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불문학관 / 사진: 전대웅

【투데이신문 박애경 기자】비에 젖은 남원(南原)은 푸근하고 고즈넉했다. 머리를 비우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자에게 남원은 외할머니 품처럼 따뜻했다. 어리광을 부리 듯 마음속에 뭉쳐있는 묵직한 일상들을 내려놓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여행자는 발길 닿는 곳곳마다 짧은 사색에 잠긴다.

아름다운 沼(소)와 潭(담)이 있는 뱀사골 사색

   
▲ 뱀사골 / 사진: 전대웅

천년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남쪽 평원에 넘실대는 푸른 벼이삭들이 이른 가을비에 누르스름 익어가는 소리를 낸다. 여행자는 둘러 쓴 우비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지리산 뱀사골을 천천히 걸었다. 청정 계곡 뱀사골 수로를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는 가는 여름을 안타까워하며 아우성 댄다. 물줄기의 외침은 이내 여행자를 세상과 단절시킨다. 왼편으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계곡물과 어우러진 산세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여행자는 넘어지지 않으려 평평하고 안전한 돌부리만 골라 징검다리 건너듯 뱀사골을 올랐다. 여행자는 생각했다. 가슴을 뻥 뚫어주는 뱀사골 절경은 걸음을 멈췄을 때야 비로소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숨 가쁘게 살아 온 인생에 대한 단상에 잠시 빠져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돌부리의 투박함이 싫지 않다.

   
▲ 뱀사골 오르는 길 / 사진: 전대웅

뱀사골은 계곡의 골이 깊고 넓어 호젓하게 트래킹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요룡대에서 교각 옆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용이 목욕하고 승천했다는 ‘탁용소’, 뱀 모양의 기암절벽 ‘뱀소’, 호리병 모양의 ‘병소’, 병풍 같은 석벽 사이로 개울이 흐르는 ‘병풍소’ 그리고 계곡 끝자락에 위치한 ‘간장소’를 만난다. ‘간장소’는 화개장터 소금장수들이 이곳에서 미끄러진 후 물빛이 간장 색으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요룡대에서 와운마을로 오르면 지리산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이 소망을 이루고픈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넓은 팔을 벌리고 있다.

   
▲ 뱀사골 / 사진: 전대웅

 작가 최명희의 『혼불』 속 문학공간에서의 단상

   
▲ 서도역 / 사진: 전대웅

시간이 멈춰버린 서도역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이곳에서 여행자는 깊은 호흡으로 숨고르기를 한다. 소설가 최명희 씨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집필한 거작 『혼불』의 문학적 공간인 서도역은 소설 속 효원이 신행 올 때 내렸던 곳이며 강모가 전주로 유학 갈 때 오갔던 곳이다. 이처럼 한때 누군가의 소소한 사연을 싣고 내렸던 서도역은 이제 들꽃과 잡풀들에 덮여 있는 녹슨 철길과 신호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여행자의 마음을 위로한다. 인생은 다 그런거라고, 잘 살아 냈노라고, 그리고 잘 살아갈 거라고 말이다. 사람대신 돌멩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합실 창틀 사이로 바람 하나 지나간다.

   
 

여행자는 소설 『혼불』 속 공간들이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찾은 <혼불 문학관>. 작가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소설 『혼불』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를 살아가는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의 종부(宗婦) 3대의 굴곡진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청상의 몸으로 기울어져가는 이씨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청암부인, 허약하고 무책임한 종손 강모를 낳은 율촌댁, 강모와 결혼한 효원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들이 전통사회의 양반가로서 부덕을 지켜내는 보루로 서 있다면 그 반대편엔 치열하게 생을 부지하는 하층민의 ‘거멍굴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에 계급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이들과의 갈등 구조는 작가 최명희만의 수려한 플롯을 가늠케 한다.

   
 

특히 이야기 사이사이 정성스럽게 묘사된 당시의 풍속사는 정교하다 못해 예리하다. 여기에 전라도와 경상도를 접하고 있는 남원의 지리적 특성상 여러 지방 말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억양을 만들어내는 남원말로 서술된 맛깔스런 표현은 작품의 예술성을 한층 더 승화시킨다.

이처럼 작가 최명희는 창작에 대한 열정과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절절했다. 그 절절함은 그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다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는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 있다면, 새암이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속으로 땅 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 최명희 작가 작업실 / 사진: 전대웅

작가 최명희는 1980년 봄 ‘그다지 청명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해 1996년 겨울 ‘온몸에서 눈물이 차오른다’로 만 17년간의 『혼불』 집필을 마무리한다. 여행자는 긴긴 세월 무던히 한 작품만을 위해 혼을 불사른 작가의 삶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삶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치열하지 못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조금은 부산한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을 이곳 <혼불문학관>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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