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4.02.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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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연구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10일 이상 빛깔을 유지하는 꽃은 없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 말은 권력의 무상함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력의 무상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 중 하나가 한명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명회는 1415년에 태어났다. 한명회의 집안은 나름대로 명문가로서, 특히 조부인 한상질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한명회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칠삭둥이’라는 것이다. 한명회는 실제로 잉태된지 일곱달만에 태어났다. 야사(野史)에 따르면 한명회가 태어났을 때 사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부모가 한명회를 키우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으나, 늙은 여자 노비가 정성스럽게 간호해서 차츰 사지를 갖추었고, 나중에는 장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칠삭둥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아니면 세조와 연계하여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명회의 외모에 대하여 추악스럽게 생겼다는 평가와 기골이 장대하다는 평가가 교차하고 있다.

한명회는 어린 시절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으나,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한명회는 이것에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공신 집안의 자제에게 특혜를 주는 음서 제도로 경덕궁(태조가 왕이 되기 전 머물렀던 개성 집) 문지기로 관직에 진출했다고 한다. 이 때 개성에 있었던 관리들이 그들끼리 계를 만들었는데, 이 계에 한명회도 가입하려고 했으나, 말직의 한명회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 1년뒤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이 때 한명회를 배척했던 사람들이 크게 후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 일화에서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한명회는 친구인 권람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인연을 맺는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시험한 후 자신의 책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한명회를 중용했고, 여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한명회는 계유정난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을 저지할 때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후 한명회는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 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세조의 오른팔로서 삼남 지방에 자연재해가 있을 때 절도사로 파견되었다. 또한 예종 때는 남이(南怡)의 옥(獄)을 처리할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한명회는 총 4명의 왕의 재위 기간 동안 관직에 머물면서, 병조판서, 영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고, 네 차례 공신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명회가 권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가 가진 책사로서의 능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리고 예종이 재위 14개월만에 승하한 후 다음 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예종의 조카, 즉 일찍 사망한 세조의 맏아들이자 예종의 형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의 왕위 등극에 일조한다. 그리고 그가 한명회 자신의 사위인 성종이었다.

이렇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한명회의 권력은 결국 자신의 주제넘은 행동에 의해 상실되게 된다. 한명회는 한강 변에 정자를 하나 짓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압구정(鴨鷗亭)이다. 이 압구정은 그 풍광이 좋아서 그 명성이 중국 명나라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들어올 때 꼭 들르는 코스로 자리잡는다. 이에 한명회는 자신의 정자가 좁다는 이유로 왕만이 쓸 수 있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제공할 것을 성종에게 요구한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한명회의 무례함을 주장했고, 꾸짖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던 성종 역시 한명회를 국문하였으며, 결국 한명회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성종에 이어 연산군이 즉위한 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을 때 중전 윤씨의 폐비(廢妃) 때 앞장섰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기에 이른다.

2013년에 영화 ‘관상’을 비롯하여 숱하게 드라마화 되었던 한명회는 간신이라는 평가와 희대의 책사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이것은 아마 세조에 대한 평가와 맞물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한명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다가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사람은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바로 알아야 하고, 권력이라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을 한명회가 인생역정을 통해 현대인에게 알려주는 듯 하다.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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