 빙의라고 하지만 그래도 미래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재벌집 막내아들이 된 진도준도 자기 스스로 재벌이 되는 데에 이른다. 결말을 기묘하게 틀어버려 망작으로 전락한 드라마와 달리 원작 소설은 웹소설의 기본 공식에 매우 충실하다.
회귀는 성공을 보장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회귀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미래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하더라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사실 과거에 대해 한점의 후회도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회귀하고 싶어할 것 같다. 그리고 정말 회귀하게 된다면 아마 나 역시 진도준처럼 미래 지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우스펜스키가 보기에 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과거로 회귀하더라도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대로인데, 하는 짓이 달라질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는 자신의 소설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을 통해 이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이반 오소킨은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은 삶, 정확히는 여자친구 지나이다가 민스키 대령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좌절한다. 그로 인해 알고 지내는 마법사에게 과거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그동안의 기억을 모두 유지한 채로 말이다. 그의 소원대로 모든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한 채로 12년 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다시 열네 살 소년이 된 그가 보여준 모든 언행은 회귀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성인이자 이미 다 경험하고 기억한 자로서 생각하고 고뇌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밖으로 말하고 행하는 건 그대로다. 뭐든 뿌린 대로 거둔 법이다. 당연히 이후에 그가 겪게 되는 일들도 예전 상황과 똑같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공부하지 않으니 그가 다시 유급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회귀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주인공은 한 살 아래의 절친 소콜로프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넌 두 달째 공부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 중이야.”(66쪽) 또한 그로부터 며칠 후에 폴란드인 친구 보라호브스키는 그의 공부 태도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내가 30분 동안 널 지켜봤는데 네가 뭘 하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어. 뭘 읽고 있었다면 내가 알 수 있었겠지만 넌 책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 뭘 외우는 게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해. 그냥 앉아서 한 곳만 뚫어지게 보더군.”(69쪽)
희랍어를 제대로 공부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데, 지금 주인공은 2회차 인생에서도 전혀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소설 전체로 볼 때, 공부하지 않고 공상으로 회피하는 것은 가장 평범한 우행(愚行)에 불과하다. 이후로 주인공이 보여주는 어리석은 모습은 정말 읽는 이의 짜증을 유발한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주인공 오소킨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말하지만, 그의 모습은 전혀 초인(超人, Übermensch)답지 않다. 주인공의 고뇌라고 해봤자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와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자신을 직면하지 않는 주인공의 어리석은 자기 합리화가 계속 나열될 뿐이다.
바보야, 문제는 너 자신이야
그러니 백여 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 지금 웹소설의 일반적 경향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즉 주인공의 처절한 자기 변혁 없이 회귀한다면, 미래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기억만으로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우스펜스키를 따르자면, 회귀를 핵심 장치로 설정하는 모든 웹소설에 주인공의 정신적 각성의 과정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웹소설과 같은 대중적 작품에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우리가 웹소설을 읽으면서 원하는 건 고구마가 아니라 사이다, 즉 자비 없는 상황 개선이다. 주인공의 처절한 자기 반성과 각고의 노력을 거친 내면의 변화에 지면을 낭비한다면, 매 화마다 유료결제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웹소설 독자로서는 분개할 일이다.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웹소설을 읽을 때와 달리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는 매우 유용하고 적실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삶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도 우리 자신이 그대로이기 때문이지 않나.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외려 잘 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의 독서는 자기 반성으로 귀결돼야 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주인공의 어리석음에 염증을 내며 읽다가 점차로 거기에 나 자신을 투사하게 됐다. 독자의 자기 성찰이야말로 저자 우스펜스키가 원하던 바였을 것이다. 나아가 그의 스승 구르지예프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어리석은 선택을 거듭하는) 오소킨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