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lt;착한 자본의 탄생&gt; 저자<br>-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홍보란, 한 조직을 사회의 가치 지향에 맞게 조율해 가는 과정 즉, 사회의 가치 지향을 조직에 내재화시키고 조직의 활동을 사회의 가치 지향에 맞추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활동해 왔다. 필자(홍보팀장)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보고 또 직장 상사가 그런 일을 지시하면 신바람 나게 일했다. 30여 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훌륭한 선배와 후배를 많이 만났다. 직장생활 10년 차였던 이 시기 상사로 만난 기획본부장(한정건 전무. 현 풍전비철그룹 부회장)과의 직연(職緣)으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회사를 잘 되게 하겠다고 크고 작은 기획을 하면 한 본부장이 검토하고 보고되고 실행이 됐다. 늘 출근이 설레었고 보람되고 성취감이 충만한 생활이었다. 2003년, 진보 성향의 잡지인 <창작과비평>에 논문 게재도 상사가 진보적이었기에 시도할 생각을 했고, 또 게재된 것도 상사가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다. 2004년, 포스코와 한보철강 인수 경쟁을 시작하면서 홍보팀을 신설할 때 나를 팀장으로 발탁한 것도 한 본부장이었다.

2004년 9월 어느 날, 한 본부장은 나에게 사회공헌팀 신설 기획을 지시했다. 지시 내용은 “기업은 사회공헌활동을 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다 할 수 없으니, 기업이 그늘진 곳을 찾아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홍보팀이 하던 업무 일부를 이관하고 새로 해야 할 업무를 중심으로 팀의 미션을 정하고 기획안을 올렸다. 우리나라 기업 중 최초로 ‘사회공헌팀(CSR팀)’이 단독 팀으로 탄생했다.

CSR 업무는 기업에 대한 민원을 예방하는 시혜성 업무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구동시키는 힘의 원천인 기업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자립할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진보적 가치 실현이란 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성장과 경쟁의 뒷면에 그늘진 곳을 도와주고 강자의 횡포에 짓밟힌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들이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같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 당장 이들이 살면서 지출하는 간접세는 국가와 기업의 이익으로 돌아온다. 시민단체의 예방주사로 인한 기업의 리스크 회피 비용(이익)은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한 본부장은 CSR 업무를 체계적으로 수립·집행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를 특별채용했다. 당시 대학 박사과정에서 사회공헌을 전공한 후 장봉도의 한 복지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던 고선정 실장이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현대제철 최초의 여성 실장으로 승진한 그와의 만남은 나의 직장생활에도 큰 변화를 줬다. 고 실장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막연하게 생각했던 CSR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고 실장과 회사 조직상 직속 관계로 일한 것은 2010년 1년에 불과했지만 2004년부터 2020년 필자가 퇴임할 때까지 우리는 늘 많은 논의를 했다. 그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현대제철이란 거대한 회사를 사회봉사단체로 만들기로 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매칭그랜트(Matching Grant)를 일찍 도입했고 CEO를 포함한 전 직원이 연간 일정 시간 이상의 봉사활동을 의무화했다. 정부가 못하는 그늘진 곳을 찾아 지원하고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활동단체를 지원했다. 고 실장과 논의해서 시행한 많은 일 중 대표적인 게 H-USR, 즉 현대제철(H) 노동조합(U)의 사회책임(SR) 활동이다.

현대제철 사회공헌팀은 현대차그룹 첫 사회공헌 시상식에서 그룹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홍석호 팀장(왼쪽 두번째)의 따뜻한 리더십이 고선정, 윤석산 등 팀원들의 열정을 결집시킨 결과다.<br>
현대제철 사회공헌팀은 현대차그룹 첫 사회공헌 시상식에서 그룹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홍석호 팀장(왼쪽 두번째)의 따뜻한 리더십이 고선정, 윤석산 등 팀원들의 열정을 결집시킨 결과다.

봉사활동을 해보면 남을 도와주는 것보다 이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는 기쁨이 더 크다. 현대제철은 인천제철을 모태로 인수합병으로 성장을 하다 보니 노동조합이 5개나 됐다. 동종 회사 최고의 임금을 주고 복리후생이 좋음에도 늘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노동조합과는 임단협 조건 외에는 대화가 없었다. 품질향상이나 원가절감 같은 주제는 대화 테이블에 올라오지 못했다. 이런 노동조합에 나를 돌아보고 사회 속의 우리 위치를 고민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고 실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5개 노동조합 모두 CSR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러한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CSR 활동은 현대차그룹 전체에 모범 사례가 되었고, 그 결과 2017년에는 그룹 사회공헌 대상을 받기도 했다. 팀장(홍석호)과 팀원들이 피같은 땀을 쏟은 노력을 인정받았다. 홍보팀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활동이 사회에 전파되고 참여자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열심히 언론에 소개했다.

한편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회에 알리는 것도 홍보팀의 중요한 일이다.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북쪽 지점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는 2016년 9월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우리 사회에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하기 전인 2010년경 현대제철은 내진용 철강재를 개발했다. 이 철강재에 브랜드를 도입하고 홍보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 건축물의 안전 가치를 인식시키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즈음 도입한 브랜드가 HCORE(에이치코어)였다. 포항 지진이 발행하기 불과 2주 전인 그해 11월 1일 11시에 대대적인 브랜드 론칭 행사를 하고 홍보했는데, 그중 하나가 tvN에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 PPL이었다. 통상 B2B 제품은 중간 공정에 소요되므로 최종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제품 홍보를 하지 않는다. HCORE를 도입한 것은 최종 소비자의 호응에 중간소재 기업이 응하는 C2B 전략을 취한 중요한 변화였다. 그동안 건물 콘크리트 속에 들어가는 철강재는 어떤 회사의 제품이든 소비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HCORE를 홍보하자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없던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에 HCORE가 들어갑니까?” 그 아파트 재개발은 HCORE를 채택한 건설회사가 수주했다. C2B 전략이 통한 것이다.

현대제철은 자동차 강판, 조선용 후판은 물론 철근, H형강 등 다양한 건축 자재를 생산하고 있다. 큰 빌딩 같은 건축물은 기존 규격의 철강재도 사용하지만 독특한 설계를 구현해 줄 새로운 규격의 철강재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건물 기획 단계부터 고객과 협의하게 된다. 평소 마케팅 부서에서는 건축사(설계), 건축구조기술사, 토목구조기술사와 강구조학회, 토목학회, 콘크리트학회, 지진공학회 교수 같은 전문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회사는 이러한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체계적·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포럼을 구성했다. 이에 필자는 이분들이 평소 만나기 어려운 철 조각 예술가와 언론인, 법조인을 포함해서 위원을 구성하고 포럼 이름을 Steel(철), Structure(구조), Safety(안전)의 앞 글자를 모아 ‘3S 포럼’으로 했다. 그리고 이 포럼은 동창회를 조직해 매년 봄, 가을에는 전임 위원과 신규 위원들이 같이 만나도록 했는데 직원들의 다양한 이벤트 준비로 큰 호응을 받고 있다.

2018년 초, 3S 포럼 위원 중 한 분인 건축구조기술사회 정광량 회장을 통해 ‘나의 아저씨’ PPL 제안이 들어왔다. 평소 광고를 거의 하지 않는 회사에서 브랜드 광고를 하는 것도 큰 결단이었는데 PPL은 아주 생소한 제안이었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제안이라 제안 배경을 자세히 알아봤다. 우선 주인공의 직업이 ‘건축구조기술사’라는 것이 특이했다. 각본을 쓴 박해영 작가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타협이 없고 우직하며 사명감이 투철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으로 설정하고 관련되는 직업을 찾았다고 한다. 인천시 건축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친구로부터 ‘건축구조기술사’란 직업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아파트 안전진단을 재건축이 가능한 D등급으로 하도록 상사가 압력을 넣지만 “구조기술사는 구조적 판단만 한다”라는 대사가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또한 대기업에서 일어나는 갈등 구조 속에서도 비정규직을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시키는 시나리오는 필자가 늘 지향했고 이루고자 했던 가치였다.

드라마 &lt;나의 아저씨&gt;에서 상무로 진급 후 안전진단팀에서 설계실로 다시 돌아온 주인공(이선균 역)이 “내진 철강재 쓰는 거로 결정난거야?”하면서 HCORE 팜플릿을 보고 있는 장면. [사진출처=관련 영상 캡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상무로 진급 후 안전진단팀에서 설계실로 다시 돌아온 주인공(이선균 역)이 “내진 철강재 쓰는 거로 결정난거야?”하면서 HCORE 팜플릿을 보고 있는 장면. [사진출처=관련 영상 캡처]

PPL은 대성공이었다. HCORE 브랜드도 자주 노출됐다. 드라마가 방영된 2018년 3월 당시에도 시청률이 7.4%로 높았지만 2019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와 OTT 바람은 엄청난 재시청률을 기록했다. 사법부의 재판에서도 인용이 됐다. 엄숙한 분위기의 재판장에서 판사가 돌연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이야기를 꺼냈다. 2021년 7월 8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형사1부(재판장 정성호)는 “드라마를 보고 느낀 점은 이 세상에 아이유 같은 아이는 많지만, 이선균 같은 어른은 적다는 것입니다”라며 드라마 이야기를 언급했다.

주인공 박동훈(이선균 역)이 이지안(아이유 역)에게 건축사와 구조기술사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유명해진 ‘건물의 내력과 외력‘은 지금도 많은 이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 보다 세게 설계하는 거야(…)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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