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lt;착한 자본의 탄생&gt; 저자<br>-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br>
▲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2004년 홍보팀장을 담당하기 전에 알게 된 언론인이 H신문 P 기자였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관한 필자의 논문을 계기로 알게 된 기자였다. 홍보팀장이 된 후 그를 다시 만나게 됐다. P 기자는 진보적 매체 기자임에도 골프를 잘 쳤다. 처음에는 좀 실망했다. 진보 매체 기자가 어떻게 골프를 다 치느냐, 나도 안 치다가 홍보팀장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치게 되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논리적 모순에 스스로 좀 당황했다. 나 자신은 그렇지 못하면서도 진보적 시민단체나 언론인에게는 완전무결한 인간상을 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의 주의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기회이익을 포기하고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언행이 일치된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편견은 필자가 골프를 치면서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골프는 즐거운 운동 중 하나다. 단지 우리나라는 요금이 너무 비싸고 그 요금을 누가 부담하느냐가 문제지 골프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골프장 건설과 운영도 ‘이제는’ 친환경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P 기자가 골프를 치게 된 연유가 특이했다. 1997년 말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에 빠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이헌재씨를 기업 구조조정을 책임지는 금융감독위원장에 임명했다. 하루는 이 위원장이 P 기자에게 “골프를 치느냐? O일 O시까지 A 골프장으로 오라”고 했다. 이에 그는 “골프는 못 치지만 가겠다”라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다음 날 아침 3개 언론에 특종이 보도됐다. 국가 위기 사태에 기자들에게 특종은 목숨과 같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P 기자는 독학으로 싱글골퍼가 됐다고 한다.

P 기자의 전언을 계기로 이헌재 위원장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고, 그의 홍보 철학을 많이 배워서 활용했다. 외환위기 당시 이 위원장은 TV 화면에 자주 나와서 국민에게 익숙한 분이었다. 특히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강원산업은 1998년 7월 워크아웃(기업구조조정)이 개시된 상태라 이 위원장의 모든 언행을 분석하는 상황이었다. 1999년 3월 25일 강원산업 창업주 정인욱 명예회장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명예회장실에서 최근 5년을 근무한 관계로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저녁 늦게 문상을 온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이 위원장이 장례식장 한쪽에서 2시간 정도 심각하게 대화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대우그룹은 1999년 11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당시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의 최근 회고 칼럼을 보면 아마 그때가 외환위기 극복 방법에 대해 두 분이 첨예한 의견 대립을 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헌재 위원장은 자칭 정책홍보의 원조다. 정부나 공공기관도 애초부터 정책을 홍보해 왔다. 그런데 굳이 ‘정책홍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정책이 이해당사자들에게 잘 전달되고, 정책 수행에 협조케 해서, 정책 목적이 달성되도록 하는 일련의 홍보 목적·준비·과정·효과 일체를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그가 2012년에 출간한 <위기를 쏘다>에 잘 나와 있다. 행간의 뜻이 중요하므로 내용 일부를 그대로 소개한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의 회고록 &lt;위기를 쏘다&gt; 표지. 이 책에서 이 위원장은 1997년 외환위기는 홍보를 잘 활용했고, 언론인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정책홍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의 회고록 <위기를 쏘다> 표지. 이 책에서 이 위원장은 1997년 외환위기는 홍보를 잘 활용했고, 언론인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정책홍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홍보로 승부한다.”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자마자 세운 전략이다. 금감위에 대변인직을 ‘신설’했다. ‘홍보는 디테일이다’고 생각하고 홍보와 관련된 디테일을 직접 챙겼다. 브리핑룸부터 만들었다. 정부 기관에 ‘브리핑룸’이란 개념이 없던 때였다. 장관이 기자들과 소파에 둘러앉아 정책을 설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신문에 실리고 TV 뉴스에 났다. 소탈해서 좋긴 하지만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졌다.

 ‘이래서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생사를 건 싸움이다. 진지하게 알려야 한다.’

 정책 담당자에게 마이크를 쥐게 했다. 단상을 만들고 배경엔 파란색 바탕에 금색 금감위 로고를 박았다. 요즘 청와대 대변인 발표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정부 부처가 이런 형태의 브리핑룸을 도입했다.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변화였다.

 정책 발표 시간도 전략이다. 금감위의 중대 발표는 대부분 오후 6시에 나왔다. 기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 시간에 발표하면 기사를 언제 쓰라는 겁니까.” 조간 신문사 초판 마감이 보통 오후 6시다. 방송국은 8시, 9시 뉴스가 코앞인 시간이다.

 급기야 대변인 김영재가 내게 대들었다. “못 해 먹겠습니다. 기자들이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발표 시간을 앞당겨 주십시오.” 개의치 않았다. 마감이 중요한 게 아니다. 효과가 중요하다. 국민에게 긴박감이 전해져야 한다. 아침에 발표한 뉴스는 금세 낡아버린다. 그날 저녁 뉴스나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실리면 긴장감이 없다. 미국 시각까지 고려했다. 전 세계가 한국 위기관리 정책을 주목하던 때였다. 미국이 하루를 시작할 때 막 뽑아낸 뉴스가 전달돼야 한다.

 기자들을 직접 만났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시간만 나면 기자들과 약속을 잡았다. 술을 세게 마시던 때였다. 하루 수십 잔씩 폭탄주를 마실 때도 있었다. 몸을 사리지 않았다. 술자리는 일종의 세미나였다.

 “김 기자, 은행 구조조정의 핵심이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우선 방만하게 벌여놓은 지점이나 인력을 바로잡아야겠죠.”

 “바로 그거야. 그래서 해외에선 부실 은행 합병할 땐 P&A(자산부채인수) 방식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

 “P&A?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면 말이지….”

 이런 식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많은 기자가 나를 이해해 줬다.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논리를 받아들이고 널리 알리기까지 했다. 당시 기자들에게 느낀 내 감정을 최범수 신한금융지주 부사장이 정확히 표현해 여기 옮긴다. 그는 당시 금감위 구조개혁기획단의 멤버였다.

 “금감위의 초기 구조조정은 150명이 했다. 구조개혁기획단 50명과 출입기자 100명이다. 기자 대부분이 금감위에 우호적이었다. 회사와 데스크의 핀잔을 받으면서도 금감위의 논리를 옹호해 줬다. 구국의 일념이었다.”(『위기를 쏘다』 82쪽)

“이헌재 위원장은 매주 금요일 3시 이후, 즉 증권시장 종료 후 중요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주말에 갑론을박을 지켜본 후 월요일에 공식 발표를 하거나 수정해서 발표하곤 했다.” 당시 이 위원장과 자주 만났던 기자가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필자는 '데이터+논리+타이밍=홍보의 힘'이라는 홍보관을 가지고 대관홍보를 했다. 2004년 철스크랩(고철) 해외 수출로 국내 가격이 급등해 중요 부품 생산을 못 할 상황이 됐다. 이에 경제단체 서명을 받아 대정부 건의서를 제출하고 수출 사전 승인제도를 고시하도록 했다. 이때 필자는 ‘자동차, 조선 등 큰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수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nbsp;논리를 만들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임에도 한국무역협회 동의를 먼저 받아서 다른 경제단체의 동의도 받아냈다.
필자는 '데이터+논리+타이밍=홍보의 힘'이라는 홍보관을 가지고 대관홍보를 했다. 2004년 철스크랩(고철) 해외 수출로 국내 가격이 급등해 중요 부품 생산을 못 할 상황이 됐다. 이에 경제단체 서명을 받아 대정부 건의서를 제출하고 수출 사전 승인제도를 고시하도록 했다. 이때 필자는 ‘자동차, 조선 등 큰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수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임에도 한국무역협회 동의를 먼저 받아서 다른 경제단체의 동의도 받아냈다.

필자는 일복이 많아서 홍보와 대외 업무를 같이 했다. 두 일을 같이 해보니 많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우선 고위공직자를 만나기가 쉬웠다. 대기업 임원이었지만 산업부의 철강 담당 과장이 주 파트너였다. 국장 이상은 현안 이슈가 아니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회사 경영에 많은 영향을 주는 청와대 비서실, 기획재정부, 환경부, 고용노동부 같은 부서는 만나기가 더 어려웠다. 경제단체 주관 행사 때 명함 교환 정도만 가능했다. 그런데 해당 부서 출입 기자를 통하면 차관까지도 쉽게 만나고 편하게 술자리도 가능했다. 또 공개해도 될만한 정보지만 공론화는 곤란한 정보는 기자를 통해 입수할 수 있었고,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도 쉽게 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 형성이 누적되면서 ‘홍보 타이밍(정책 발표시간)’ 잡는 게 가능해졌다.

기업에서 대외 업무를 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정보 입수다. 경영환경과 정책 동향 정보는 기본이다. 정부 기관을 통한 경쟁사 동향 입수도 중요하다. 다음으로 정부 기관 활용이다. 회사 현안을 미리 알려줘서 대비토록 하고, 해외 철강 정책 동향을 알려주기도 했다. 가끔은 자기 업무에 활용하도록 자료를 만들어서 줬다. 상대방도 평소 기업인과 핫라인이 구축되어야 위급 시 대응을 할 수 있고 정책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정보 소통의 기본은 신뢰다. 경쟁사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산업환경 관점에서 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소통을 하면서 필자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쓴 점은 데이터와 논리였다. 단순한 정보는 한 번, 데이터가 있으면 두 번, 데이터 기반의 논리가 정연하면 세 번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어야 내가 필요할 때 활용(홍보)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잡을 수 있다. ‘데이터+논리+타이밍=홍보의 힘’이 된다. 정책홍보, 대관홍보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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