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연구원

요즈음 정가를 뒤흔드는 단어라면, ‘장성택’, ‘민영화’, 그리고 ‘내시(內侍)’라는 말이다. ‘장성택’이라는 단어가 꼽힌 이유는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화’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코레일 민영화, 의료 민영화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고, 이에 반발하여 철도노조가 파업했으며, 여기에 대해 코레일이 강경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이슈가 된 말이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불거져나온 여성 연예인 성매매와 관련해서, 여기에 연루된 연예인의 이니셜이 ‘ㅁㅇㅎ’이고 이것이 결국 민영화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등장했다.

‘내시’라는 단어가 한 주간 정가를 뒤흔든 것은 이정현 홍보수석의 발언에 대하여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가 논평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중권 교수는 SNS를 통해 “이정현 심기(心氣)수석께서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의 ‘부친 전철’ 발언을 두고) ‘테러, 암살’ 폭언을 하면서 감정이 격앙되어 울컥하셨다. 민주공화국의 홍보수석이 조선왕조의 내시처럼 굴면 곤란하다”라고 비판했고, 이에 대하여 이정현 홍보수석이 “나는 내시가 아니다.”라고 ‘해명’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시의 사전적 정의는 “조선 시대에, 내시부에 속하여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남자”를 뜻한다. 그런데 진중권 교수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시대의 내시는 모두 거세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치 이정현 홍보수석을 거세된 사람이라고 일컫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시에 거세된 남자가 등용된 것은 조선시대에 한정된 말이다. 고려 시대의 내시는 왕의 근처에서 왕을 보위하고, 호위하는 벼슬아치를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재예(才藝)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 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이나 경문(經文)에 능통한 문신(文臣) 출신만이 내시에 임명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에는 거세된 사람만 내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위 관료나 왕족의 자제만의 특권이며, 능력과 외모가 모두 뛰어난 사람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내시에 해당되는 직무를 담당했던 고려시대의 직책을 일컫는 단어는 ‘환관(宦官)’이었다. 고려 의종 이후, 특히 원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고,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이후 원나라의 환관 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면서 내시라는 직책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정작 진중권 교수의 발언의 의도는 내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때문일 것이다. 시사인의 2013년 12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실제 진중권 교수도 이정현 홍보수석이 “나는 내시가 아니다.”라고 반박한 것에 대하여, ‘내가 비꼰 것은 홍보수석님의 생식능력이 아니라 아부 능력’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환관의 이미지는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으로 인해 수염이 없는 얼굴, 가는 목소리를 가진 드러나지 않는 조연의 모습이 강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환관은 항상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환관들이 왕의 주변에서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부를 축적하고, 이것으로 인해 국가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 후한 말 황제인 영제를 환락에 빠뜨리고, 황후를 마음대로 천거하였으며, 옳은 이야기를 하는 관리를 무참히 살해해서 『삼국지』로 대표되는 난세가 등장하게 한 일등 공신인 열 명의 환관인 십상시, 시황제의 문서를 조작하여 태자와 명장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지록위마(指鹿爲馬)’로 대표되는 권력 남용을 저질러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왕조인 진나라를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한 조고(趙高), 당나라 현종 때 역시 권력 남용으로 국가를 망가뜨려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한 고력사(高力士) 등은 모두 환관이 권력을 잡고 남용할 경우 국가가 멸망하게 된다는 이야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는 인물들이다. 조선시대에도 내시들이 조금이라도 그 직위보다 과한 행위를 할 경우 이들의 예를 들면서 이것을 경계하곤 하였다.

진중권 교수가 내시를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정현 수석의 반론 역시 결과적으로 한 시사평론가의 직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정무수석이 된 셈이다. 두 사람의 논쟁 덕분에 역사 속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긴 내시에 대하여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조금 답답하고 슬픈 노릇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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