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1더하기 1은 왜 2 인가요?’
물었다. 그리고 여덟해 인생 최초로 나의 무언가를 빼앗겼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어머니는 유난히 수학 성적이 좋지 않은 나를 이웃의 누나에게 부탁했다. 첫째 날 그저 그런 몇 문제에 허덕이다 깊이를 더해가는 골똘 사이로 위의 질문을 꺼냈다. 1은 왜 1이고 2는 왜 2인가. 내 의문문 한 줄 보다 짧은 황당함이 그녀의 입가에 스쳤다.

애써 돌아온 친절한 답변은 ‘하나씩 더한 이 숫자를 2라고 부르기로 한 거잖아.’ 였다. 뭉게뭉게 떠올리던 색채와는 다른 답이었다. 하지만 ‘아! 그렇죠.’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야 했다. 바보같은 질문이라는 부끄러움과 뜻을 확실하게 표현 못하겠다는 무의식이 지레 버무려진 대응이었다. 다음 진도를 나가기 위해선 이리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려는 듯 했다.

허무하게도 이 질문의 답은 오랜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뒤에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뭉게구름을 ‘증명’이라 불러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1+1=2 를 어떻게 증명하는가?’라고 물었어야 했다. 당시엔 그 의문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1+1=2 증명’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라는 수학자가 ‘수학원리’라는 책에서 방대하게 수와 셈에 관해 정의한 후, 복잡한 기호를 사용해 여러 줄에 걸쳐 구현했다. 이 보다 손쉽다는 증명조차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의 자연수에 대한 5가지 ‘페아노 공리계’와 덧셈의 정의를 엮는다.

가끔 그 때 이웃의 누나가 아니라 수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나의 모호한 물음을 길라잡이 했다면 어땠을지 공상에 빠지곤 한다. 아니, 그런 비현실적인 도움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나에게 막연한 궁금증의 들판 위를 충분히 뒹굴만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질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낮과 밤을 좌절과 맞바꿔야 했을지도 모른다. 질문의 본질을 깨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실패의 과정 중에 나는 조금씩 증명의 계단을 오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않았을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었더라도 부끄러워 쫓기듯 얼렁뚱땅 넘기고 말았을까. 해답을 찾을 때 까지 더 이상 진도를 나아가지 않아도 됐다면 어땠을까. 어른들에게 손바닥을 세워 보이며 ‘잠시 멈춰주세요, 전 그 답이 이해가 안 되네요’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것은 용기일까 혹은 나의 권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이니 나의 권리가 맞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시간의 권리’를 그 짧은 순간 손아귀에서 잃은 것이 된다. 나는 그 날, 실패의 시간을 가질 나의 권리, 내가 내 실패의 주인이 되는 ‘실패 할 권리’를 빼앗겼던 것이다.

실패할 권리는 실패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전제 조건이다. 과정을 통해 배우면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지속적인 교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권리를 자주 빼앗긴다. 매일, 매달, 일 년의 시간표가 어른들 시침 위에서 째깍거린다. 이렇게 야박한 환경에선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오류 확률이 적은 방법을 신뢰하게 된다. 이해하기보단 외워야 하고, 불확실한 추론 보단 확실한 경험칙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즐거움보단 토익점수를, 자기 콘텐츠 보단 스펙을 더 든든한 것이라 믿게 된다. 나 아닌 알려진 권위를 따라야 마음이 편해진다.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다.

자신의 권리 보다 절대적인 권위를 찾아 헤매느라 기력을 소진하는 이런 사회는, 미래를 위한 선결과제 뿐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할 여력마저 미미해진다. 정당제 정치에서 인물론이 득세할 뿐 아니라, 요즘의 갑질 논란, 입시교육, 비정규직, 열정페이, 부동산, 사대강, 세월호, 굴뚝시위 등 대부분의 사회문제도 결국 시민이 주인의 권좌를 빼앗긴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자신이 시간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소홀히 하면 질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되고, 실패할 권리 대신 실패의 대가에 대한 의무만을 진다. 종래엔 누군가의 실패시간을 대신 책임져주는 노예가 된다. 시간 노예가 급증하는 사회의 약자는 끊임없이 시간 노예의 시간 노예로서 복무한다. 이 때 실패에 대한 개인의 공포를 유용한 장치로 사용하는데, 정부는 종북논란 점화나 경제살리기 등으로 공포를 활용하는 모습을 줄곧 보여 왔다. 그래서 심지어 실패할 권리는 정부가 갖고 실패의 대가는 국민이 치르는 현상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2015년 벽두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신년기자회견이 논란이다. 올해에도 사회 곳곳은 온갖 문제들에 대한 물음으로 빽빽하다. 그러나 국민이 묻고 싶은 것들은 제대로 질문 되지 않았고, 대통령의 답에는 증명이 빠져있다. 왜 1더하기 1이 3이냐고 묻는데 그 숫자를 3이라 정했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요구할 수밖에 없다.

“멈추세요.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마음대로 다음 진도 나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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